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회의는 항상 밤에 열린다. (9)
울분, 흐름을 막아버리는 감정
인생은 강물에 많이 비유된다. 강물은 얼핏 보면 흐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지류들이 모여 바다로 바다로 계속 흘러간다. 울분은 이 강바닥의 모래와 같다.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쌓인다.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한다. 모래 한 알이 강물 속에 떨어지는 순간을 누가 인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나둘 쌓이고, 결국 강물의 흐름을 완전히 막아버린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가장 흐름이 약한 부분에 쌓여 강줄기를 바꿔버린다.
울분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작은 모순들이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울분은 쌓이고, 흐름을 막고, 사람을 고립시킨다. 울분이 생기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안의 정의와 부합하지 않는 환경에서 발생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현실이 충돌할 때, 울분은 천천히 쌓이기 시작한다. 울분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쌓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정의는 타액이다
울분이 정의와 현실의 상충으로 생긴다고 가정했으니, 상동하게 만들면 걱정이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정의는 강물이 아니라 타액(침)과 같다. 입 안에 있을 때만 소화액이고, 윤활작용과 항균작용을 한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오물이 되고, 폭력의 도구가 되며, 항원이 된다. 정의를 강물처럼 많은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정도로 만들면 걱정이 없어지겠지만, 그런 큰 사람은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즉, 정의는 강물이 아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정의는, 내 안에 있을 때는 선명한 원칙이다. 사회 속으로 나오면 불편한 주장이나 거친 고집이 된다. 정의가 환경과 관계 속에서 변질될 때, 그 충돌은 울분을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울분은 점점 더 깊어지고, 강물의 흐름을 완전히 막아버리거나 변형시킨다. 한 참 나중에 지나고 보면 내 인생의 굴곡은 스스로가 자초한 경우라고 생각되는 이유가 그래서다. '내 탓이오'는 세상을 포기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울분을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울분은 이명 같은 것이다. 이명은 질환이 아니다. 증상이다. 뇌가 청력 손상으로 소리가 빈 곳을 메꾸기 위해 만들어내는 소리이다. 울분도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울분이 생긴다는 것은, 내 안에 무언가 비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삶에서 반복되는 부조리함이 내 안의 신념과 계속 충돌하면서 깎이고, 허물어지고, 결국 빈자리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서 울분이라는 감정이 차오른다.
이명이 귀를 울리는 것처럼, 울분도 마음을 울린다. 끊임없이, 밤마다. 그러나 이명을 신경 쓰지 않으면,
즉 인지하지 않으면, 그 소리를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렇다면 울분도 마찬가지다. 울분을 없애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울분을 다루는 더 현명한 방식일지 모른다. 이명은 신경 쓰면 쓸수록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그리고 더 괴롭다.
울분을 흘려보내는 법
완벽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울분이 쌓이지 않도록 조절할 수는 있다. 지식, 경험, 사고.
즉, 공부하고 생각하고 채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 그래서 울분이 내 안에 고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