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 será, será
어쩔 수 없어. 걱정하지 마. 될 대로 돼라지
하루 종일 그 남자 생각에 일도 제대로 손에 안 잡히고 실수만 연발했다. 좀 행복해지겠다는데 왜 안되냐고 울면서 따져 묻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팀장에게 불려 가 꾸중을 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그 생각에 빠져있었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니 꾸중이 꾸중같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남자 생각이 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애꿎은 흡연량만 늘어갈 뿐이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거지만, 그땐 그 남자 생각이 나에게는 휴식이었고, 오락이었고, 취미였고, 힐링이었으며 결국엔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었다. 도파민을 충전해 주는... 행복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남자는 매번 다른 얼굴로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하루는 아버지의 얼굴로, 하루는 동생의 얼굴로, 하루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얼굴로, 하루는 회사 후배 지훈의 얼굴로, 결국엔 내 얼굴로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엔 다시 만나고 싶어서 퇴근 후에 그날 그 연탄구이집에 여러 달 출근도장을 찍기도 했다. 그날도 퇴근 시간이 다가오며 후배 지훈에게 같이 가자고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슬슬 내 눈을 피했다. 결국 문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콜?」
「과장님, 오늘은 좀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ㅜㅠ」
'내가 자기 솔로인 거 다 아는데, 주제에 선약은 무슨?'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라는 문자를 보내고 궁리를 했다.
'만약 오늘 안 갔는데... 그 남자가 오면 어떡하지? 아! 그럼 안되는데... 그냥 혼자라도 가? 그런데 고깃집에 혼자 가면 받아주나? 아무리 단골이라지만 이 황금시간대에 혼자 가서 죽치고 있는 건 민폐지... 암... 그렇고 말고... 사장님한테 부탁을 좀 해? 아~ 둘이 무슨 사이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아니 애초에 인상착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냥 좀 암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흰 얼굴의 남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 망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패스! '인연이라면 어디선가 만나지겠지...' 기숙사에 돌아오니 지훈은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부장님은 오늘도 방에 틀어박혀 TV 보면서 혼술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듯했다. 아랫집에서 흡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지난번에 어렴풋이 보이기로, 그 방엔 담배꽁초로 만들어진 선인장이 있었다. 그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매일 마시던 술을 안 마시고 방안에 가만히 있자니 그 남자 생각이 더 났다.
'아~ 방금 전에 한 대 피우고 왔는데, 어쩔 수 없다. 될 대로 되라지...'
다시 담뱃갑과 휴대용 재떨이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가 싶더니, 이 늦은 시간에 택배라도 왔는지, 아니면 전단지라고 돌리는지 모든 층마다 서며 시간을 지체시켰다.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선택했다. 그리고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그때, 전에 만났던 아랫집 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엄청나게 반가운 얼굴로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그녀 뒤로 검은 그림자가 하나 쫓아오고 있었는데... 어! 바로 그 남자다!
오매불망 쫓던 그 모습인데... 사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다. 지금 당장 내 앞에,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인 그녀를 제쳐두고 생판 남인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운동이라도 하고 있는지 숨을 조금 헐떡이고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랬는데... 순식간에 그의 그림자가 2층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아랫집 여자와의 대화를 멈출 수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집으로 그녀를 돌려보내면 부장님이 방 안에서 내뿜은 담배냄새가 또 나고 있을 거라서... 그냥 이대로 집으로 들여보낼 수도 없었다. 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덕분에 아랫집 여자와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될 정도로 친해졌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그가 치한으로 오해받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했다.
'어쩌면 2층에 그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기숙사 밖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나의 시선은 2층을 향했다. 새로운 휴식이자, 오락이자, 취미이자, 힐링이며, 삶의 일부가 생겼다. 그리고 드디어 발견했다. 204호 베란다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생수를 거기에 쌓아놨는지 베란다에 나올 때마다 작은 생수병을 집어 들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잠깐 밖을 보는가 싶더니 이내 집안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내가 담배를 피우는 곳은 그의 시야 밖이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는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땐 참 행복했다.
하루는 자다가 일어났는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채 나온 적도 있었고, 하루는 집밖으로 며칠간 안 나갔는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 나타나기도 했다. 가끔씩 방금 씻고 나왔는지, 상의를 탈의한 채 나오기도 했는데... 그럴 땐,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당황해하며, X걸프렌드와 연애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참나~ 이 나이에 이게 뭔 19금 영화 보다가 들킨 청소년 같은 시추에이션인지...'
하지만 2층 베란다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그 어떤 영화나 TV드라마보다 재밌었고, 감동적이었으며, 애처롭고, 애달팠다. 그의 모습이 눈으로 확인되자 내 영혼이 충만해졌다. 그리고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피곤할 줄 모르게 됐고, 누가 욕을 해도 웃는 얼굴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성과도 점점 좋아져 어느새 회사 내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나타났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가 성장하며 그동안 엑셀로 작업하던 업무들을 앞으로 ERP를 도입해서 처리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그래서 U/I 시스템 개발을 위해 우리 부서로 컨설팅 업체가 들어왔는데, 구성원으로 '내 삶의 일부'가 강림하셨다. 지금도 기억난다.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 헐렁한 검정 후드티에, 검은색 청바지와 운동화... 온통 새카맣게 도배된 그가 우리 팀 문을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후광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과장님! 과장님! 과장님!"
"어! 어... 어! 지훈 씨... 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여기요. 오늘부터 시스템 개발해 주실 분들이요... 앞으로 당분간 협업할 일이 많을 거라고 업무 시작 전에 인사하러 오셨네요..."
"아~ 그래? 그렇구나~ 그분들이구나... 지훈 씨 탕비실 가서 음료수 좀 챙겨드려!"
"아이고~ 왜 이러실까? 우선 팀장님 인사부터 드리고 나서요. 팀장님 인사 끝나는 대로 회의실에서 사전 미팅 있으니까 자리 비우시면 안 돼요?"
"암... 암... 내가 어디 자리를 비워. 자리 꼭 지키고 있을게. 앞으로 계속 그럴 예정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저리 얼굴 좀 치우고..."
"칫! 왜 이러셔? 뭐 걸그룹이라도 왔어요? 표정 봐라 표정 봐~ 사람들이 생각보다 젊긴 하네요. 그런데 역시나 프로그래머라 그런지... 그 코딩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뭔가 좀 우중충한 분위기이긴 하네요. 특히 저 올블랙 저 사람... 난 테러리스트인 줄...!"
"뭔 소리야? 코로나 시국에 저렇게 잘 가리고 다녀야지... 지훈 씨야 말로 그 마스크 좀 쓰고 다녀... 우리끼리 있을 땐 모르지만, 외부 사람들 눈엔 방역수칙 제대로 안 지키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
"에이~ 알았어요... 뭐! 과장님 오늘따라 우리 편 아니고 남편 같네요? 변했어... 사람이 어떻게 변해?"
"아! 깜짝이야. 사랑이 어떻게 변해라고 하는 줄 알았네..."
회의실에서 어색하게 마주 앉아 팀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시선은 당연히 그 사람에게 꽂혀있었다. 저 마스크와 헐렁한 옷 안의 실체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내 삶의 일부'가 바로 내 앞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그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에 감개가 무량했다.
잠시 후 양쪽 팀장님들이 같이 들어오시고, 상견례가 시작됐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벗을 수 없으니 방문업체에서는 PPT에 담당자들 사진과 연락처, 담당업무를 넣어서 장표를 꾸며오셨다.
'여상제... 아~ 이름이 여상제구나... 사진... 와~! 저 파일 꼭 좀 달라고 해야겠다.'
상대방 소개가 다 끝나고, 우리 팀장님이 또 혼자 유재석인척, 미팅 주선자인척 진행을 시작했다.
"아~ 우리도 뭔가 소개를 해야 하는데... 그쪽처럼 준비한 것은 없고... 이것 참! 죄송합니다. 갑자기 오셔서 저희가 미처 준비를 못했네요. 그래도 이렇게 준비성이 좋은 분들이 오셨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하네요. 저희는... 어디 보자... 그럼 이렇게 하죠~! 마스크도 못 내리고, 악수도 할 수 없으니, 각자 명함 돌리고, 간단하게 인사할 때만 마스크 내려서 얼굴 보여드리고, 차차 일하면서 친해지기로 하면 어떨까요?"
"네 그렇게 하시죠. 저희가 갑자기 찾아봬서 도리어 죄송합니다. 차차 일하면서 친해면되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럼 공 과장이 앞으로 업체분들과 창구역할 해주시고... 지훈 씨는 공 과장 서포트 해주시고... 그럼 교통정리 다 끝났죠? 난 또 다른 회의가 있어서..."
다행히 팀장은 시스템 쪽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하긴 엑셀로 자료 조작하던 사람인데... 갑자기 ERP 쓴다고 하면 이제 조작을 못할 테니... 앞날이 암담하긴 했을 거다. 팀장은 그렇게 자기 생색낼 거 다 내고 바로 퇴장했다. 그리고 기대하고 고대하던 명함교환을 시작했다.
"여상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이름이 여상제구나... 여상제... 여상제... 여상제! 옥황상제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저의 하늘에는 다른 분을 앉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여상제님으로요...'
그가 직접 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건네준 명함...! 앞으로 나의 보물 1호가 될 그 명함...! 황토색 재생지에 정갈하게 이름과 연락처만 적혀있는 심플한 명함...! 마치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전화번호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그 명함...! 나는 명함을 사랑하게 됐다.
"공석원입니다. 직책은 과장이고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말하려다 보니, 마스크에 막혀 안 들렸는지... 그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는지...
"예? 죄송하지만, 잘 못 들었습니다? 공..."
"아~ 예... 마스크 때문에... 그만... 공! 석! 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네... 제가 귀가 안 좋아서 잘 못 들은 겁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네요. 앞으로 통화 많이 해야 될 텐데... 그 시간이 참 기다려질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좋은 목소리로 막혔던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실 것 같아요."
"......"
심장이 뚝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립서비스였겠지만... 지금 그에게 그때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물어보면,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과장님? 과장님? 공 과장님? 공석원 과장님?"
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내 이름... 그때까지 나는 내 이름이 너무 싫었는데... 그랬는데...
"아... 예... 예... 아니 갑자기 이런 멘트를... 저 심쿵했는데... 그러면 이상해지는 건가요? 하하하"
"하하하 과장님 재밌으시네요. 앞으로 잘 통할 것 같은 좋은 예감... 너무 좋은데요... 젊어 보이시는 데, 혹시 나이가?"
"예? 나이요? 나이? 서... 서... 서른아홉이요. 예 서른아홉 맞아요!"
"아~"
그의 반응이 갑자기 시큰둥해졌다.
"상제... 씨? 상제 씨라고 불러도 되죠? 상제씨는 나이가...?"
"저는 서른 하나요. 93년 생, 닭띠요"
그 남자와 나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도 내가 나이를 줄였다는 것을 말하는 뉘앙스에서 눈치챈 것 같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네요... 흐... 흐흐흐..."
울고 싶었다. 그에게 난 어떻게 보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