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t's Life
어쩔 수 없어. 사는 게 그런 거지 뭐
그날, 앞에 놓여있던 물 잔을 몇 번 비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마셔도 마셔도 끝없이 목이 탔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회사면접시험 때보다 더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었고,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시어머니가 만나자고 하면 며느리들이 이런 기분이 드나? 그래서 시댁의 <시>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는 거구나? 그나저나 왜 보자고 하신 걸까? 상제 모르게 만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약 예상이 맞다면... 그러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예~예~ 알겠습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만 해야 하나, 아니면 우리 사이를 인정해 달라고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내야 하나?'
'아들과 남편'이라는 호칭을 동시에 가진 불쌍한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여자들끼리 벌이는 숨 막히는 기싸움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대신 진리와 순리라고 포장된 비논리적인 주장과 반응에 대한 감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설전이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일방적일 것이다? 왜냐면 부모니까. 물론 장모와 사위 같은 관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계가 돼 본 적도 없지만, 설사 돼 봤다고 해도, 분명 지금 같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칸막이로 구획되어 있는 이 방은, 난실(蘭室)이라는 예쁜 이름이 붙어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 전야보다 더한 긴장감 흐르는 난실(亂室) 같았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실 이미 고즈넉한 고급 식당이 주는 배타적이면서도 은밀한 분위기에 살짝 압도된 상태였다. 넥타이를 고쳐 매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순수해 보이는, 나쁘게 말하면 어리바리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들어 문이 열린 방향을 바라봤다. 시선 너머에서 깔끔한 바지정장 차림의 그의 어머님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위풍당당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대비마마 납시요~'같은 그 위세에 나도 모르게 그만 죄인이라도 된냥 바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회피했다.
"앉으세요. 상제 모르게 나온 거 맞죠?"
그의 어머니가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나도 앉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조선시대의 살벌한 내명부 기강을 몸소 체험하니, 왜 상궁들이 잘못한 게 없어도 소인을 죽여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예? 아.. 예... 어머님. 맞습니다."
"흐흠..."
그의 어머님이 뭔가 목에 걸린 듯한 기분 나쁜 기침소리를 내자 단정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종업원이 그의 어머님 앞에 놓인 잔에 물을 채웠다. 이어 오늘 나올 요리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끝나고, 종업원이 그의 어머님에게 음식을 언제쯤 내오면 될지 물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어머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이것저것 그의 어머님에게 윤허를 청하는 동안, 나는 마치 자대배치를 받고 처음 내무반에 온 신병처럼 각을 잡고 앉아있었다. 그의 어머님이 익숙한 듯 이런저런 디테일을 추가한 주문을 마치자, 이내 종업원이 "예, 알겠습니다. 사모님"이라고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사모님? 사모님!' 이런 고급식당을 제 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이용하는 데다가 메뉴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식당에서, 물론 예약이겠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세세한 주문을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왠지 자격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고 이제 이 난실(亂室)에는 나와 그의 어머님, 둘만 남았다.
"저...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 아닙니다. 어머님... 당연히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 흐흠"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한 그의 어머님의 껄끄러운 기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의 어머님이 물을 마시는 동안,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기 위해 나름 준비했던 멘트를 시도해 봤다.
"먼 길 올라오시느라 힘드셨죠, 어머님? 긴 시간 이동하시느라 오시는 길 지루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입니다, 어머님. 다음에는 제가 먼저 준비하고 내려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어머ㄴ..."
"누가 그쪽 어머님이죠? 경솔한 언행은 좀 삼가 주시죠?"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었다. 그리고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됐다. 충분히 이해는 된다. 너무 황당하실 테니까. 하지만 고쳐 맨 넥타이가 목을 점점 더 조여 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 궁금해했던 '오늘 이 만남의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방금 그의 어머님의 그 반응으로 완전히 선명해졌다. 오기 전에 준비했던 모든 말들이 무용지물이 됐다. 그리고 준비했던 그 말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봐 입을 앙 다물었다. 아니 피만 안 날 정도로 깨물었다. 고개가 더 숙여졌다.
사실 그동안 상제 핸드폰의 사진으로만 뵙다가, 실물은 처음이어서 나름 기대감도 있었고, 그가 어머님을 많이 닮았다는 소리에, 이번이 처음이지만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 같은 것도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보던 TV 주말연속극의 비련의 여주인공이 왜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울고만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아~ 내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왕 이렇게 말을 시작한 김에 내 용건부터 말할게요."
"...... 네, 어머ㄴ... 훕!"
"아아~악! 제발 그놈의 어머님 소리 좀 집어치워요. 소름 끼치니까!"
"......"
"우리 상제... 나 포기 못해요. 멀쩡하던 우리 애를 이렇게 만든 그 팀장인가 뭔가... 내가 그 괘씸한 놈을... 어휴~ 참. 하여튼 상제가 그 팀장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회사도 그만두고 집에 내려와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데... 애 아버지는 자식 없는 셈 치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 상제 포기 못해요. 겨우겨우 그 팀장이라는 놈을 떼어놨더니... 이번엔 뭐? 어휴~ 내가 참...! 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상제 정상으로 돌려놓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그만 물러나요. 알겠죠? 내가 원~ 입에 올리기도 남사스러워서... 하아~ 참!"
그의 어머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물을 들이켜셨다. 내 머릿속에는 다른 말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소름 끼친다'는 그 말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
"나~ 하나 물어나 봅시다. 그쪽 부모님은 우리 상제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네? 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시던가요?"
"네... 저희 어머니가 마지막 유언으로 온 가족에게 상제에 대해 신신당부하고 가셨습니다."
내가 상제에 대해, 그리고 현재 내 상태에 대해 처음 부모님께 고백했을 때도, 지금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 않은 난리가 났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