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t's just the way it is
어쩔 수 없죠. 원래 그런 걸 뭐 어쩌겠어요
은영 누나집에 다녀온 뒤로 계속 이 상태다. 누가 봐도 입이 댓 발 나온 게 삐진 게 맞는데, 자기는 절대 그런 게 아니란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떡국 잘 먹고, 윷놀이도 잘하고, 은영 누나네 조카랑 신나게 장난감까지 잘 가지고 놀다 와서는 저런다. 뭐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도 저러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 커피를 따르면서 거실 소파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입술을 앙 다문 채, 볼을 한껏 부풀리고 있는 그를 향해 다시 도발해 본다.
"설연휴 끝나면 당분간 새로운 일거리 때문에 형이랑 같이 못 있는다. 이번엔 따로 작업공간도 마련해 놓고 거기서 실시간으로 처리해 달라고 하니까... 아마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 4층으로 돌아가셔서 거기에 정 붙이고 사세요? 알긋나?"
"아휴~ 뭐 내가 그러면 무서워할까 봐? 이번엔 그런 거 아니거든?"
슬쩍 커피를 건네봤지만, 그는 팽하고 돌아앉아버린다. 손이 머쓱해졌지만 그냥 탁자에 컵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일부러 탁자를 사이에 놓고 마주하고 대치하는 형국으로 앉는다.
"거봐~ 삐진 거 맞네..."
그의 얼굴 표정이 한번 크게 바뀌더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된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아후~ 벌써 몇 년이야? 작년 추석에는 은영누나네 집에서 팀장님과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눈빛 교환을 했다가 아직도 마음이 남아있는 거냐며 거의 한 달을 삐진 적이 있었다. 거의 이사 갈뻔했었다. 그래서 이번엔 일부러 의식하고 팀장님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더니, 오히려 더 의식하는 모양새였는지 집에 오자마자 이 상태다.
"우와~ 이번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업체라서 젊은 직원들도 많다던데, 당분간은 대화가 좀 통하는 사람들이랑 일하게 돼서 늦게까지 일해도 하나도 안 힘들 것 같다. 아후~ 이번엔 나도 젊음의 에너지 좀 충전하고 와야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큰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꼴깍 한 모금을 마시고, '앗 뜨거워 뜨거워' 너무 뜨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날름 거리며 그를 더 골탕 먹인다.
"뭐~? 어디...! 어디로 다니는데...? 어?"
"아니~ 그 형네 회사 다녔던 지훈 씨 있잖아?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연락이 왔어... 자기네 회사 와서 시스템 개발 좀 해달라고... 자기 사업 차린 모양이던데?"
"아씨~ 또 그놈이야? 너 내가 그놈이랑 연락하지 말랬지? 너 진짜..."
"왜~ 일감 준다는데...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일하면 언제 부자 되냐?"
"아니 그래도 그놈은... 그놈은... 안 돼! 절대 안 돼!"
"왜 지훈 씨 일도 깔끔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그만한 클라이언트가 어디 있는 줄 알아? 페이도 잘 쳐주던데?"
"안돼! 하여튼 그놈은 절대 안 돼! 걔 회사 나가고 나서도 내 주변사람들한테 이상한 제안 많이 해서 사기꾼 소리 듣는단 말이야."
"이미 계약서 검토 끝났고, 특별히 이상한 점도 없고, 일해주고 돈만 받으면 되지 뭐~ 그래도 떼먹는 종자는 아니잖아? 나도 내 또래들이랑 일 좀 해보자. 만날 늙다리 아저씨만 상대하려니까 머리가 삭는다 삭어."
"아씨~ 너 진짜... 진짜..."
"연휴 끝나고, 계약서 사인하면 바로 출근이니까~ 차 떠났네요. 공석원 씨~"
이 말에 그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분을 못 삼키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을 나가버린다. '어어어...! 여태껏 이렇게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너무 심했나?'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흐르자 나도 많이 당황하고 만다. 얼른 따라가려 했지만, 지금 차림새가 너무 자유로워서 일단 전화를 한다. 하지만 통화 중... 통화 중... 통화 중... '에이~ 설마 진짜 지훈 씨한테 전화까지 하겠어?' 하지만 설마는 사람을 충분히 잡아먹고도 남는다.
잠시 후, 문자가 한통 온다. 서지훈에게서 온 문자다. 문자 내용은 전에 내가 경쟁업체에서 일했던 이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는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력서 내용을 꼼꼼히 살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어 있다. 그의 짓인 게 뻔하다.
'아놔 진짜 이 양반이 일을 크게 만드네...'
비밀유지 서약서 하나면 그냥 지나갈 일을... 동시 진행이면 모를까... 그것도 몇 년 전에 했던 이력을 가지고... '아니 뭔데? 자기가 뭔데 내 앞길을 막는데?' 갑자기 열이 뻗친다. 그리고 내가 제일 화났을 때 하는 안 좋은 행동, 말 안 하고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하기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나도 이게 안 좋은 버릇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화가 나면 뇌가 정지되는 이 몸뚱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의 억울함을 피력하는데 침묵시위만 한 게 없었다. 뭐 쫌생이 같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지훈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마찬가지로 계속 연결이 닿지 않는다. '차단이라도 한 거야 뭐야?' 서지훈과의 계약은 이대로 물 건너간 것 같다. 올라가서 '당신이 뭔데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훼방 놓고 난리야?'라고 따질까? 아니다. 이러다 결국 나만 흥분해서 어버버 하며 억울함에 울음만 터트리고 그러면 그가 달래주며 흐지부지 넘어갔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번엔 진짜 제대로 침묵시위를 해주겠어. 당신 제대로 선 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겠어.'
일단 현관문 비번을 바꾼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찍혀있어서 금방 콜백이 올 테니 전원도 꺼버린다. '흥 당신 사람 잘못 봤어...! 절대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마음의 앙금을 아주 제대로 굳힌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뭔가 밖에서 소란이 좀 일어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다. '내가 너무 제대로 차단했나?' 거실로 나와서 살짝 문밖의 기척을 확인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인터폰으로 밖을 봐도 캄캄하기만 하다. 도어록 비번 바뀌어있고, 전화기 꺼져있으면 내려와서 문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할 텐데... 이번엔 전혀 깜깜무소식이다. '뭐지? 무슨 일이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서 전화기를 다시 킨다. 부재중도 없고, 문자도, 카톡도 없다. '어! 진짜 무슨 일이지?' 도어록 비밀번호도 제자리로 돌려놓고 기다리다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찾아 나서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띠띠띠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옷 갈아입다가 말고, 얼른 소파로 달려 나와 쿠션을 껴안고 얼굴에 무뚝뚝함을 이식한다. 그리고 철컹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툭 말을 던진다.
"어~ 왔어?"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는 쭈뼛거린다. 속으로는 '부재중 전화 뜬 거 못 봤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최대한 쿨한 척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린다.
"저기~"
"응, 왜?"
"저기~ 내가 사고 쳤어."
"......"
"내가 지훈이한테 전화했어."
"......"
"그래서 너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안 그러면 회사에서 정보 빼내려고 회사사람들한테 이상한 제안했던 거 다 신고해 버릴 거라고 협박도 했어..."
"왜~? 왜 그랬어?"
"아니 그게... 지훈이 이 자식... 안 좋은 소문이 진짜 많이 돌거든... 사기도 사기인데...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닌다 그러고... 주위에서 걔한테 돈 떼였다고 그러고... 친구, 지인 할 거 없이 다 그런다잖아. 그래서 걱정이 돼서. 너한테 상의도 없이 그냥 저질러 버렸어. 미안해. 상제야."
화를 낼 수가 없다.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뭐 프리랜서 일이라고 해봐야 돈 떼여봤자 큰돈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쉽게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좀 심각한 수준이다 싶다. 하지만 나 몰래 자기가 독선적으로 내 일에 참견하다 못해, 결정까지 내버린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아무리 동반자이고, 파트너라지만 지켜야 될 선이 있는 것이다. 지금 그 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이상하게 이럴 땐 차분해진다.
"그래? 그 정도였어? 나 걱정해 준 건 고마워. 그런데..."
"알아! 알아 상제야. 내가 잘못한 거... 이건 내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나한테도 나름 긴급상황이었거든.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나한테 너무 힘든 일이거든. 그렇지만 어쨌든 네 일에 허락도 없이 끼어든 건 정말 미안해. 앞으로 아무리 긴급하더라도 꼭 먼저 상의하고 행동할게. 미안해."
그는 내가 할 말을 모두 해버린다. 정말로 화를 낼 수 없다.
"알았어. 진짜 반성하는 거 같으니까 이번엔 넘어가자. 대신 또 이러면 나 정말 도망가버린다."
"제발 상제야 도망간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제발~! 흑흑... 나 진짜 불안하단 말이야... 너 도망갈까 봐... 사실 네가 늙다리 아저씨랑 그만 상대하고 싶다는 말에... 또래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말에... 내가 너무 불안해서 급발진해버린 건지도 몰라. 그러니까 제발~ 도망.... 윽!"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꼭 안는다.
"아이고~! 이 아저씨야~! 아니, 형님아~! 내가 진짜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당신 진짜 꽁생원이구나? 나도 형 없으면 못살아... 내가 어떻게 형이랑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형 못 놓쳐, 아니 안 놔줄 거야... 내 곁에서 못 벗어난다고요, 공석원 씨~!"
"아흑, 아흑, 알았어! 상제야. 알았어. 숨 막혀 그만! 아흑~ 나 숨이 안 쉬어져 상제야... 제발! 덩치도 큰 녀석이 이렇게 위에서 눌러버리면 나 죽어! 상제야! 제발, 제발~! 컥컥"
나는 그를 꼭 안은채, 살짝 팔에 힘을 푼다. 그리고 한 가지 그동안 불안해서 말 못해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흐흐흐, 사실 형보다 내가 더 불안한 거 알아? 난 짝사랑만 여러 번 해봤지, 사실 모태솔로잖아. 그건 형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형은 연애도 많이 해봤고, 특히 여자도 만나 봤잖아. 그러니까 언제든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 거잖아? 형이 나중에 나한테서 정 떨어져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할까 봐,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모르지?"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네가 나의 처음이라고 맹세할 순 없지만, 마지막이라고는 할 수 있어. 정말이야~!"
"그래, 그래. 맞다고 하자! 어휴 고마워 형~! 나 많이 걱정해 주고, 생각해 줘서... 그런데 우리 정말 어쩌냐? 서로 불안해해서... 우리 어쩌냐~ 정말~!"
"그러게... 우리 어쩌냐~ 정말~!"
지금 우리의 가슴은 서로 맞닿아 있다.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