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죽을래도 없다. (9)
아이를 왜 때려서 키우면 안 될까요?
'사랑의 매, 참 교육, 다 너 잘되라고...'등등 아이들에 대한 폭력에는,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다양한 이름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낱말로 포장되어 '지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의 미래는 어둡다'라는 불안의 족쇄를 아이들에게 채운다. 아직 어려서 힘이 없는 아이들은 이상함을 감지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르거나, 울고불고 떼쓰며 발악한다. 하지만 결국 가차 없는 물리적 한계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돌은 세월의 강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이리 뒹굴 저리 뒹굴며 여기저기 부딪혀가며 둥근 모습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애초에 정을 맞고 징이 박혀서 모난 부분을 강제로 박탈당한 돌들은, 반듯하고 예쁘게는 깎였을지언정, 어디 하나 버티고 설 힘조차 없게 되어, 졸졸졸 시냇물의 약한 흐름에도 하염없이 쓸려 내려가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 버텨본 경험이 없는..., 아니지 버티는 경험을 박탈당했거나, 신체적 한계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힘을 잃은 아이들은 깎이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깎여나갔다던지 혹은 반대의 경우로 어른이 되어서도 힘들어한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또 편하게 '트라우마', '상처'라는 이름을 붙여 나쁜 것으로 몰아간다. 애초에 트라우마란 없다. 아니 정확히 트라우마는 위험에 대한 기억을 남기는 생존본능일 뿐이다.
꼭 물리적 폭력만 학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어린 시절에 폭력에 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꼭 폭력만이 학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 말한 사랑으로 둔갑한 신체적 구속과 정서적 가스라이팅이 모두 속한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굴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실제로 반항할 수 없는 폭력이 행사되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그런 모순을 알게 해 놓고선 위인전을 읽히며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라고 교육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도리를 논하며 정의를 가르치는 것은 '너나 잘하세요'를 외치게 한다. 물론 인간의 나약함을 알려주고 겸손과 서로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꼭 폭력적이어야 할까? 그것은 단지 당장에 눈앞에 있는 아이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는 욕심 아닐까? 아이를 제대로 올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쉬운 길로 가려는 거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내 스트레스 풀고자 하는 그저 해소, 발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