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회식은 어떻게 하지? 반말은 누가 먼저?

회식 자리에서

by 철없는박영감
메일함에 도착한 전체공지.


대부분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다. ‘○○ 추진계획 보고’, ‘○○ 실적 제출 요청’ 같은 제목은, 이미 자동으로 스크롤을 넘기는데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부서 전체회식 공지’라는 제목은, 마치 조직이 나를 호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7월 1일 정기 인사 이후, 약 2주가 지났다. 조직은 재편되었고, 나는 그 재편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존재다.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좀 더 빨리 예측했어야 했다. 방심했다. 나는 내 사회적 위치를 다시 계산한다. 나이순인가, 직급순인가, 아니면 계약서 기준인가. 그 순간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부 존재’가 된다.


‘임기제공무원 임용약정서’의 마지막 항목은 얄궂다.


「... ○ 그 밖의 신활력플러스 업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사항」

그 밖의 사항... 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밖의 사항이 되어버린다. 속된 말로 시다바리를 뽑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마치 노예 계약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약정서의 문장은 내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워버린다.


그리고 회식.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인사말과 건배사를 준비했다. '청바지'는 너무 식상하고, 'OO을 위하여'는 아재삘이 난다. 예전 회사에서는 건배제의자가 마지막에 'OO을 위하여!'라고 외치면,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세 번 외치는 문화가 있었다. 피식, 습관은 무섭다.


이 도시에서는 고속도로를 콘셉트로 잡았으니, 거기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리고 끝에 사람들이 '안성맞춤'을 외치게 하고 싶었다. '안성 사람 다됐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멘트를 준비했다.


"의정부에서 고속도로로 쐈습니다. 여러분!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안성맞춤!"


히히히. 돌이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다.


드디어 회식날! 새로 부임한 팀장이 큐카드까지 준비해서 의전을 시작했다. '와~ 역시 공무원... 회식도 순서가 있구나.' 그들의 회의는 늘 국민의례 생략 멘트와 함께, 참석자 소개, 그리고 위원장의 의사봉 '탕탕탕'으로 시작됐다.


승진자와 새로 부임한 늘공들의 소개로 이어졌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번에 계약직으로 우리와 함께 하게 된... 박 OO 주무관님 있습니다."


허걱! 자기들은 인사말도 하고, 건배도 하더니... 나는 그냥 사회자 소개로 이름만 호명되고 끝났다. 일어서서 인사도 못했다. 김이 좀 샜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 저 멘트를 했다면 더 큰일이 났을 수도 있다고 자위했다. 나는 그 뒤로 소심하게 복수를 했다.


아! 저 술 못 마십니다.


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그건 조직이 나를 시험하는 자리다. 누가 먼저 술을 따르느냐, 누가 먼저 말을 놓느냐, 누가 먼저 웃느냐에 따라 서열이 재편된다. 늘공은 익숙하다. 그들은 회식의 문법을 안다. 술잔을 들고, 적당한 농담을 던지고, 상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타이밍까지 계산한다. 그들의 웃음은 훈련된 반사신경처럼 정확하다.


먼저 온 어공들은 좀 낫다. 하지만 여전히 눈치를 본다. 계약직이라는 단어는 회식 자리에서 ‘말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웃음도, 말도, 술도 모두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그 조심스러움은 존재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실세는 말이 없다. 그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리를 장악한다. 말을 아끼는 것이 권력이고,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가 위계다. 그 침묵은 존재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 사이에서 내 술잔을 들고, 누구에게 먼저 따를지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사람 취급도 안 하는데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농업기술센터 대빵인 소장님이 술병을 들고 다가왔지만, 거절했다.


"아!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소장님은 쿨하게 일어나서 다른 자리로 갔다.


나는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엔 독기를 가득 품은 채 회식자리에서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크크크. 앞옆자리에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채로 들어왔다는 아기 늘공은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밖에서 할 것 없어서 겨우 이런 데 와서 일하냐'


삼촌뻘, 아버지뻘에게 절대 할 수 없는, 그 특유의 반하대 말투와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웃음이 진짜 웃음인지, 살아남기 위한 표정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회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 거울 앞에서 처음 마주한 내 얼굴도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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