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열로 기름기 쏙 빼자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 조절을 한다. 아침은 사과, 오이, 닭 가슴살. 저녁은 야채샐러드와 통곡물 식빵을 먹는다. 점심만 자유식을 먹는데, 가능한 요리수가 적고, 그나마도 대부분 라면으로 때울 것 같아서 배달 앱을 많이 이용한다. 처음에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메뉴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 달 지나고 보니 식당 수만 많고 메뉴는 비슷비슷했다. 그리고 1인분 배달이 안 되는 곳이 많고 가성비가 떨어져 2인분 이상을 시켜 조금씩 나눠 먹었다. 메뉴는 차차 자주 먹는 몇 가지로 좁혀졌다. 회사를 다닐 때는 점심은 구내식당, 아침과 저녁은 샐러드와 클렌즈 주스를 정기배송해 먹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몇 가지 메뉴로 뺑뺑이를 돌린 셈이다. 엄청난 선택지가 있어서 잘 챙겨서 먹고 있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주는 대로 먹는 것이다. 아마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인간의 기본욕구인 의식주 중에서 욕구를 채우지 못했을 때 바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 ‘식(食)'이다. 모든 동물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생명유지를 위한 영양분을 얻는 기초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의 '먹는다'는 동물의 '먹는다'와 다르다. 바로 요리라는 활동을 거친다. 다양하게 재료를 조리하고, 양념과 향신료로 풍미를 더한다. 그리고 저장을 통해 제철이 아니어도 먹을 수 있으며, 발효를 통해 이로운 물질을 배양하기도 한다. 또 다양한 음식을 같이 섭취하면서 음식 간 궁합을 맞추기도 한다. 인간의 '먹는다'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식(食), 기술(Skill)'을 넘어서서 '락(樂), 예술(Art)'의 경지가 된다.
그런데 인간인 내가 가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식생활을 하고 있다. 주인이 시간에 맞춰 사료를 주면 흥분해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꼬리를 흔들며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이를 먹는 모습이나 배달시킨 치킨 언제 오나 기다리다가 초인종이 울리면 기쁜 표정으로 후다닥 뛰쳐나가 받아와서는 신나게 포장을 뜯는 모습에서 다른 점을 찾기란 ‘틀린 그림 찾기 게임’ 마지막판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들이 발우 공양하시는 것처럼 수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몸의 양분이 될 거라 생각하며 직접 장을 보며 재료를 자세히 살펴보고 하나하나 차분히 씻고, 다듬었다. 그러면서 먹고사는 일이 돈을 버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았다. 작은 노동이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양파를 깔 땐 눈을 뜰 수 없었고 마늘을 빻을 땐 손 끝이 아렸다. 파를 썰 땐 미끌거려 베일뻔했다. 그래도 내 입으로 들어갈 요리를 하다 보니 꽤 재밌어졌다. 요리는 창의적인 활동이면서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라면 하나 끓이는데도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들을 떠올리며 '버섯을 넣으면 국물 맛이 끝내 줄 거야?'라고 하거나, 간을 보다가 장금이가 환생하여 절대미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신맛이 부족한 것 같아 감식초를 넣어야 해'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몇 대를 이어온 장인들의 손맛을 따라 해 보겠다며 '액젓을 넣으면 깊은 맛이 날 것 같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깊기는 개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셰프라도 된 양 전완근에 힘을 주며 소금을 뿌리는 꼴값을 한다. 요리 도구는 또 왜 이렇게 탐을 내는지 퇴사하고 돈도 없으면서 미쳤지... ‘다 있어'매장에 가서 언제 쓸지 모를 온도계, 거품기, 밀대, 식빵틀 등 제과, 제빵기구와 그릇을 사모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망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홈쇼핑에서 샀다. 공식적으로는 '코팅팬은 쓰다 보면 나쁜 물질이 나와서 오래 쓸 수 없으니 스테인리스팬을 쓰는 것이 건강하고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다'였고, 프랭클리 스피킹으로는 '텔레비전에서 스테인리스팬에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만드는 모습이 있어 보이네'였다.
그렇게 우리 집에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세트가 도착했다. 겉포장에 연마제성분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세척 후 사용하라고 쓰여있다. 내가 누구인가 셰프로 빙의한 백수가 아니던가. 남는 게 시간이요, 할 줄 아는 것은 너튜브검색이었다. 이미 스테인리스팬 세척법 정도는 검색으로 예습해 놓은 상태였다. 올리브유를 키친타월에 묻혀 1차 세척을 진행했다. 검은색 연마제가 묻어 나왔다. 그렇게 세척을 2번 더 하고 이번에는 베이킹파우더를 뿌려서 뜨거운 물로 헹궈냈다. 3차로 식초를 희석해 놓은 물에 담가 30분이 지난 후 헹궈냈다. 마지막으로 주방세제를 이용해서 다시 한번 세척을 했다. 이 정도면 연마제는 물론이고 세척에 썼던 올리브유까지 싹 씻겼을 것이라 자부하며 세척을 마무리한다. '점심시간만 돼라. 점심시간만 돼라' 기다리다가 스테인리스 팬을 얼른 쓰고 싶은 마음에 10시부터 점심식사 준비를 한다. 오늘 메뉴는 목삼겹살 구이와 파채를 곁들인 상추 샐러드. 그런데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예열을 해야 요리가 된다. 예열이 안되면 팬바닥에 다 달라붙고 탄다. 예열도 센 불로 하면 안 되고 약한 불로 뭉근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예열이 되면 불을 끄고 잔열로 요리를 한다. 첫 요리는 나름 선방했다. 팬이 조금 타기는 했지만 고기 기름이 나오면서 눌어붙는 것이 덜해졌다. 그리고 코팅프라이팬보다 높은 온도라서 그런지 고기도 기름이 쏙 빠지고 맛있게 구워졌다.
어린아이가 새 장난감을 받았을 때처럼 신나게 요리를 하다 보니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내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다. 이제 막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아직 연마제가 묻어 있는 초보이다. 연마제가 벗겨져도 아직 요리를 하기에는 예열이 필요한 미적지근한 상태이다. 센 불에 빠르게 예열하면 다 타버릴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마냥 신나서 셰프가 된 양 매일 글을 발행하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예열 중이다. 나는 지금 약한 불로 뭉근히 예열 중이다.’를 되뇐다. 어쩌면 코팅팬이면서 스테인리스팬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을 요리하려면 훨씬 더 숙성되어야 한다. 설레발은 이제 끝내고 진짜 장인 아니, 명인이 될 수 있도록 ‘나’라는 장을 담가 쨍한 햇볕과 바람에서 자연숙성 시켜야 한다.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바로바로 요리가 안된다. 예열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열이 끝나면 잔열로 요리를 한다. 나는 영감으로 예열해서 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달궈진 잔열로 기름기 쏙 빼고 '나'라는 잘 숙성된 장으로 진심만 담은 담백한 글을 요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