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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마지막화

C'est la vie!

by 철없는박영감
어쩔 수 없어. 그게 인생이라고!


곧 이혼하게 될 것 같다는 팀장님의 고백은 내 주변에 솟아오른 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는 나를 혐오하지 않았다. 싫어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신뢰한다고 말해주었다. 나조차도 포기하고 있던 나인데, 놓지 않고 버텨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어진 '준비가 안 됐다'는 패자 부활전 초청장 같았던 말은, 헛된 희망일지라도 다시 한번 환희를 터트릴 수 있는 마음속 작은 불씨에 도화선을 이어 붙여줬다. 그렇게 벽을 허물자 그는 빛으로 다가왔다. 그는 태양이었다. 한동안 가려진 벽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나는 그때부터 다시 따뜻해질 수 있었다.


팀장님이라는 태양이 뜬 하늘 아래에서 살고 싶었다. 그는 나에게 신앙이었고, 세상이었고,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강렬한 만큼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초신성 같았달까? 대표라고 불리는 사람의 방에서 한참을 있다가 나온 날, 팀장님이 증발하듯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찰나에 사그라져버린 빛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억하는, 아니 기억하려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긴 수풀처럼 서로를 붙잡고 엉켜있는 사람들의 소음을 빠져나와 옥상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걱정 말라고... 맡겨 준 임무는 마지막까지 충실히 마무리하고... 그리고 다시 찾아가겠다고... 그 후로 나는 겉으로는 냉랭한 척했지만 속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프로젝트! 진짜 몸을 갈아 넣어가며 팀장님이 맡긴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완성 후 1년간의 유지보수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정말 열과 성의를 다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거래처에서 OK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대표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사의를 표명했다. 대표라고 불리는 사람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애먼 소리를 에둘러하는 모양새가, 진짜 의도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낙하산이었다. 덕분에 인수인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소문은 이보다 빨라서 집으로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호출이 있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KTX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해서 바로 부모님에게 지금의 내 상태가 어떤지, 진실이 뭔지 밝혔다. 무릎은 꿇지 않았다.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죄가 없었다. 태어나서 아버지의 손찌검을 처음으로 받아봤다. 뭐 이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앞으로 도움 같은 거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유산 같은 건 당연히 없고, 그렇게 마음대로 제 멋대로 살고 싶으면 부자의 인연을 끊고 가서 살라고 했다. 자식 없는 셈 치면 된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딱 일주일을 고민했다. 그를 안 보고 살 수 있는가를... 이번엔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불효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엄마는 붙잡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떠났다. 그리고 예전에 와봤던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찾았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전셋집이 가능했다. 정말 운 좋게, 그가 살고 있는 105동 303호의 앞집 105동 304호와 그 아랫집 204호가 매물로 나와있었다. 다만 204호는 당장 입주가 가능했고, 304호는 현 세입자가 나가는 석 달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당장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04호를 계약했다. 그리고 갑자기 집 앞에서 마주치는 것도 많이 어색할 것 같았다.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그는 잘 보이지 않았다. 거의 집 밖 출입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왠지 스토커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 달 이상 지난 시점에서 그의 모습이 어떤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일거리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마지막 프로젝트에서 좋게 보였던 거래처 담당자를 통해 건너 건너 일거리가 들어왔다. 사실 이 바닥이 워낙 좁은 터라 프리랜서였지만 조금만 건너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퇴사한 전 직장의 구인은 철저히 걸렀다. 그러다 보니 일감의 대부분이 대기업에서 자사 직원들에게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발주된 일들이었다. 덕분에 크게 돈 떼이는 일 없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프리랜서는 성실은 기본이고 실력이 없으면 바로 도태되는 사회였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자신의 성실과 실력을 확인시킬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엔 역시 모든 것이 인맥이었다. 나는 마지막 프로젝트의 인연 덕분에 나날이 평판도 좋아지고 일감도 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해내기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회사를 차려 직원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다가갈 구실 찾기가 진짜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사 온 뒤 첫 만남에서 어색했던 분위기 때문에 그동안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오랜만에 그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좀 도와달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그는 문자로 쓰기 너무 길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자신은 퇴사를 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동종업계로 재취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참 고지식하기도 하지 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만 납품을 할 테니 어시스트만 좀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정말 잠잘 시간도 없이 일만 해도 다 못할 정도의 양이었다. 그가 내 사정을 듣더니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정말 이번 한 번 만이라며 OK를 했다. 하지만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같이 다니게 되었다.


참 행복했다. 내가 일감을 따오면 그와 같이 회의를 하며 콘셉트를 잡고, 안을 도출했다. 그리고 발주업체와 상담을 통해 일을 진행했다. 역시나 이쪽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그는 노하우가 남달랐다. 업체들은 대부분 그가 도출한 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전처가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의 어머님, 그러니까 장모였던 사람과 같이 살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필드에서 오래 떨어져 있었더니 트렌드에 뒤쳐진 것 같아서, 즉 감이 떨어져서 이젠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급매물로 나온 마트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다 그 여자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주저앉히기만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님이라며 나타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대로 주저앉힐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그의 주변을 관찰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이혼을 했다던 그의 전처는 그가 모르게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만나는 남자가 여럿 있는 것 같았는데, 사생활이 매우 문란해 보였다. 특히 스폰서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304호의 그 늙다리를 찾는 일이 잦았다. 나는 304호가 미웠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님이라는... 장모라는... 저분!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는 했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 동 청소를 하던 그분... 아닌가? 혹시 사기꾼 아니야? 나는 그를 되찾기 위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정말 제대로 그의 세계에서 밀려 나왔다. 신앙이었던 그에게 불경을 저지르고, 세상이었던 그를 등지고, '그'라는 목적을 잃은 대가는 컸다. 나는 칩거했다.


그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일은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혼자는 역시 무리였다. 큰 프로젝트에서는 계속 밀려났다. 나도 정신없이 일만 해서 그를 잊기보다는 제대로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시간 여유가 많은 자잘한 일들을 긁어모아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스타일이라는 것이 생겼고, 경험이 쌓였다. 그러다가 일을 하며 알게 된 Crew를 통해 객원 멤버로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촉발된 불황의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제법 큰 회사에서 ERP를 도입하게 되면서 실무자들이 사용할 U/I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는 첫 단계로 이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사전 미팅이 있는 날, 머리도 자르고, 면도도 했다.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을까 하다가, 왠지 객원멤버 따위가 너무 튀어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최대한 묻힐 수 있게 평소에 입던 대로 하지만 최대한 단정하게 코디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명함을 교환하며 잠깐 얘기해 본 바로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공석원' 나이는 83년 생, 한국 나이로 마흔 하나. 그런데 주저하며 서른아홉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생일이 아직 안 지났나 보다.


사실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나보다 한두 살...? 많아도 네다섯 살 정도 많은 형으로 생각했는데, 무려 십 년이나 차이나는 아저씨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마도 군인이었겠지? 도대체 어떤 관리를 어떻게 하면 저럴 수가 있지? 놀라웠다. 특히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친근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얼어붙은 내 마음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다음으로 그 사람에게 눈길이 간 것은, 무해할 것 같은 마른 건초 냄새였다. 설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설렘... 오랜만에 사회생활을 하는 긴장감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꼭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운명 같은 예감이 들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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