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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3시간전

[소설] 석원과 상제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어쩔 수 없이 제5화 : 그에게서 듣는 그와 그의 이야기 (1)

어쩔 수 없이 꼭 따라다니는 (Inevitable)


    그는 고맙게도 거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춰준다. 아무 의심 없이 그냥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보면 된다. '일단 해보고~'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나이가 10살이나 차이 나는데도 세대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그의 배력 덕분에 잘 싸우지도 않는다. 여태껏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아닌가 보다. 안 싸우는 게 그게 불만이란다. 나보고 자기에게 맞추지만 말고, 생각이 다르면 바로바로 이야기하란다.


 "엉? 안 맞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지금까지 다 잘 맞는 거 같은데... 아니 형이 거의 일방적으로 맞춰주지 않았나? 이야기할 게 없는데... 뭘 이야기하라는 거야? 아휴~ 얘기하다 보니까 나 반성해야겠네... 앞으로 형한테 진짜 잘해야겠다."


    이렇게 대답하면 답답해한다. 그게 아니란다. 내가 심하게 주변을 의식해서 그런 거란다. 음... 가만히 들어보면 뉘앙스가 묘하게 어디서 뭘 주워듣고 왔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역질문을 하면, 잠시 주춤한다. 인스타나 유튜브라고 했다가는 내가 뭐라고 할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때는 이 때다 싶어서 한마디 한다.


 "형, 하나 있네. 마음에 안 드는 거... 생각이 다른 거... 말 안 해도 알지?"


 "어? 어... 어... 야 근데 이거는 한 번 봐봐... 이게 요즘 핫한 채널인데..."


 "혀~엉!"


 "......"


 "왜 이렇게 SNS를 맹신하는지 모르겠다. 7, 80 먹은 노인네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제 꼴랑 45살도 안된 아저씨가 왜 그러냔 말이야~"


 "아니... 난 그냥 불안해서...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사라지고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우리가 뭐 혼인 신고를 할 수 있냐? 사실혼 관계라고 인정을 받을 수가 있냐...? 갑자기 어디서 사고가 나도... 연락이 안 닿으면 알아낼 방법도 없고... 하루종일 꼭 따라다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그럴 순 없고..."


    그의 말을 들어보니 불안해하는 것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래, 그래. 형 마음 잘 알아... 그런데 나 어디 잘 안 가잖아... 거의 여기 집에 있는 거 알잖아? 나 프리랜서라고, 99%가 재택근무야.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싫어, 싫어. 아! 몰라, 몰라. 난 우리 사이를 꼭 인정받을 거야. 동네방네 소문을 내든, 나라든 어디든... 소송을 하든 어떻게 하든..."


 "형! 그건... 좀..."


 "왜? 얘들 봐봐. 게이 커플 유튜버인데... 브이로그 찍어서 올리거든? 우리도 이런 거 해볼까? 혼인신고가 안되니까 이렇게라도 우리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거야. 어때? 너도 좋지? 그렇지?"


    나는 내가 '게이'이면서도 이 '게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일 뿐인데... 백인, 흑인, 황인을 나누는 것도... 남자, 여자 나누는 것도... 울타리를 쳐버리는 모든 구분 짓는 말들이 소름 끼친다. 행여 나중에 어떤 폭력적인 형태로 잣대를 들이댈지 모른다.


 "아! 이건 진~짜 아니다! 온 세상에 얼굴 다 팔아가면서까지 이러고 싶진 않다! 난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단 말이야. 남들이 불편한 시선으로 볼 거 뻔히 아는데... 굳이 그 험한 길을 가야겠어? 남들이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일을 굳이 해야겠냐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남들한테 꼭 인정받을 필요가 뭐 있어? 그리고 불편해하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뭐 있어? 그냥 조용히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게 서로 윈윈 하는 거 아니야? 조용히 있으면 될걸...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어가면서 까지 관심 끌려는 이런 애들... 관종들... 지들은 좋겠지... 아니, 지들만 좋지... 남은 신경도 안 쓰지... 사회의 편견만 더 조장하는 이런 영상들... 뭐가 좋다고 그래? 진짜 세상에 우리 사이를 인정받고 싶으면, 사회의 편견을 깨기 위해 더 그들과 잘 어울려 살 생각을 해야지. 왜 대립각을 세우고, 알아달라고 자기주장만 해대는 거야?"


 "......"


 "다 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자극적이고 야사시한 영상 올리는 거잖아? 썸네일만 봐도 도대체 속옷바람으로 나와서 뭐 어쩌자는 건데? 보기 흉하기만 하지... 걔들 영상 속에서는 좋아 보이지? 그런데 카메라 밖에서는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둘이 헤어지라도 하면... 나중에 어떻... 헉!"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고 만다. '아 이게 아닌데...' 마치 디폴트 값처럼 입에서 터져 나와버린 이 말이 우리의 첫 싸움의 시작이었다.


 "거 봐~! 너한테는 헤어진다는 선택지가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아니, 형. 그게 아니고... 이건 그냥 내가 말실수로..."


 "왜? SNS에 영상 남겨놓으면, 나중에 나랑 헤어지고 딴 녀석이랑 만날 때 혹시나 방해될까 봐 그래? 어? 그런 거야?"


 "아니... 형... 왜 말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알겠는데... 이건 말실수라고... 그냥 단순한 말실수... 나도 모르게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튀어나온 거라고..."


 "원래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더 진심인 법이야.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숨겨둔 게 더 진심이라고..."


 "아~! 형. 우리가 왜 이렇게 갑자기 싸우고 있는 건지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어쨌든 미안해. 이건 진짜 내 잘못이야. 내가 말실수한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형이 하자는 거 무조건 반대하지 않고... 일단 해볼게. 그 브이로그라는 거 한번 같이 보자. 그럼 됐지? 응? 나 이런 별것도 아닌 걸로 형이랑 싸우기 싫단 말이야. 응? 한 번만 봐주세요. 네?"


 "그래? 이번 한 번 만이다. 에헴! 그럼... 우선 여기 내 옆으로 와서 앉아봐! 여기... 여기..."


 "그냥 TV화면으로 공유해서 크게 보면 안 돼?"


 "응. 안돼! 여기 내 옆에 꼭 붙어서 봐야 돼. 꼭 그래야 돼. 그러고 싶어. 빨리 일루 와~!"


    어쩔 수 없이 그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그러자 그는 신이 나서 같이 보고 싶다던 영상을 찾기 시작한다.


 "이거... 우리 오늘 처음 싸운 거다? 그렇지?"


 "이거 다 계획한 거지?"


 "오늘이 우리 처음 싸운 날... 기념해야지..."


 "이 양반이 미쳤어? 점점 왜 이러는 건데? 그만해라. 나도 한계가 있다."


 "히히히. 알았어."


 잠시 후,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올려 셀카포즈로 내 얼굴 앞으로 화면을 들이민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조금 더해져 얼굴살이 좀 오르고, 머리숱이 좀 적어지긴 했지만, 영상 속의 얼굴들은 분명 그때, 그 군시절 그들이다. 동기 X와 Y 상병!


 "혀.. 형!"


 "응? 왜 그래? 왜 그렇게 놀란 눈치야? 아는 사람이야?"


 "응."


 "엉? 진짜? 아는 사람이야? 어떻게? 어디서 아는 사람이야?"


 "전에 말했었지? 졸병 때, 불침번 서다가 보일러실에서 귀신 소리 들었다는 거..."


 "어... 근데 귀신 아니고 너 괴롭힌 고참이었다면서... 헉! 설마?"


 "어! 그 새끼야. 옆에는 그때 동기고... 얘들 뭐야? 어떻게 둘이 이렇게 된 거야?"


오 마이 갓


    그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당직사관과 함께 보일러실로 향했다.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다. 당직사관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이 잠긴 것을 확인했다. 내가 너무 무서워서 잠그고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문을 두드리며 혹시 안에 누구 있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당직사관은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 보일러실 자물쇠 열쇠를 찾았다. 안에서는 제발 내보내달라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동기 X와 Y 상병이 눈물범벅이 된 채 같이 있었다. 당직사관은 내무반장을 호출해서 상황을 정리하고 나와 그들을 차에 태우고 당직실로 향했다. 이후 Y 상병은 가혹행위와 추행죄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나와 X는 피해자 신분이 되어 조사를 받고 분리 조치 되었다가 각각 다른 부대로 전출되어 흩어졌다. 나중에 X가 정신적 충격으로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전출 후의 군 생활도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일단 모두들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뒤에서는 수군거리기 바빴다. 초등학교 때, 여자아이 무리에게 따돌림당하던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났다.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몸은 편했다. 하지만 관심사병이 된 것은 물론이요,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국방부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최소화하고 다시 차근차근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 걸었다. 그렇게 충격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대학원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몇 번 받았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혼자 살아내야 할 준비가 더 시급했다.


    신입 사원 연수가 끝나고 배치받은 부서에 첫 정식 출근한 날,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평생 같이 있고 싶어 지게 만든 사람. 기대고 싶게 만든 사람. 같이 보낸 시간이 오래될수록 점점 울타리를 넓게 쳐주는 사람. 그 울타리가 끝도 없이 너무 넓어서 내가 누구인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오로지 '나'로만 봐주는 사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랑? 존경? 아니 그 사람은 나에게 종교였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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