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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제10화

Can't do much about it

by 철없는박영감
어쩔 수 없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의 유일한 낙(樂)은 그와의 데이트였다. 그가 온다고 하면 거울 보는 시간이 평소의 배는 들었다. 그에게 좋은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싶고, 아프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통증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면 내 손을 꽉 붙잡으며 차라리 그냥 보내달라며 무너지기도 했지만, 그러다가도 흙탕물이 침전돼 맑아지는 것처럼, 한 번씩 몸과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늘 그를 찾았다. 새로 얻은 아들과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다며...


"상제야~"


"네"


"석원이랑... 안 싸우고 잘 지내지...?"


"그럼요. 형이 정말 잘해줘요."


"그래... 다행이다. 내가... 한평생 같이 사는 사람을 미워하고, 싸우며 살아보니까... 그거 다 부질없더라... 다 내 마음 같지 않고, 나만 힘들어... 그러니까 너는, 물론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알았지...?"


"네. 그럴게요."


"그런데 너희들 결혼식은 못하더라도... 혼인 신고 같은 것도 못하니?"


"아니에요. 결혼식도 할 수 있고, 혼인 신고도 할 수 있어요. 다만, 결혼식은... 형이나 저나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전부 끊을 각오를 먼저 해야 하고요. 혼인 신고는 구청에서 받아주기는 하는데... 나라에서 법적으로 공식 인정해주지 않는데요. 그냥 '기타 그 밖의 동거인'정도로, 룸메이트처럼 취급된데요."


"그럼 너희들은 가족이 될 수 없는 거야?"


"네. 그렇데요. 혼인으로 법적인 가족이 되는 것은 남녀 사이에만 가능하데요."


"에휴~ 그렇다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쩔래? 나도... 석원이 아니었으면 아마 애들 아버지랑 진작에 헤어졌을 거야... 자식이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정말 큰 몫을 차지하거든...?"


"그렇죠? 그래서 형이 항상 저 도망갈까 봐 걱정된데요... 흐흐흐"


"칠칠치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지가 잘하면 되지 무슨 걱정을, 왜 해...? 그 뭐냐... 저 어디 이민 같은 거 가서 결혼을 하고 오면 어떨까?"


"흐흐흐 어머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 잘 살게요. 아직 아버님께도 말씀도 못 드렸는데... 그게 먼저 순서일 것 같아요..."


"아휴~ 그래. 네가 나보다 낫구나... 그래 애들 아버지 설득부터 먼저 하자."


"괜히 사람들 불편하게 굳이 튀고 싶지 않고요... 저희가 알아서 잘 살 테니까, 어머님은 그냥 편히 계실 생각만 하세요. 아셨죠?"


가족의 시작과 형식


하지만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해서 겨우 잠들게 되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엄마의 눈에서는 총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고맙게도 진짜 있는 힘껏, 아들인 나보다 그런 엄마를 더 자주 만나러 왔다. 급한 일로 갑자기 자리를 비워야 해서 아버지나 동생에게 잠시 대타를 부탁해야 할 때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엄마 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병실 밖까지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혹시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엄마가 잠들어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


"왜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난... 애들 아버지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거든? 우리 때는 연애가 다 뭐야? 그저 집에서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중매로 다 결혼했지... 그래서 사랑이고 뭐고 없고, 그냥 살아남고 적응하기 바빴던 거 같아. 그런데 너희는 안 그렇잖아?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원하는 사람이랑 하는 시대가 됐잖아?"


"그렇죠. 저희한테는 당연한 건데. 어머님 때는 그랬다면서요...?"


"사실 내가...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고... 나도 좀 알아봤거든...? 그런데 저 어디 외국에서는... 너희 같은 사람들끼리 입양으로 부자결연을 맺어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부모 자식 관계로 엮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뭐니..."


"예... 예? 어머님, 진짜 많이 알아보셨네요..."


"요즘은 폰으로 안 되는 게 없잖니..."


"우리 어머님 기운 차리신 거 보니까 제가 다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래서 말인데... 법적인 부부관계도 될 수 없고, 부자관계는 말이 안 되고... 그다음으로 남는 게 형제지간 아니겠니...? 혹시 우리가 너를 입양하면 어떨까? 그렇게 형제애로 가족이 되면 어떨까?"


"...... 어머님...... 흑흑... 이렇게까지 저희 생각해 주신 거예요? 저 너무 기뻐요. 아무 편견 없이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데... 이런 고민까지 같이 해주시고... 가족으로 받아주시겠다는 마음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어후~ 어후~, 어머님 저 울리려고 작정하셨나 보다. 어후~ 어후."


그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는 듯 보였다. 입으로 거친 호흡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내가 너희 이렇게 놔두고 가면 한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어후~ 불쌍하고 가여운 것...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꼬...?"


"어후~ 어후. 아이고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머님... 말씀만으로도 앞으로 열심히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후~ 그런데 우리 진짜로 그렇게 하지는 말아요... 그게 어떨까요?"


"아니, 왜~!"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그는 울기 직전이었고, 많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 나서야 할 차례 같았다.


"저 왔어요... 어! 상제야~ 왜 울라그래? 어? 엄마! 엄마가 그랬어요? 왜 우리 착한 상제 울리고 그래요?"


"훌쩍... 아니! 형 그게 아니고... 어머님이 우리 생각해 주셔서..."


"그래? 너한테 한 소리 한 게 아니고? 맞아요? 엄마?"


"어이구, 저 팔푼이 자식... 그래 상제한테 내가 한 소리 했다. 어쩔래?"


"아~! 엄마. 상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차라리 나한테 뭐라고 하세요. 상제가 무슨 죄에요?"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뭐라고 한마디 좀 하자! 너 언제까지 상제 그냥 내버려 둘 거야? 상제 그냥 내버려 뒀다가 누가 채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상제 봐라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피부는 또 어쩌면 저렇게 하얗고 맑은지... 거기다가 머리도 좋고, 착하고! 그런데 너는? 이제 곧 다 늙은 아저씨인데... 아! 빨리 상제 니 사람으로 들이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에이~ 엄마. 우리가 뭐 꼭 뭘 증명하고, 증빙하고 그래야 하는 사이인가요? 우리한테는 그런 거 다 허례허식이라고요... 뭐 형식대로 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찾아보면 꼭 방법이 없는 건 아니더구먼... 꼭 결혼이 아니라도 가족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던데... 그러지 말고 한번 알아보고 빨리 진행해~"


"어이구~ 엄마. 내가 안 알아봤겠어요? 이미 다 알아봤죠...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 내가 상제를 아들로 입양하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것도 힘들어요... 일단 입양이라는 것이, 친양자입양은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에게나 가능하고... 성인이 가능한 일반입양은 친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나중에 우리들도 결혼할 수 있게 법이 바뀔지? 그러니까 엄마는 걱정 붙들어 메시고... 좋은 생각만 하세요~"


"아니, 그래도... 내가 얼마나 산다고... 우리 상제 내 아들 삼아서라도 우리 가족이 되는 걸 꼭 보고 가고 싶은데..."


"아이 참! 그러면 상제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니까요... 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안 돼요... 아셨죠? 상제도 엄마가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 행복하다잖아요..."


"에이... 나 참... 상제야... 네가 너희 부모님 하고 얘기해 보면 안 될까? 응?"


"......"


"아이~ 엄마도 참! 또 상제 곤란하게 만드네... 글쎄, 안된대도요. 그만하세요. 흐흐흐. 상제야 나 왔으니까 그만 돌아가봐... 너도 일해야 하잖아. 어서~"


나는 그를 얼른 떠나보냈다. 사실 엄마가 걱정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나도 항상 걱정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대로 우리가 언제까지 지낼 수 있을까? 언제까지 우리 둘만의 의지로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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