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t help but do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을 수 없더라
어머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지 3개월에 접어들던 어느 날, 그의 아버님이 병실 문을 세게 밀치고 열며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진 절대 안 된다며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던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밖으로 구름 한 점 없이 온통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컨디션이 훨씬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어머님이 앉아있었다. 늘 하던 대로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으며 창가 꽃병에서 시든 꽃을 뽑아 들고, 꽃병을 세척한 뒤에 새로 물을 받아 방금 사 온 싱그러운 꽃을 꽂았다. 그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마치 일기를 쓰듯이 시시콜콜한 내 이야기를 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가 뭔가를 결심한 듯 가족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과 결단력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뭔가 위태로운 상황임을 직감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자, 표정을 알아볼 수 없게 그녀는 창밖을 향해 돌아 누워있었다. 호스피스 병동의 창문 너머로 저녁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의 동생 내외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곧이어 그가 그의 아버님을 모시고 도착했다. 가족들이 모이자 어머님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 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하려고 하자,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으며 그냥 지금처럼 옆에 있으라고 했다. 병실에 자주 찾아왔기에... 그녀가 가물에 콩 나듯 몸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나를 찾았기에... 결정적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들이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마다 대타를 자청해 주는 고마운 그의 직장동료이자 지인이었기에, 그의 가족들은 위화감이 조금 들어도 그냥 덮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바라지 않은 뭔가를 예감한 듯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그리고 모두 와줘서 고마워. 내가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러달라고 했어."
그동안 피해 온, 나에게는 혼란스러운 일, 남들은 역겹다고 생각하는 일이 벌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깨부술 용기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런 생각이 떨리는 손으로 전달되었는지, 그녀는 한번 더 내 손을 더 꽉 쥐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 큰 아들 석원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동안 내 생각만 하느라, 내 아픔만 챙기느라, 우리 아들 힘든 거 외면하며 살아온 거... 우리 아들은 착한 아들일 거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짐만 지운 거...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야. 항상 내 안에 갇혀서, 내 기준으로 모두를 대했는데... 오늘 가만히 따뜻한 공기처럼 내 곁에 있어주는 상제를 보고 있으니까...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네가 얼마나 용기 있는지, 얼마나 사랑이 깊은지 나는 항상 자랑스러웠어. "
예감이 현실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의 가족들은 일제히 '상제? 상제가 누구야?'같은 표정이 되었다. 오직 그만이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그의 그런 표정은 그때 처음 봤다. 진실은 우리끼리 간직한 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비밀로 묻어두려 했는데... 결국 불안하고 불편한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순간임을 직시하고 이번에는 내가 어머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석원이에게는 여러분이 모르는 중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고요. 석원이는 이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해요. 저는 여러분이 이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랍니다."
병실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머님의 말을 곱씹었다. 어머님은 내 손을 다시 한번 꼭 쥐며,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제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너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여서 이해하고 지지해 주길 바란다."
어머님의 말을 들은 후, 방 안의 정적은 더 무거워졌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동생이, 말리는 자기 부인의 팔을 극구 뿌리치며 가장 먼저 이 무거운 정적을 깼다.
"엄마,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정신이세요? 여기 약이 이상한 거 아니야? 진통제 너무 많이 맞은 거 아니냐고~? 자기야~ 의사나 간호사 좀 불러봐~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하잖아~ 지금! 상제가 누군데? 지훈 씨! 말 좀 해봐요. 엄마가 왜 지훈 씨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거죠? 예?"
그의 동생이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나섰다
"이 자식이~ 그게 지금 편찮으신 엄마 앞에 두고 할 소리야? 그래 거짓말 좀 했다. 이 사람~ 우리 회사사람 '서지훈' 아니고, 나랑 같이 사는 '여상제'다. 인마~! 그게 그렇게 이해 못 할 일이냐? 어!"
"뭐? 형이야 말로 이게 엄마 아버지 앞에서 할 소리야? 이게 말이나 되냐고? 어!"
형제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되려고 했다. 두 사람 사이를 동생의 부인이 얼른 갈라놨다. 나도 일어나서 두 팔로 그를 뒤에서 꽉 붙잡고 말렸다. 그의 동생이 자신의 부인에게 이끌려 병실밖으로 나갔고,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버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이리 말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지훈... 아니 저... 그쪽도 좀 같이 나가있으세요~ 석원이 니는 좀 남아 있고..."
나는 놀란 어머님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그의 동생 내외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세상이 어찌 될라고 이래~'라고 외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아버님이 나를 노려봤다. 곧 그가 따라와 그의 아버지를 끌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지만, 나는 두려움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내가 두려움에 자리를 피한 사이, 무언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 같았지만, 무슨 이야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집에서 그의 물건들을 챙겨 병실에 돌아왔을 때는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는 분위기였고, 나중에 물어봐도 알려줄 것 같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 뒤로 어머님이 갑자기 의식불명에 빠지게 되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어머님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