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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제13화

What's done is done

by 철없는박영감
어쩔 수 없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야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의 데이트 상대는 이제 아버님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산책을 자주 다녔다. 아버님은 홀로 된 후, 급격히 노쇠해졌는데, 가끔씩 찾아뵈면 자주 허공을 응시했고, 그러다가 한숨짓는 일이 잦았다. 전화를 하면, 걱정 말라고는 하는데, 식사를 거르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았다. 뭐 드셨는지 물어보면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내 건강을 핑계로 같이 산책을 다니자고 제안했다.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 오후 4시에 집을 출발해서 왕복 1시간가량 아파트 단지 뒷산 산책로를 따라 걷고, 같이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어머님과 마찬가지로 아버님도 점점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초인종을 누르면 잠깐의 지체도 없이 바로 도어록이 풀렸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할 틈도 없이 이미 신발을 신고 나오며 문 앞에서 나를 제치고 앞장서 길을 나섰다.


그날도 뒷산 산책로의 야트막한 정상에 도착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하늘도 맑고 기온도 선선한데 주변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엔 우리 둘 뿐이었다. 숨을 고르며 고즈넉한 정자에 나란히 앉아 높고 푸른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듣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아버님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희들 엄마 가고 난 다음날 아침이 딱 이랬지..."


아버님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다음날 아침,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늘 일어나던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한 컵 마시는데, 갑자기 집안의 고요함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낮잠 자고 일어난 어린아이가 엄마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져 우는 심정이 이럴까? 갑자기 불안과 함께 낯선 공포가 밀려왔다고 했다. 그렇게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되더니 그제야 어머님의 빈자리가 실감이 나더라고 했다.


그 뒤로 예고도 없이 불쑥 가슴으로 밀고 들어온 감정이, 미우나 고우나 그동안의 인생을 함께 해온, 그리고 앞으로 계속 같이 갈 줄만 알았던 동반자가 없어졌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었다고 했다. 이 감정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어머님의 유언이 된 우리에 대한 당부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애들 엄마는 너 정말 사랑했데이. 내는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서도 이제는 이해한다데이. 누가 뭐래도 너도 우리 가족의 일원인기라. 석원이 인생의 동반자... 알긋나? 서로 의지하고 행복하게 살그레이~"


코끝이 찡해져 왔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아버님의 손을 꼭 잡고 계속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 인사는 네가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해주는 것을 정말 기뻐할 기다. 그 이가 기뻐하는 모습이 진짜 너무 보고 싶은데..."


아버님은 허공을 응시할 때마다 어머님과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늦어버린,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 사무쳐 한숨을 지었다고 했다. 그들의 관계는 '시대가 그랬다'는 핑계를 대더라도 사랑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고, 그런 부부사이에 어린애 마냥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집에도 소홀했고, 결국 바람도 피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한 꿈이었음을 어머님의 부재를 실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남자 하고 여자랑만 결혼해야 한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노? 마 죽어 뿌리면 그만인 것을... 아니제... 살아있어도 서로 쳐다도 안 보고 원수처럼 지내면 그게 무신 가족이고, 철천지 원수제... 그런 지옥이 따로 없는기라..."


아버님은 그 후, 매일 밤 어머님의 사진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했다.


"내 많이 잘못했데이... 느그 엄마한테 몹쓸 짓 많이 했데이... 잘해주지 못하고, 항상 외롭게 하고... 이제야 그게 을매나 큰 잘못인지..."


그동안 잔소리라며 무시했던 어머님의 말들이 가슴에 사무쳐 '내가 살아서 뭐 하나'라는 마음에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억지로 밥을 먹으려고 해도 늘 게걸스럽게 먹는다며 못마땅해하던 어머님의 잔소리가 떠올라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려고 하는데 돌돌 말려 나온 양말을 보고는 늘 양말 제대로 안 벗어놓는다고 타박했던 어머님이 떠올라 '이기 뭐라꼬... 이기 뭐 을매나 힘든 일이라꼬... 그거 하나 제대로 몬해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헤어지면 다 소용없데이... 죽어뿌리고 나믄 무신 소용이고...? 알긋나! 그러니까 잘 살그레이... 내가 우리 둘째는 잘 타일러 놓을 테니까 이번 느그 엄마 기일에는 다 같이 가족사진도 다시 찍제이~ 응?"


용서할 수밖에 없는 실수


어머님의 장례식이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동생이 술에 잔뜩 위해 내 옆으로 왔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머님의 유언 때문에, 그리고 아버님의 설득 때문에 자신도 힘들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술잔을 건넸다. 도원결의처럼 피라도 타서 마시자고 했다. 그와 동생의 부인이 말려봤지만 이미 술이 잔뜩 취한 상태라서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러브샷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하려고 했는데... 그의 동생이 술기운 때문인지 이런 말을 해버렸다.


"근데, 형수님이에요? 매형이에요? 응? 뭐라고 불러야 돼? 딸꾹"


"아니, 이이가 미쳤나 봐~ 죄송해요 아주버님... 그리고, 아휴 죄송해요... 저... 저... 저기..."


"아 그냥 상제라고 불러주세요. 아직은... 저도... 잘... 그게..."


"아 네 상제씨. 미안해요 이 사람이 술이 많이 취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내일이면 기억도 못할걸요? 정말 죄송해요. 아휴~ 그만 좀 하고 일어나 봐~ 쪼옴~! 아후 내가 미쳐 정말... 어쩌려고 술을 이렇게......"


그의 표정이 심각했지만, 나는 얼른 그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저으며 그냥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상제는 무신 상제, 도련님이라고 불러라. 상제 내 아들로 삼을끼다. 알긋나!"


그의 제수씨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예?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아니... 아니... 이건... 이건 아니죠 아버님...!"


"뭐가 아이고?"


"아니 어머님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중대사를... 그렇게 독단적으로..."


"아가...! 니 유산 적어질까 봐 그러나? 맞제? 그기때문시 그라제?"


"아니요. 아버님. 그런 게 아니고...... 아니 막말로 아버님! 저희는 애들이 둘이나 되는데... 손주들도 생각해 주셔야죠... 안 그래요?"


그 말에 아버님이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어머님 첫 번째 기일까지 일 년 동안 고민해 보고 그때 다 같이 모여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있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살게는 해줘야지 않겠나?


"둘째네 말도 일리는 있는기라... 안글나? 둘이서 뼈 빠지게 벌어도, 아~들 둘 키울라믄 돈 마이 들지 않긋나? 가들도 살게는 해줘야지 않겠나 싶더라..."


"맞아요. 아버님. 저는 저희 인정해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살게 해 주신걸요. 그냥 마음으로만 받아주셔도 저 원망 안 해요. 그냥 아버님 마음 편한 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형이랑도 다 이야기했어요. 어차피 저희는 자식도 없을 거고... 둘만 이기적으로 행복하게 살 거라서... 그런 욕심 없어요. 아버님 말씀이 다 옳아요."


"이해해 줘서 고맙데이... 이리 착한 아를 내가 왜 그리 몬 잡아 무가~ 아휴~ 기특한 것! 그래도 큰 일 생기믄 니가 석원이 챙겨야 하니, 너거 둘이 양자결연인가... 그거 맺으레이... 내가 다 싸인해줄끼구마..."


"네... 네... 아버님 감사해요. 형이랑 의논해서 그렇게 할게요. 그건 그거고 아버님 가족사진 진짜 멋진 생각인데요... 전 그런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감동입니다."


"글나! 마음에 들제? 글제?"


"네 아주 마음에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래... 이제 그만 내려가자~! 국밥 묵으러 가제이~!"


"네~"


알긋나!


지금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아버님도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머님을 따라가셨고, 동생 내외는 괜찮다고 하는데도 뭐가 그러게 미안한지 계속 우리를 피했다. 전화통화만 자주 했다. 명절에는 각자 집마다 할 것 하고, 어머님, 아버님 기일에만 추모공원에 모였다가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정도의 왕래를 하고 있다.


음... 양자결연은 어떻게 됐냐고? 우리 집에 대한 그의 노력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매번 내가 미안할 정도로 구박을 받고 돌아오는 것 같은데, 그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다 됐다고 할 때, 그때 같이 가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중이다. 나도 그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에 지금 어떤 심정인지 잘 안다. 그래서 그냥 놔두기는 하는데... 사실 속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분들은 친자식인 나도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니까...


아버님은 돌아가시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인생이라는 게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더구나.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야 한다. 알긋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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