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가지마

영화 귤레귤레(Güle-Güle)를 보고서

by 숨듣다

정동진 앞바다를 훑었던 구름 내음이 여기, 서울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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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껍질을 까면, 겨울 저녁처럼 아련한 냄새가 손끝에 묻는다. 이미 오래전에 먹어버린 맛인데도 그 껍질 하나가 기억을 깨운다. 고봉수 감독의 영화 《귤레귤레》는 그런 영화다. 사라진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순간을 따라간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패키지 여행으로 시작된다. 별 기대 없이 터키로 출장을 떠난 그는, 우연처럼 과거의 짝사랑을 만난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 남편과 함께 와 있었다. 관계는 이미 부서졌지만, 그녀는 ‘재결합 여행’이라는 이름의 의례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본다.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있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시간을 살아낸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안, 고요한 풍경 속에서 피어나는 당혹스러운 떨림. 대식은 계속해서 말을 걸지만, 대화는 끝내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웃음으로 덮인 말장난 속에, 고백이 아니라 결핍이 있다. 아쉬움만이 남아 서로를 불러내지만, 결국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그 아련함 앞에서 '난 아직도 널 사랑해'는 말은 힘 없이 흩어진다.


대식은 짝사랑했던 정화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실은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남편과의 관계를 붙잡는다기보다, 상처 입은 자신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상처받았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실로 고통 섞인 쾌락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가장 아프게 했던 기억에 기이하게도 머문다.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음으로써만 나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식은 실패한 사랑을 통해, 자신이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정화는 불행한 결혼을 통해,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었던 사람임을 확인한다. 각자의 상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영화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별도, 화해도, 극적인 감정의 해소도 없다. 다만 한 여자의 뒷모습과 떠오르는 열기구들, 쓸데없이 눈부신 아침노을과 말이 많던 바람만이 남는다.


귤레귤레,

그 다음 만남에서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약속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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