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cessary
어쩔 수 없어. 필연이지 뭐
병실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그의 아버님이 무서운 표정으로 복도로 나오셨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아버님은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키신 채, 병실 안에 있는 그와 그의 어머님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안돼! 이런 정신 나간 녀석아~! 머슴아 둘이서 무슨 살림을 차린다고 그라노? 아무리 네 엄마 부탁이라도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진 절대로 안될 말이다. 알았나?"
병원 복도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나와 그의 아버님에게로 쏠렸다. 금방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가 곧장 따라 나와 자기 아버지를 잡아끌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복도에 혼자 남겨진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경계하는 시선과 수군거림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두려움에 거기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된 나는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아버님의 살기 어린 눈빛, 병원 복도에의 낯선 사람들의 희번덕한 시선, 마지막으로 간호사 선생님들의 날카로운 수군거림이 나의 심장을 노리고 온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혼자서 아무리 다독이고 진정시켜도 생각처럼 순순히 달래 지지 않았다. 잠시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어! 주차장, 차에 왔어~"
"아~ 그래? 많이 놀랐지? 아버지가 갑자기 급발진하는 바람에... 동생, 그 자식까지..."
"아... 아니야... 형! 어머님은...? 어머님은 쫌 어떠셔?"
"어... 진통제 맞고 잠드셨어."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괜찮아? 내가 내려갈까? 엄마가 갑자기 너랑 내 얘기를 하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처음 듣는 얘기니까.., 많이 놀라서... 당황해서 그랬을 거야. 노인네들이 이해하기 쉬운 얘기는 아니잖아? 너무 상처받지 마~"
"아니야. 형. 나 신경 쓰지 말고 아버님이랑 잘 얘기해... 어머님도 잘 보살피고... 집에 가서 형 옷이랑 이것저것 좀 챙겨서 올게..."
"어! 알았어. 고마워 상제야~ 운전 조심하고..."
"응. 아니야 괜찮아. 그럼 끊어. 한 한 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을 거야. 그래, 끊어..."
나는 시동을 켜고,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내가 그의 어머님을 처음 뵀던 곳도 병실이었다. 그의 어머님은 간암으로 투병 중이셨다. 젊은 시절부터 드셔 온 술이 결국 말썽을 부렸다고 했다. 그날도 같이 있다가 그의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혼비백산한 그를 대신해 병원까지 운전을 하고 갔다. 그리고 얼떨결에 병실 문 앞까지 같이 가게 됐다. 하지만 문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그가 같이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편찮으신 어머님께 충격을 드리기 싫어서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렸다.
이 후로 그가 병원을 가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나는 그의 아버님도, 그의 동생도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와 같은 숙소에 사는 후배 지훈으로 소개되었다. 내가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 분들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어머님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가 간병해야 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갈아입을 옷, 속옷, 세면도구, 충전기, 보조배터리 등 생필품들을 챙겨다 주었다.
그날도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못한 그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서 입원실 앞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배터리가 다됐는지 음성사서함으로 연결이 됐다. 병실 밖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입원실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밖에 있죠? 들어와서 나 좀 잠깐 볼래요?"
나는 숨죽였다. 그리고 주저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병실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맞죠? 석원이..."
나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그의 어머님께 드리는 첫인사였다.
"어휴~ 키가 크네요? 목 아프니까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옆에 좀 앉아볼래요?"
"......"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님 옆에 앉았다.
"어휴~ 가까이서 보니까 얼굴도 하얗고 멀끔하니 잘생겼네요. 고마워요. 우리 석원이 잘 챙겨줘서..."
"아... 아닙니다."
"가만 사람 불러놓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야? 저기 냉장고 좀 열어봐요. 거기서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마셔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머님!"
"어떻게 됐든 그래도 가기 전에 어머님 소리는 듣고 가네요... 맞죠? 우리 석원이랑 앞날을 약속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깜짝 놀라 눈만 휘둥그레져 있었다.
"아무리 우리 모자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어도,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에요. 엄마는 자식 얼굴만 봐도 다 안답니다. 우리 애가 그쪽... 참 이름이 뭐예요?"
"여상제입니다. 어머님..."
"흐흐흐. 눈치도 없이 그래도 어머님 소리 자꾸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여... 상... 제... 이름이 특이하네요. 기억에 남아요. 좋은 이름이에요."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상제군 전화받고 나가서 쇼핑백에 이것저것 받아 들고 돌아오면, 표정이 그렇게 밝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
"나 가고 나면... 우리 애가 누구랑 의지하고 살지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든든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나도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거부당하고 배척당하지 않고,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눈물이 났다. 기쁨과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 주신 분이 곧 우리 곁을 떠나신다.
"내가 사는 동안 내 마음을 잘 컨트롤하지 못해서 우리 애를 많이 힘들게 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가는 날까지 힘들게 하고 있어요. 잘해준 건 하나도 없고 못해준 것만 있어서... 그게 너무 미안하고, 한이 돼요."
"흐흑..."
"나한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두 사람 축복도 해주고, 맛있는 거,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이고, 같이 쇼핑도 다니고 했을 텐데... 이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렇게 말로 밖에 못해주네요... 미안해요."
"흐흑... 아닙니다... 어머님... 이렇게 인정해 주신 것만도 너무... 너무... 진짜 감사드립니다. 흐흑..."
"아휴 내가 남의 귀한 집 아들을 이렇게 울리고 있네... 앞으로 여기 오면 밖에 있지 말고 나 혼자 있을 땐, 옆에 와서 말동무 좀 해주고 그래요. 나 오늘부터 숨겨둔 아들 한 명 더 생겼다고 생각해도 되죠?"
"네. 그럼요. 어머님. 제가 앞으로 형 없어도 자주 찾아뵐게요."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나는 어머님의 품에 안겼다. 내 등을 토닥여주시는 손은 깡마르고 힘도 없었지만, 내 몸의 핏줄을 따라 흐르는 어머님의 따뜻한 체온은 나를 관통하고도 남았다. 그 뒤로 나와 어머님의 비밀 데이트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