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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쩔 수 없는 j인가 봐~

그냥 노는데,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4)

by 철없는박영감
피(P) 묻은 계획(J)


거창하게 말하면 파이어족, 솔직하게 말하면 돈 많은 백수가 꿈이었던 나는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가장 먼저 달성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자유하면, 소위 품위유지라고 하는, 결국은 풍족하게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인생을 소풍 나온 듯이 사는 모습이다. 그러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어렸을 때부터 방학이면 스케치북에 냄비뚜껑으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일일생활계획표 짜기를 제일 먼저 했던 파워 j답게 계획 수립을 위한 돈계산에 돌입했다. 어휴~ 만약 결혼해서, 아기도 낳고, 가정도 이루고 산다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왔다. 재벌이 아닌 이상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결혼은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가정하에 대략 10억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때 딱 이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억 만들기> 우선 1억이라는 종잣돈을 모아서 10억으로 불리는 플랜. 연봉을 따져보니 1억을 모으려면, 한 푼도 안 쓰고 다 모아도 3~4년은 걸렸다. 이를 어째?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IMF를 관통한 부모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적금이나 열심히 부으라고 했다. 처음엔 잘 모르니까 시키는 대로 했는데, 하지만 부모님은 은행이자가 2~30% 하던 때다. 지금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때 은행 적금이자가 아무리 높아도 2~3%였고, 지금처럼 저축은행 같은 제2 금융권이 있던 시기도 아니었다. 주식은 여윳돈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는 생각과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BUY KOREA>였지? IMF를 벗어나면서 여러 투자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20~30%의 수익을 냈다는 펀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억 도 없는 애가 10억을 모으겠다고 생각하니 너무 막막했는데, 때마침 레버리지 효과를 설파하며 적립식 펀드들이 등장했고, 나 같은 사회초년생들은 무조건 가입 안 하면 바보소리 들을 정도로 열풍이 불었다. 은행보다 훨씬 수익률이 좋았고, 적금처럼 한 달에 조금씩 납입하다 보니 투자 상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망할 일 없을 거라고, 안정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거다. 브릭스 펀드,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에 투자하는 빅 5던가, 빅 3이던가 하는 펀드들... 여기서 살짝 재미를 보고 어렵게 모인 종잣돈을 겁도 없이 펀드에 넣기 시작했다. 그때 한참 유행했던 펀드가 인도차이나 펀드였는데, 이게 내 인생을 피바다로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행히 빚을 내거나 부모님 찬스를 쓰진 않았다. 그럴 배포도 없었다. 만약 조금만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성향을 가졌다면, 아휴 상상도 하기 싫다.


어느 날인가 뉴스에서 중국 증시가 폭락했다는 뉴스가 나오며 펀드 환매가 갑자기 중지되어 버렸다. 하루사이에 원금이 절반으로 내려가더니 거래정지가 된 4일 동안 1/4토막이 나버렸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갈치(1/4)냐, 고등어(1/2)냐'라는 자조 섞인 말들도 탄생했다. 갈치가 되어버린 내 펀드. 그야말로 휴지조각이었다.


펀드를 가입했던 은행원을 찾아갔다. 막상 창구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는데, 할 말을 잃었다. 둘 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은행직원이 던진 마지막 말에 그나마 휴지조각이라도 환매를 하자고 결심했다.


"제가 이런 말씀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고객님 원금 찾으시려면 대충 계산해도 지금부터 수익률이 400%가 나야 됩니다."


그때 회사가 대방동이었는데, 정말 한강철교에 가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무 그 자체였다. 그 뒤로 내 인생에서 주식과 펀드는 없는 단어가 됐다. 오로지 은행... 그것도 제1 금융권만 거래했다.


느닷없이 코로나... 그리고 백신


그 뒤로 이직을 하고, 열심히 일해서 연봉도 올리고, 꾸준히 저축해서 돈도 꽤 모았다. 여전히 솔로인 채로 다시 여유로운 삶을 되찾았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도 샀다. 내 집을 가졌다는 안정감이 이렇게 큰 지 몰랐다. 이상하게 집을 사고 나니 돈이 더 잘 모였다. 금주, 금연 선언 같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은행 이자는 제로금리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버는 족족 거의 그냥 다 써버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코로나가 터졌다. 그리고 백신을 맞았다. 갑자기 많이 아파졌다. 아프니까 여유가 없어지고, 여유가 없어지니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파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2차 접종 후, 더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정시퇴근을 하다 보니 팀장이 호출을 했다. 그렇게 일할 거면 다른 팀으로 가라고... '아~ 민폐구나'라는 생각에 한동안 의절하다시피 했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라고 했다. 지금도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집에 여유가 있다고... 너 하나 먹여 살리는데 전혀 문제없다고 든든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막상 퇴사를 했는데... 엄마는 아파트 청소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말로는 집에서 노는 게 너무 심심하고, 노후로 마련한 상가 때문에 임대사업자로 등록이 되어 의료보험료가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게 아까워서 그렇다는데... 아~ 이건 타이밍 상,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때문이다.


한동안은 퇴직금으로 살았다. 그런데 퇴사 전에 저질러 놓았던 각종 할부와 구독 서비스들이 발목을 잡았다. 작년 12월에 다 해결됐는데, 그러고 나니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였다. 이번달부터는 정말 부모님한테 용돈을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래도 공짜로 받을 순 없어서, 본가에서 빨랫감을 가져다 우리 집에서 빨래를 시작했다. 빨래가 없는 날이면 설거지를, 설거지 거리도 없는 날이면 청소를 했다.


피(P) 흘리는 계획(J)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사실 파이어족의 꿈을 접고 캥거루족이 될 계획이었다. 집을 팔고 살림을 합치면 그 돈으로 이자를 받아서 용돈도 쓰고, 생활비도 보탤 계획이었다. 15년 가까이 열심히 일하고 모은 덕분에 남아 있는 돈이 그 정도는 가능할 정도가 됐다. 그리고 아버지 연세가 점점 많아지면서 얼굴 볼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힘들어도 한 집에서 부대끼며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계획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엔 종교다. 아니지 미신이다. 부동산 침체기인데도 운 좋게 집이 좋은 가격에 잘 팔렸다. 그래서 이사를 하려고 하는데... 집에서 다니는 절에서 북서쪽이 삼살방위, 대장군방위라며 절대 이사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앓아누웠다. 결국 절에 시주를 하고, 이삿날을 따로 받아서 혼자만 움직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이번달부터 용돈 받는 생활이 시작되려고 한다. 아휴 창피해 다 늙어서 용돈이 뭐야... 아마 이런 사정 때문에 더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지도 모른다. 인생의 변수는 늘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처음 이사를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는데... 이사한 에피소드가 동기부여가 돼서 소설도 한편 썼다. 그리고 그 소설에서 파생돼서 지금도 한편 연재 중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재 두 번 밀렸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 가고 명절에 부모님 모시고 운전해야 돼서 도저히 시간이...ㅜㅠ)


퇴사하고, 이사하고 생활 반경이 확 줄었는데... 이제야 겨우 내 그릇에 맞는 일상을 보내는 것 같다. 그냥 노는데, 하루가 꽉 찬 느낌이다. 아직도 전부 계획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1분, 1초 사이에도 확확 바뀌니까... 그런데 전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이다. 여유가 생기니까...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계획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계획대로 안되면 융통성을 발휘한다. 다 여유가 생겨서 그렇다.


층간소음? 사람 사는데 소음이 없을 수 있나... 사실 괴로운 마음은 소음 때문이 아니라 윗집이 감히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괘씸함 때문이다. 층간소음은 가해자가 피해자고, 피해자가 가해자이다. 원인은 이웃이 아닌데, 이웃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게 다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 이제 피검사를 하면 전부 다 정상이다. 드디어 나쁜 피를 전부 묻히고 흘려보냈나 보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일상을 감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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