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이 계속하다 보면 다른 게 보이던데...
공장에서 생산관리직으로 일했으니 오늘은 그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공장은 생산팀(Production Team)과 품질보증팀(Quality Assurance, Quality Control Team), 이 두 개의 팀이 축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이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업무다. 품질 좋은 제품을 최소비용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말로는 쉬운데 실제로 두 업무가 모순인 상황이 많다. 예를 들어, 달걀 10개를 깨서 달걀물을 만드는 공정을 가정해 보자. 달걀 10개를 깨는데 보통 20초가 걸린다고 하면, 깨는 시간을 10초로 줄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빨라진 속도 때문에 달걀물속에 껍데기(불순물)가 많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불량품이 쏟아져 나온다. 불량품이 나오면 품질보증팀은 바빠진다. 불량발생 원인을 분석하고 생산팀에게 불량개선 대책을 요구한다. 그러면 생산팀은 어떻게 할까? 중간에 껍데기를 걸러내는 거름망 시설 투자를 제안한다. 그렇게 투자를 해서 생산성이 높아지면 생산단가가 낮아지고 낮아진 생산단가만큼 돈이 쌓여서 어느 정도 기간 후에 투자비가 회수되면 그다음부터는 회사의 이익이 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공장운영 방식이다. 그런데 거름망 투자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면? 그때부터는 생산팀과 품질보증팀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생산팀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이므로 불량이 발생하는 것을 감수하고 껍데기 100개 들어갈 것을 50개까지 줄이는 관리를 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품질보증팀은 50개도 불량률이 너무 높으니 10개 미만으로 줄여야 한다고 버틴다. 양쪽의 기싸움이 벌어진다. 나는 생산팀이었으므로 당연히 생산팀의 편에 서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 품질보증팀이 관리할 수 있는 느슨한 불량률을 제시하라고 압박한다.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10개든 100개든 껍데기는 안 들어가야 한다. 공장 입장에서야 백 개중에서 한 개 불량이면 불량률 1%로 일을 잘했다고 할 수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구매한 제품이 불량이므로 불량률 100%의 몹쓸 회사가 되는 것이다. 신입사원 때 이점을 많이 간과했다.
현장 작업자들은 하루종일 같은 제품을 반복 생산한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조금만 이상해도 금방 잡아낼 수 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불량이 더 크게 보이고, 불량의 기운을 내뿜는 제품들이 눈에 뜨인다고 한다. 하루는 현장을 돌다가 한쪽에 불량품을 한가득 빼놓고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봤다. 안 그래도 납기일이 바쁜데 불량이 많이 나오면 안 된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외관상 접합부가 조금 이상했지만 기능상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양품으로 통과시키려 하자 작업자들이 펄쩍 뛴다. 이거 나가면 큰일 난다고, 소비자들이 받아보면 기분 나쁠 거라고 했다. 그때는 관리자 지시를 왜 안 듣느냐며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틀린 거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분으로 사람 잘 뽑은 거다. 그분들에게는 불량을 크게 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회사입장에서 큰일을 해낸 것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이렇게 불량을 잘 잡아내냐고 칭찬하면서 현장을 돌았다. 작업자들은 계속 반복하다 보면 다른 게 보인다고 했다. 생산스케줄이 끝날 즈음 회식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봤다. 아이들 뒷바라지하면서 가계에 도움도 되고자 공장을 다닌다고 했다. N잡러의 시초가 이분들이 아닐까 싶다. 생활도 굉장히 규칙적이었다. 매일 공장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못 버틴다고 했다. 그렇게 규칙적인 것은 정신력도 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똑같은 것을 계속하다 보면 다른 게 보인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드라마가 명작이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베토벤바이러스'가 그랬다. 조금 오래된 드라마이긴 한데, 판자촌에서 꿈도 없이 살아가던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환청 같은 음악이 들려오고, 아이는 그 뒤로 음악의 거장이 된다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다. 처음 볼 때는 강마에의 카리스마와 독설에 주목해서 봤었는데, 다음에는 볼 때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재밌는 드라마는 재탕, 삼탕 해서 본다.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최근에는 '도깨비'가 그랬던 것 같다. 예전에는 독서를 할 때, 한번 완독하고 나면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듯 행세했다. 어디 가서 좀 안다고 잘난 척을 했었다. 진짜 무식해서 용감했다. 드라마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책도 재탕 삼탕해서 읽게 됐다. '이방인'이 그랬고 최근에는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가 그랬다. 책은 재탕 삼탕의 재미가 더하다. 1회 독 때 못 알아봤던 명문장들이 2회 차 3회 차에서 계속 튀어나온다. 그리고 대충 넘겼던 부분들에서 새로운 감동을 발견한다. 그래서 내 글들도 한 번 읽고 덮는 글이 안되길 바라면서 정성 들여 쓰려고 노력한다. 신문사설에서 번역가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번역가들은 책을 번역할 때 글의 비어있는 곳까지 신경 쓴다고 한다. 독자들이 훌훌 보고 넘기는 곳까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채워 넣어야 한다고 한다. 번역가들의 그런 노고를 알게 되니 더더욱 한 번 읽고 덮지는 못하게 됐다. 이번 회차에서는 읽지 못하고 넘어간 것을 2회 차, 3회 차 읽다 보면 번역가들이 열심히 채워 넣은 그 비어있는 곳까지 전부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반복해서 읽어 보게 된다.
책에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면 음악은 어떤가? 클래식, 고전은 뭘까?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러 가는 이유가 뭘까? 쇼팽, 베토벤은 왜 지금까지 사랑받을까? 특히 베토벤의 음악은 바이러스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치명적이라는데, 이유가 뭘까? 아마도 연주자들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불멸의 정신을 그대로 되살리려는 노력. 어디서 연주하든 관객들에게 똑같은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자기 인생을 쏟아부은 그 노력 말이다. 공장에서 돌리는 기계도 똑같은 성능을 유지하려면 매일 '기름 치고, 나사 죄고'를 반복해야 하는데, 인간의 몸으로 매 공연마다 똑같은,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기 위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할까? 정말 존경스럽다. 위대한 명작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하는 분들은 거장이라고 불릴만하다. 거장들의 그런 노력은 머리카락 10만 분의 1 정도의 차이도 금방 알아차리는 경지일 것이다. 공장의 작업자들처럼 불량률 0%를 뛰어넘어 생산성까지 향상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을 듯하다. 거기에 고객감동까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한 직업에서 몇십 년씩 똑같이 일하는 분들은 모두 거장이라고 불릴 만하다. 나도 일단은 글이라는 것을 쓰기로 했으니까 거장의 반열에 올라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규칙적인 생활로 주변의 작은 변화를 잡아내야 한다. 그것들이 불량품일지 명작일지는 내 손에 달렸다. 불량품만 나와도 좋다. 원래 새 기계는 시운전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