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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제7화

It Is What It Is

by 철없는박영감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침대에 수평으로 누워있었지만, 어딘가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듯이 머리가 무거웠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가만히 앉아 있으려 버텨봤지만, 이내 주변이 뱅글뱅글 돌며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웩~! 우~웩!' 헛구역질을 하며 변기를 붙잡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출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숙취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은 것은 둘째 치고, 그 사람에게 그렇게 발악하듯이 커밍아웃을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휴대폰에는 사수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건이었다. 거의 반포기 상태로 누워있는데, 대략 10시 정도 됐을까? 마지막으로 문자 알림음이 울리더니 불난 전화통이 진화됐다. '아~! 그냥 이대로 잊히면 좋겠다...'


술에 취해 커밍아웃한 다음 날 아침.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겼으면 좋았을 것을... 그 사람에게 무책임하게 던졌던 말들이 전부 생생하게 기억났다. 인생의 마지막 짝사랑이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속이 허해졌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사수가 보낸 문자에는,


『아~ 상제씨! 어제 고생 많았죠? 갑자기 출근을 안 해서 무슨 일 생겼나 걱정했어요. 통화도 안되고...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휴가 써야 된다면서요? 팀장님이 막 회의 마치고 나오시면서 이제 말씀해 주시네... 여기 일은 걱정 말고 일 잘 보고 와요. 인사팀에는 잘 말해놨어요. 돌아와서 휴가 신청서만 제출하면 된데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그 사람은 그렇게 돌아갈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때부터 그 사람과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솟았다. 아니 스스로 벽을 쳤다. 그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내가 혼자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까 봐 계단으로 다니고, 사무실에서 눈에 뜨일까 봐 파티션 아래로 숨었다. 하지만 그렇게 위축될수록, 그 사람의 존재감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 사람의 목소리, 발소리, 향수 냄새, 그리고 아우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청첩장이 손에 쥐어졌다. 그 사람이 그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는단다.


'이 정도였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빨리?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 정도로 싫었던 거야? 그렇게 빨리 떼어내고 싶었어? 하긴 그랬겠지. 태어나서 동성에게 고백받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상상이나 했겠어? 부하직원이 그동안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꺼림칙했겠지... 하아~ 축복해야겠지? 잘 살기를 빌어줘야겠지? 그렇지? 그래야겠지? 행복하기를...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다행히 거래처의 접대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우리는 큰 회사의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래처 담당자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그 사람과 함께 TFT에 참여하게 됐다. 3년 차 평사원에게는 정말 큰 기회였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명함이 새로 나왔다. '여상제 대리'.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프로젝트 막바지에는 집에도 못 가고, 주말도 반납하며 일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다시 그 사람과 어울리게 됐다. 하지만 분명히 공과 사는 확실 구분했다. 서로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 갈 무렵, 경기가 나빠지면서 회사에 정리해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팀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팀원들이 하루에 한 명씩 그 사람과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의 막내인 내 차례가 왔다.


"여상제 씨, 그동안 소문은 익히 들었겠고... 오늘 왜 보자고 한 건지 대충 눈치는 챘죠?"


"예... 팀장님! 알고 있습니다. 정리해고가 있을 거라는..."


"네! 맞아요. 그동안 대형 프로젝트 한다고 고생 많았는데... 아직 다 끝내지도 못하고 이런 얘기하게 돼서 미안해요. 내가 팀원들 면담하면서 곰곰이 생각을..."


"저! 팀장님! 말씀 도중에 불쑥 끊어서 굉장히 죄송한데요...! 저 그냥 오늘 저녁 식사 같이 하면서 면담하면 안 될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의 말을 끊었다. 아마도 진짜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어...! 상제 씨...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 상제 씨 내보내지 않습니다."


"네? 그게 무슨... 그럼..."


"음... 상제 씨가 본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비밀을 저한테만 얘기해 줘서, 저도 그냥 솔직히 얘기할게요. 이건 우리 둘 만 하는 얘기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얘기고요. 제가 그만큼 상제 씨를 믿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


"아! 저녁을 같이 먹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아직은 그래도 음... 맞아요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거고, 예상도 못했던 상황이라... 그렇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는데... 상제 씨가 싫은 건 아니에요. 아니 다른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어요. 그날도 비록 술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진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크게 무례하지도 않았고, 실수랄 것도 없었어요. 다만 제가 상제 씨를 받아들일 만한... 그만한 그릇이 아직 못 되는 거뿐이에요."


"......"


"이번에 팀원들이랑 면담을 하다 보니까... 음... 다들 본인들 두 손에 걸려있는 게 많더라고요. 최 차장님은 큰 아들이 군대에 가 있고, 송대리는 이제 막 대출로 집 장만해서 예쁜 첫째도 낳았고, 아! 박대리는 내년에 결혼한다면서 청첩장 이렇게 주고 가네요. 하하하. 다들 어떻게 보면 홀몸이 아니더라고요."


"......"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날이 창창한 우리 상제 씨... 아마 지금 자기는 건사할 가족도 없고, 결혼을 약속한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본인이 대상이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건 아니고... 제가 지금 프로젝트하고 있는 거 상제 씨에게 마무리 잘해달라고 부탁해도 될까요?"


"네?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


"음... 저도 제 얘기... 아니 약점 한 가지 고백할게요...! 흠... 조만간 이혼하게 될 것 같아요."


모르는 번호


유튜브를 보고 있는 상제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왠지 내가 옆에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다는...


"뭐 이번에는 혼자 두는 게 맞겠지..., 생각이 많아질 때는 옆에 누군가 있는 게 더 복잡해지니까... 암... 전에 어디선가 읽었는데...『참된 헌신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때 있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사라지는 바로 그 점이다.』이 걸 어디서 읽었더라? 응? 무슨 책이었지? 아! '프레임' 거기서 읽었구나!"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린다. 070이 아닌 010으로 시작하는 일반전화다. '보이스 피싱인가?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것이 상책이지... 암...' 그런데 번호가 낯익다. 어! 상제 번호랑 뒷번호가 똑같다. '뭐지?'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어볼까? 에이 보이스 피싱이면 어떡해? 아휴~ 궁금한데... 왜 하필 상제 번호랑 똑같아서... 아~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아까 그 번호다. '받아? 말아?' 하지만 호기심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역시 보이스 피싱, 적어도 스팸 전화인가 보다. 이런 전화들은 연결되는 데 잠깐 PAUSE가 생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끊으려는데... 저쪽에서 다급하게 말을 걸어온다.


"저! 잠깐... 끊지 말아요... 잠깐만요..."


"누구세요?"


"저... 상제 엄마되는 사람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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