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리스의 이상화 : 금기의 추동

『즐거운 사라』 비평에 덧붙이며

by 숨듣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자크 데리다에게 물었다.


'만약 당신이 하이데거, 칸트, 헤겔과 같은 철학자에 관해 알 수 있다면, 무엇을 보고 싶습니까?'


데리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들의 성생활이 어떤지 알고 싶군요. 왜냐하면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답하길 거부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에서 스스로를 비(非)성적으로 내세울까요? 혹은 어째서 그들은 사적 생활에 대해서는 함구할까요? 사랑보다 그들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을텐데 말이죠. 나는 헤겔이나 하이데거로 포르노를 찍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사랑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죠. '


데리다는 이렇게 답하면서도, 만약 기자가 같은 질문을 해온다면 답하지는 않을거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자타공인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통상 삶의 가치판단을 메타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하는 터인데, 유독 섹스는 어째서인지 그 입에 담기 두렵다.


이는 단지 한반도에 잔존하는 조선식 유교탈레반 DNA만의 문제가 아니고, 제 아무리 성생활에 개방적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난 어떤 체위가 좋더라'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고 침을 뱉어줬으면 좋겠어' 따위의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서구권 친구들은 그 정도 수위의 말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편인듯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상성욕을 포함한 꽤 넓은 스펙트럼의 성생활을 사뭇 진지한 태도로 논한다든가, 다른 섹스라이프를 권장한다든가, 그런 일은 드물다.


이 침묵은 단순한 사생활 보호가 아니다. 특히 ‘철학적 텍스트에서 나를 지우는 것’은 곧 철학자가 스스로 ‘무성적 주체’로서의 권위를 견고히 하는 행위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철학자들은 사랑과 욕망을 논할 수 있지만,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 맥락엔 사안의 실존적 불확실성과 주체의 분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침묵은 은폐된 권력의 언어이기도 하다. 공론장에 드러나는 자들은, 자신이 무성애 혹은 비성적 존재임을 통해 ‘도덕적·사유적 순수성’을 과시한다. 사랑을 경험하는 주체가 아닌, 사랑을 객관적 서사로 해석하고 배치하는 ‘관찰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질문은 거대한 수수께끼를 내포한다. '사랑을 하고, 욕망을 갖는 이는 철학자 자격이 없는가?'라는 질문이 그 핵심이다.


이렇듯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닌 ‘의도된 공백’이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욕망은 감추어지지만 존재한다. 이는 곧 철학이 ‘진리’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기도 하다. 철학에서 욕망이 빠진다는 건, 철학이 욕망에 대해 입을 닫았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을 구조 규정의 외부로 치환했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변론을 짚고 넘어가자면, 영화 에 나오는 사회상처럼, 또 사이비 레드필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섹스가 단지 종족 번식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에만 종속된다면 딱히 숨길 이유도 없을테다. 그 경우에는 '정상위' 외에는 다른 어떤 '낯 간지런' 체위도 없을 뿐더러, 만약 시도되더라도 아마 금방 교정될 순간의 우연에 지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섹스가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한 행위라면 키니코스가 광장에서 자위를 했던 일화가 그토록 기이하게 여겨질 필요도 없지 않는가? 하지만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진짜 문제는 인간의 성충동은 본래 생식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변주된 특정한 쾌감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사회적 기대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성생활은 베일에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승화’를 통한 해결, 즉 성충동을 원래 목표가 아닌 보다 고차적인 문화적 목표로 향하게 하는 방식이 학문과 예술의 권위자에게는 더 심도있는 작업을 위한 동기부여가 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라는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에 담는 학자들이라고 한들, 정작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처럼 도의적으로 문제시될 만한 성생활이 폭로된 케이스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예술적, 학문적 작업에 성생활을 예시로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인터넷방송 중 '음지'로 분류되는 팬X티비, 엑X방송 같은 부류는 천박함을 무기로 거리낌없이 스스로를 성상품화하며 성적으로 추잡한 말들을 내뱉는데 거리낌이 없다. 물론 그들의 성상품화는 단지 상품화일뿐이지, 어떤 의미에서도 더 자유분방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가감 없는 고백이 '천박한' 인간으로 분류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연예인들도 그들의 연애 사실이나 성생활이 폭로될 경우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가수 비비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들에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어도 헤픈 여자인 걸 티 낼 필요가 있냐?'는 식의 비난이 사회적 맥락에서 아직도 성립하는 꼴을 보면, 나는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이 헤픈 여자인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중구난방하게 이야기했지만, 이 무균적 섹스의 공간이 형성된 배경을 설명하는 데 가장 단순하게는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할테다. 첫째로, 프로이트의 지적대로 섹스에 관한 기호가 (단지 종족 번식에 기여하는 범위를 넘어) 개인의 추잡한 욕망과 진실까지 드러내기 때문에 감출 수밖에 없다고 말해볼 수 있다. 이 경우, 성생활의 고백으로 드러날 수 있는 추잡한 욕망이란 무엇이며, 어째서 자신의 진솔한 욕망의 단면을 '추잡하다'고 여기게 될까?


직감하듯이, 당연히 무엇인가가 추잡하다는 감각은 천부적으로 주어진 기준이 아니라, 문화적 기준이라는 타자성을 적극 수용한 결과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킨제이 보고서는 도덕적으로 금기시되는 성생활의 양상들을 낱낱이 통계적으로 들추어 내면서 미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대체 사회적 통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다. 그 내용의 일부를 언급하자면,

- 남성의 37%, 여성의 13%가 일생에 한 번 이상 동성애 경험이 있으며,

- 남성의 50%, 여성의 40%가 혼외정사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 여성의 71%는 불륜이 결혼을 망가뜨리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일부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했다

- 남성의 69~70%가 사창가를 방문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 가학-피학증(Sado-masochism) 등 다양한 도착적 성행위가 빈번하며,

- 농촌 소년의 17%가 동물과 성관계를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사실 혼외정사나 불륜, 수간, 동성애는 위생학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꼭 옳은 주장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그외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여겨질만한 소위 '이상성욕'은 도의적으로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따라서 두 번째로 가능한 가설이란, 미셸 푸코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사회적 통념은 단순한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 의해 구축된 산물이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978)에서 성적 금기가 사회적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핵심 논점으로 설명된다.


푸코는 서구 사회가 17세기 이후 성을 억압해왔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오히려 성 담론은 과학·의학·종교 등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었으며, 특히 18세기 이후 '비정상적 성행위'(동성애, 소아성애 등)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물론 유럽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다) 예를 들어, DSM과 같은 정신의학적 분류 체계와 '상호동의'를 전제로 한 법률적 인식은 출산 중심 성규범으로 구체화되어,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실천을 반생산적으로 격리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반쪽 짜리 해명으로만 느껴진다. 왜냐하면 왜 하필 (다른 '이상성욕'의 범주는 일단 제쳐두고 이야기하자) 사도-마조히즘을 비정상으로 규명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의학적, 법률적 사조가 막연하게 역사적 축적의 총체적 산물로서 가학-피학 메커니즘을 비정상으로 규정했다는 속편한 해명에 불과해 보인다.


그렇다면 도덕적 금기나 문화적 타자성보다 더 그럴듯한 해명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해보면 어떨까?


'과연 이상성욕이 이상(異常)으로 규정되지 않았다면 동질의 쾌락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왜 하필 특정한 이상성욕의 범주가 비정상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비켜가는 답변이긴 하지만, 역사적 임의성을 지닌 이상성욕이라는 규정이 사실은 그 쾌락의 조건이 되는 건 아닐까? 즉, 어떤 욕망은 금지되고 나서야 비로소 욕망될 수 있는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금지되지 않은 욕망은 낯설 만큼 평범하고, 허락된 쾌락은 때로 흥미롭지 않다. 이런 아이러니는 단순한 도착이 아니라, 욕망 자체의 구조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욕망은 결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라는 사회적 기표에 의해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며, 바로 그 금지의 체계가 어떤 행위를 ‘비정상’이라 명명할 때 그 비정상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형태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 점에서 사도-마조히즘은 이상한 성적 취향이라기보다, 금지와 권력의 언어가 가장 정직하게 드러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목을 조르는 행위, 맞거나 채찍질을 당하는 행위는 단지 육체의 자극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의 권력 역학을 성애의 언어로 치환한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은 '나를 지배하라', '나를 굴복시켜라'는 명령을 통해 스스로 주체성을 확인하려는 행위일 수도 있다.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굴복'을 욕망하는 이 역설은 단지 병리학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더 나아가면, 어떤 성적 취향이 금기라는 이유로 쾌락을 촉발한다면, 그 취향은 언제나 사회적 금지체계에 기생하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쾌락 자체가 순수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쾌락을 느끼는 와중에도, 사실상 사회가 부여한 위반감과 죄책감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완전히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 쾌락을 망가뜨릴 가능성도 있다.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주장하듯, 권력은 억압만이 아니라 생산도 한다. 섹스 담론이 억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성에 대해 말하라고, 고백하라고, 진실을 드러내라고 사회가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쾌락의 구조, 새로운 이상성욕들이 생산되어 왔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의 침묵, 예술가들의 무표정은 단지 숨기기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 고백이 권력에 포섭되는 것을 경계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말이기를 멈추고, 사회의 문법 안에서 분류되고 규율되기 시작한다. 자크 데리다가 궁금해 했던 '그들이 대답하지 않으려는 질문'은, 그래서 단지 비밀스럽고 음란한 사생활의 영역이 아니라, 주체가 사회에 의해 해명되고 구성되는 가장 민감한 지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나 유명인사의 성생활을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사적인 취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권력과 욕망, 금기와 진실, 쾌락과 고통의 언어를 살아내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생활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사람의 욕망 지도를, 더 나아가 그가 그리는 세계의 구조를 해독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말하지 않는 욕망이 말해지는 진실보다 더 진리에 가깝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여전히 욕망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라깡이 말했던 '성관계는 없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는, 우리가 더 큰 쾌락을 산출하는 성관계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말했던 실재(réel)가 순전히 형식적 범주에 머무르는 것처럼, 금기가 설정되어야만 우리의 욕망이 움직인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만약 사실이 이러하다면, 임의의 금기가 있어야 그 너머를 욕망할 수 있다는 나름 동시대 사조의 결론을 재확인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셈이다.


다시 아까 피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모든 욕망이 금기로 추동된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이상성욕을 포함한) 섹스가 그 금기의 극단점에 위치해야 하는가? 섹스는 단지 금기시될 뿐만 아니라 금기 중의 금기다. 특히 '존경받는' 인물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에 대한 나의 해명을 투박하게 늘어놓자면 이렇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어떤 권위자(철학자, 예술가, 정치인, 연예인 등)권력은 가시적이고, 제도적이며, 언어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섹스는 그 권력의 최전선과 내밀한 공간이 중첩된다. 욕망이 교차하고 동의와 복종이 뒤섞이는 순간, 그 속에서 드러나는 힘은 가시적 권력의 틈바구니를 파고드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말하지 않는 영역으로 묶고 금기의 울타리를 둘러놓는다. 권력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진자 운동을 블랙박스 속으로 밀어넣고, 바깥에서만 보고 싶어 한다. 누군가의 성생활이 드러나면, 우리는 그 개인의 권력 구조를 해석하게 된다. 섹스는 권력의 완급 조절 장치로 작동하는데, 이때 이 권력 장치가 노출되면, 해당 철학자 또는 공인이 표방했던 규범 체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둘째로,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이자, 욕망을 개념으로 환원하는 장치다. 하지만 섹스는 언어로 포착되기 전의 신체적 리듬과 음향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섹스에 대해 말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 체험을 추상화하고, 순화하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어로 전환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 과정은 곧 '무엇이 적절한지'를 따지는 정치적 결정이 함께 이행되는 지점이다. 너무 노골적이거나 이상성욕처럼 변칙적인 욕망이 섞이면, 그 언어는 ‘음란한 것’이 되며, 다시 표현 불가능한 금기의 언어가 된다.


결국 우리는 섹스를 이야기함으로써 언어의 규범을 비껴나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말해도 안전한 섹스만을 허용한다. 이는 곧 언어가 욕망을 다시 컨트롤하는 장치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마지막으로, 낭만화되고 이상화된 사랑-이상화된 파트너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의 소논문, 『나르시시즘 입문』을 보라-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경계심은 늘상 있어 왔다. 우리는 사랑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싶어 한다. 영화, 소설, 노래는 언제나 사랑을 이상화한다.


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현기증을 포함한 육체적, 감정적, 그리고 문화적 복합체다. 사랑과 쾌락이 섞이고, 불안과 애착이 합쳐지며, 동시에 욕망의 그림자가 늘 따라온다. 그래서 섹스를 이야기하려는 순간,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마법적 서사로부터 단숨에 일상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의 지대로 내려온다.


즉, 섹스를 입에 담는 순간, 사랑은 더 이상 아름답고 가식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과 쾌락, 상처와 두려움이 뒤섞인 진짜 관계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런 진짜 사랑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너무 복잡하고 두려워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논한다고 하며 섹스를 언급하지 않는 방식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섹스를 왜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어떤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가, 어떤 욕망을 인정하지 않으며 살아가는가, 어떤 관계의 진실을 꺼려하며 살아가는가를 묻는 일이 된다. 그 금기와 억압의 역사는 타자성의 깊은 개입 아래, 오직금지된 방식으로써만 현생을 지탱하기에, 이를 솔직히 고백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요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가장 감추고 싶었던 무엇을 커밍아웃당하는 셈이다. 동시에 금기가 해체된다는 것은 곧 내 인생을 지탱해온 욕망의 구조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잘 가, 가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