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사라? 허락된 사라!

by 숨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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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은 ‘사라’라는 젊은 여자이다. 외모도 괜찮고, 감수성도 섬세하지만, 어릴 적부터 자기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고, 어느 날부터 자유로운 섹스를 통해 삶을 해방시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학창 시절의 화실 선배인 기철, 고등학교 동창 정아, 정아의 후원자 역할을 하는 김승태, 그리고 대학교수 한지섭 같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라는 성적 실험과 방황, 오르가슴과 권태,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성 해방기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자신의 욕망으로 빚어낸 아버지 상을 반복적으로 유혹하는 구조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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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소설을 단순히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구원을 찾는 여자’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마광수 교수는 인터넷 야설 게시판에 글을 쓰는 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작품 안에 등장하는 성적 장면들은 오히려 조심스럽고 단순하며, 오늘날의 하드코어 포르노에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는 순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던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 와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작품을 제대로 읽다 보면, 섹스는 이야기의 중심이라기보다 관계와 전개를 이끄는 일종의 서사 장치라는 점이 드러난다. 사라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욕망을 탐색하지만, 끝까지 자신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독자는 그 결말 앞에서 질문만 남긴 채 멈춰 서게 된다.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성적 관계는 단순한 자극용 장치라고 보기 어렵다. 작품의 핵심은 ‘성녀-창녀 프레임’ 안에서 사라가 어떻게 욕망의 주체가 아닌, 욕망을 수행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포르노 속 여성 캐릭터처럼,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등장하다가 점점 적극적인 쾌락의 주체로 변모하는 그 서사가 『즐거운 사라』 속에서도 반복된다. 사라는 이 구조 안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며, “나는 원래 그런 여자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말이 과연 자기 인식의 결과인지, 아니면 구조에 강요된 여성상, 혹은 자신을 형성해 왔던 과거의 복합적 산물로서 환경에 자신을 맞춰가는 과정인지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사라의 말은 어쩌면 ‘이런 여자는 이렇게 욕망해야 한다’는 사회적 서사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일 수 있다. 이건 단순한 자극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얼마나 쉽게 구성되고 연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과 기대 속에서 살아간다. 욕망이란 것도 대부분 혼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경유해 생겨난다. 라깡이 말한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개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사라는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여자’로 보이길 원하고, 그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려 한다. 그녀가 욕망하는 방식은 결코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아라는 인물은 이런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정아는 사라보다 학벌도, 외모도, 사회적 배경도 부족하지만, 남자에게 복종함으로써 ‘사랑받는 여자’가 된다. 사라는 정아를 겉으로는 깔보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녀처럼 욕망받는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그녀가 정아와 레즈비언 관계를 맺는 장면조차, 남성의 시선을 상상하면서 진행된다. 쾌락의 행위가 아니라, (고전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맥락에서는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제삼자의 시선에 맞춘 퍼포먼스가 되는 셈이다.


사라가 만난 남자들도 결국 그녀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가면극 속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기철은 진심을 표현하자마자 매력이 사라지고, 김승태는 아버지 같은 인물로 다가왔다가 노쇠함이 겹쳐지며 혐오감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러나 또 다른 남성인 한지섭 교수에게는 다시 끌린다. 그는 무심하고, 자기를 거칠게 다루는 인물이다. 사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괜찮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내맡긴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학습된 복종이고, 조건화된 자학에 가깝다.


이쯤 되면 『즐거운 사라』라는 제목은 역설적으로 읽힌다. 과연 그녀는 즐거웠을까. 그녀의 섹스는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고된 오디션의 연속이었을까. 그녀는 섹스를 통해 쾌락을 얻기보다,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으려고 애쓴다. 결국 그녀는 끝까지 자기 욕망을 획득하지 못한다.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단순히 “여성도 욕망한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욕망이 사회와 타인의 시선 안에서 어떻게 조작되고 연기되며, 그것이 때론 자발적인 것처럼 오해된 채 구조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실험이다. 사라는 섹스를 반복하고 관계를 거듭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욕망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녀는 ‘즐거운 사라’가 아니라, ‘허락받은 사라’로 남는다.


이 소설은 외설이 아니라, 비극이다. 자기 욕망을 외부로부터 증명받고자 했던 모든 이들에게 거울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즐거움’은 과연 타인의 시선에서 독립적인 감정일 수 있는가? 마광수는 이 질문을 던졌고, 사라는 끝내 그 질문을 피한 채 연기된 욕망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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