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늘공과의 미묘한 거리감

공기가 다르다.

by 철없는박영감
첫 출근의 정적


첫 출근 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사무실 한 구석에 내 자리가 생겼다. 그 자리는 이미 알고 있는 무덤이었다. 에어컨 설정 온도만큼이나 온기가 없었다고 해두자. 그 앞에 앉아 잠시 대기. 신품종이 등장했으니 (이제 농업직 공무원다운 용어를 써야지), 품평회 하러 사람들이 모여들 법도 한데. 음, 내가 못생겼나? 자꾸 보면 나름 매력 있는데?


고요한 사무실. 파티션 뒤로 숨어 있는 동료들. 앞에서도 말했지만, 7월 1일 정기 인사로 늘공 조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첫 출근한 어공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갑자기 소장님 방으로 불려 가 임용장을 받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소장님도 첫 출근이었다. 소장님의 첫 공식 일정이 ‘어공’인 나에게 임용장을 수여하는 일이었다. 첫날, 첫 순간에. (지금은 관공서명이 '농업기술센터'지만, 과거에는 '농촌지도소'였기 때문에 조직장의 직함은 아직 ‘소장님’이다.)


공간이 말해주는 위계


사무실 위치도 참 운명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까. 얄궂다. 우리 어공이 있는 사무실은 1층 로비 입구 바로 옆. 늘공이 있는 사무실은 2층이다. 그야말로 상전과 아랫것. '끝판왕 늘공을 만나려면 1층 중간보스 어공을 먼저 깨고 오세요'같은 느낌이다. 흐흐흐. 너무 자격지심인가? 좋은 점은 여름에 열기가 위로 올라가서인지 에어컨을 틀어도 1층과 2층의 온도차이가 꽤 난다. 2층은 열정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로, 습도가 높은가?, 쾌적과는 거리가 멀다.


어쨌든 임용장까지 받고 오니, 2층은 몰라도 1층의 같은 사무실 사람들은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저것 물어보기는 하는데, 내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니, 영혼은 없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내 앞에서 혼자 넋두리하듯 질문하는 게, 이미 알고 있는 그 무덤, 맞다! 그래도 이번 생까지 망하지 않기 위해,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각오로, ‘허세’를 완전 봉인했다. 그래서 이번엔 내 쪽에서 고요해졌다.


허세와 함께 봉인된 서류들


인수인계라며 던져준 서류뭉치를 하나하나 분류하고 정리했다. 사실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분류’나 ‘정리’라고 하면 오만이고, 쓸모없어 보였지만 버리기엔 좀 그런 서류뭉치를 가장 아래 큰 서랍에 모두 때려 박아 넣고 ‘허세’와 함께 봉인했다. 약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찾은 것을 보면, 내 판단이 어느 정도 맞은 것 같다. 음~ 이제는 폐기처분해도 되지 않을까?


그때는 그게 업무의 시작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의식이었다. 서류와 허세를 함께 묻는 어공의 입문식. 이렇게 전임자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게 맞겠지? 그리고 나에게로 통하는 새로운 길을 내는 게 맞겠지? 음... 내가 새로 낼 길은, 민원인들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이정표도 세우고, 서로 엉키지 않게 신호등도 세우고. 실력이 좀 쌓이면 포장도 하고, 길도 넓히고, 꼭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노선의 버스도 다니게 해야지. 흐흐흐 꿈도 야무지다.


날벼락같은 워크숍


주변 정리와 행정 전산망 권한 신청, 아이디 생성, 명함 신청 등등, 다시 하라면 절대 기억 못 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들, 첫 출근 업무 3종 세트를 처리하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점심을 먹고 왔는데, 이게 웬 날벼락. 안성시 중간지원조직 워크숍이 1박 2일로 성수동 일대에서 내일부터 있단다. 그리고 나에게는 당연히 필참밖에 선택권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극‘I’ 성향이라 낯을 많이 가리는데, 출근 이튿날부터 바로 워크숍이라니. 우리 팀 이름도 아직 생소한데~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 추진단>. (뭐래? 행자부, 기재부, 여가부... 우리나라 행정조직은 이름이 길다.) 신입사원 연수라고 생각하면 좀 위안이 될까? 어쨌든 그렇게 됐다. 잠시 후, 카톡이 왔다. '2025 중간지원조직 워크숍'이라는 방으로 초대됐다.


그리고 다짜고짜 곧 장 투표가 시작됐다. 워크숍 이튿날 점심메뉴로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 고르라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짬뽕 맛집'이라고 했다. 어~ 선택권이 있는 투표 맞지? 나는 소신 있게 짜장면을 골랐다. 그러다가 누군가 한 명이 '당연히 탕수육도 나오겠죠?'라고 하자, 진행자로 보이는 프로필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배운 사람입니다.'


앗 개그 수준이... 이때부터 느낌 좀 싸하기 시작했다.


출근 다음 날부터 바로 사무실에 오지 말라는 통보아닌 통보. 의정부에서 안성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서울로 가라는 건지. 크크크. 다음 날 1박 2일 출장 준비를 했다. 혹시나 해서 챙긴 짐들이 캐리어에 한가득 찼다. 1박 2일이었지만, 중간에 땀냄새가 심하게 나거나 옷이 더러워지면, 민폐를 끼칠 수 없으니 바로 갈아입으려고, 거의 3박 4일 수준으로 짐을 쌌다. 그랬더니 캐리어가 가득 찼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출근 이튿날, 버스 탑승이 예정되어 있는 안성 아트홀 주차장으로 갔다. 오랜만에 낯선 환경 속에서 군기가 바짝 든 나는 1등으로 집결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버스가 와 있었고, 워크숍 가는 버스가 맞냐고 물어보니, 맞단다. 그래서 맨 앞도, 맨 뒤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1인석에 앉았다. 군대에서 배운 기술 중 아직까지 유용한 것이 바로 '줄 서기'다.


한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한 무리의 소란스러운 사람들이 탑승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 캐릭터도 모르고, 직책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아는 거라고는 눈에 보이는 성별과 나이대, 그리고 엄청 시끄럽다는 사실이었다. 누군지도 모른 채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혹여나 들리면 자기소개를 해야 하니까 최대한 들릴락 말락. 당신은 못 들었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는 예의를 차렸다는 수준으로 말했다.


나도 참 선입견이지. 공무원 워크숍이라고 해서, 뭔가 차분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그런 단정한 느낌의 워크숍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깨비 시장? 도떼기시장? 와~! 도떼기시장도 이런 도떼기시장이 없었다. 그들은 진공청소기처럼 탑승하자마자 내 기를 모조리 빨아갔다. 역시 어공! 엄지 척!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성시 중간지원조직 중 우리 팀만 빼고 전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단다.


'아~ 그래서 이렇게 서로 친했구나. 그러니 놀러 가는 기분이 들만도 하지.' 이해가 좀 됐다. 하지만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은 뻘쭘한 처지는 변함이 없었다. 아~! 우리 팀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사실 그들이 와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지금 시끄러운 저 무리나, 우리 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나, 모르는 사람인 것은 매한가지다. 다만 피아 식별이 된다는 것뿐. 그렇게 정신 나간듯한, 나사가 몇 개 빠진듯한 워크숍이 시작됐다.


성수동에서 들은 한 마디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다. 아니, 소란스럽다기보다는 괴기스러웠다. 정말 엄청 친한 사이인가 보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깔깔깔 웃는 여고생들처럼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크게 웃고, 크게 떠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조난자들이 발생했다. 그들은 구조의 손길도 마다할 기세였다. '버스 안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게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던 ‘퍽퍽’ 소리.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한 ‘헉헉 헐 헐’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나는 그렇게 실시간으로 기를 빨리며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조를 나눠서, 역시나 모르는 사람들과 성수투어를 했다. 안성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성수동을 벤치마킹하러 왔다고 하는데, 나는 성수보다 안성이 더 낯설고 새로운 도시였다. 차라리 성수동에 접목할 안성의 특징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입에 지퍼를 채우고 조원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나마 여기는 멤버가 활기차서 계속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전부 ‘E’ 성향이 확실하다.


워크숍 참석자 대부분은 어공이었지만, 이들을 지원할 누군가가... 동행자가 있었다. 말은 지원인데 감시가 아니었을까? 내가 틀렸다면 적어도 인솔자 정도? 마치 수학여행에서 다른 반 담임선생님이 인솔해 주는 느낌? CA시간의 지도교사 느낌? 권위와 친분, 둘 다 애매한... 그래서 서먹한 사이였다. 그렇다 늘공들의 사무실은 딱 교무실 느낌이었다.


성수 일대를 계속 돌아다니며 처음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너무 그러면 관심사병 혹은 사회부적응자같이 보일까 봐 소싯적 영업하던 스킬을 발휘하여 늘공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화 중에 인상 깊었던 말.


“아! 저는 늘공이에요.”


뭐지, 이 벽치는 멘트는? 나는 성골이니 진골인 너는 알아서 기라는 뜻인가? 나이도 한참 어리던데... 별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아마 이 글의 탄생시점은 저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조금 이야기 나눠보니 그 늘공의 팀장이 아는 사람이었다. 속으로 외쳤다.


'야 인마, 너희 팀장 사모가 내 친구다! 인마'


그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강한 어조로, 들킬까 봐 조심조심 아주 작게 생각했다. 크크크


회의? 이게?


음... 우선 공무원에게는 랩탑 컴퓨터가 지원되지 않는다. 뉴스에서 공무원 사무실을 비출 때, 책상 위에 있는 육중한 데스크톱을 보고 '아 도대체 몇 년 전 자료화면이야?'라고 게으른 방송국 놈들을 욕하곤 했는데... 아~ 내 눈앞에 그 큰 것이 떡하니 있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작은 협의 자료조차도 출력을 해왔고 메일을 보내는 문화가 없었다. 대부분 A4 한 장을 팔랑팔랑 들고 내 자리로 찾아왔고, 좀 편해지곤 전화를 해왔다. 아! 메일이 올 때가 있는데, 전체 공지가 필요한 내용이 전부였다.


회의는 종이 한 장으로 시작됐다. 이게 자원낭비인 데다 너무 답답하다. 내용은 전부 쓰*기...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화자찬하는 성과 나열과 부풀리기가 주였다'라고 하면 너무 건방진 걸까? 그냥 나무에게 미안했다고 하자. 앞에서 시어머니가 많다고 했는데, 전부 필기구 하나 없이 맨손으로 털레털레 들어와서 판관처럼 가만히 듣고, 즉석 떡볶이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 즉석 설루션을 냈다.


그렇게 침 튀기며 자신의 정의를 타액처럼 쏟아내며 열변을 토하고는 내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다시 의자에 기댔다. 음... 어떻게 보면 예전 사극의 이방정도는 되는 위치니까 '그럴 만도 하다'라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런데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릿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공무원 AI컴퓨터 설이 아니라, 설루션이라며 내놓은 말의 99%가 결국 ‘라테는 말이야’라는 불편한 거짓이었다. 그래서 회의는 대부분 녹화방송을 틀어놓은 것 같이 긴장감이 없었다.


이번 생은 망해서, 사춘기 시절로 타임슬립했습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의 특성상, 남자 직원이 귀했다. 그래서인지 사춘기 시절, 엄마에게 반항심이 들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좋게 말하면 데자뷔? 회춘? 하하하. 질문을 하면 '그냥 하는 거지 뭐~'라는 우리 엄마式 반응이 나를 가장 욱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프로페셔널 직장인의 세계인데...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으로 농담 따먹기 하듯이 민원을 처리하는 광경이, 왜 사람들이 공무원을 세금도둑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랏 곡간을 눈먼 돈 취급하는 똥파리들도 엄청 꼬였다.


특히, 못 믿고 확인하려는 습성. 엄마들이 그렇지 않나? 아들들이 가만히 방에 있으면 그게 무탈하게 잘 있는 건데, 꼭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성이 있다. 공부하다 잠깐 딴짓이라도 할라치면, 그때 딱 타이밍 좋게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나서는, 마치 딱 걸렸다는 듯이, '항상 그런 놈', '구제불능'이라는 낙인을 찍고는 잔소리를 시전 한다. 아들은 그게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그런데 아직 표현이 서투른 아들들은 이렇게 말한다. 감시받는 것 같고, 구속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엄마랑 말이 안 통한다. 게다가 엄마의 심보가 점점 꼭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느낌이 강해져서 아들은 입을 닫고, 엄마는 답답해하고, 결국 대화가 단절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아들들아~ 참 미안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너의 '느낌과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아직 미성년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런 때 뭐라고 하는지 아니? 엄마 젖 더 먹고 오라고 한단다. 너의 독립심이 커진 것은 이해하지만, 내 감정을 어필하는 건 아마추어 같단다. 숨겨져 있는 진짜 원인, 서브텍스트를 건드릴 줄 알 때, 그때가 진짜 어른이 된 거란다. 또 엄마의 케어를 당연한 것으로, 마치 종 부리듯이 생각하는 너의 모습을 먼저 되돌아보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다니면, 넌 그냥 덩치 큰 애란다. 크크크"


엄마들은 나름대로 다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항변한다. 추가로 몰라줘서 서운하다고까지 한다. 사랑이라는 자신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아들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타액처럼 내뱉는 광경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들은... 아니지, 자매들은 집에서 용건 없이도 서로를 한 번씩 부른단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나? 엄마들도 딱 저런 행동으로 자신의 불안을 아들들에게 전이시킨다. 결국 아들은 불안해지고, 엄마는 안심하게 되는 역시나 불편한 진실. 불편한 광경이다.


늘공들과의 회의는 그래서 회의실에서 모여서 한다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안을 갖고 관련자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서 면담을 하는 수준이었다. (담당자가 아니다. 공무원 사회는 임무는 있지만 업무는 없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처음엔 약점으로 보였는데, 나중에 깨달았지만 엄청난 강점 중에 하나다.) 딱 교무실에 선생님 찾아가서 상담하는 그런 느낌. 만약 첫 관련자를 잘못 지명하면 뺑뺑이를 돌다가 서너 명은 더 상대하고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옆자리 주사님과의 대화는 결국 ‘누구를 찾아가야 하냐’로 수렴됐다.


어쩌면 이게 인수인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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