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알랭 말레(1987), 프로이트 대의학교
다음은 프랑스의 프로이트 대의학교(École de la Cause freudienne)에서 1987년 자끄 알랭 밀레(J.-A. Miller)의 에세이, <도발된 사유의 다섯 변주Cinq variations sur l’élaboration provoquée>의 일부를 발췌해 포스트한 글이다.
원문출처 : https://www.causefreudienne.org/textes-fondamentaux/cinq-variations-sur-lelaboration-provoquee/
왜 어떤 꺅텔(cartel)은 생산적인 기쁨으로 물들여지는가 하면, 다른 꺅텔은 위기에 빠져드는가? 자크-알랭 밀레는 경험에서 출발하여, ‘더하기 하나(plus-un)’의 예술을 위치시킨다. 그것은 아는 자로서의 주인이 아니고, 학자도 아니며, 꺅텔 안에서 말뚝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분석가도 아니다. 오히려 질문들을 지닌 분열된 주체로서, 일하는 벌떼 속의 꿀벌과 같다.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꺅텔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도록 하는 힘의 선들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된다.
어떤 ’élaboration(사유의 전개)도 항상 도발이다. 만약 사유에의 도발이 있다면, 그것은 일에의 소명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게으름에의 소명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끄 알랭 밀레
내가 이해하는 방식에서, 더하기 하나(plus-un)는 도발의 주체여야 한다. 그는 분명히 일정한 지휘의 부담(charge de direction)을 지닌다. 그리고 나는 그를 행위자의 자리에 두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담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여기에는 그를 주인으로서, 심지어 일하는-주인(maître-au-travail)으로 만들려는 경사가 있다. 실제로 종종 더하기 하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요청이 들어오곤 한다. 문제는, 주인으로서라면, 그는 이미 존재하는 앎만을 일하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상징계 바깥의 것(hors-symbolique), 즉 잠정적으로 말하자면 대상 a뿐이다.
실제로, 꺅텔이 끝날 때 “우리가 한 것을 증언할 수 없다”라는 결과에 도달한다면 – 많은 꺅텔이 이 지점에 도달한다고 나는 알고 있다 – 그것은 출발부터 주인의 위치가 남아 있었고, 그것이 제거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징후라 생각된다. 나는 이런 무능(증언 불가)의 사실을 결코 훌륭한 꺅텔의 증거로 보지 않는다.
만약 꺅텔이 분석가를 공동참여자로 받아들이고, 그 분석가가 그 지위에만 머무른다면, 결과는 뻔하다: 참가자들은 헛소리를 한다(déconnent). 이것은 분석가 담화의 구조가 꺅텔에 이식된 것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몇몇 주인-기표의 폭로에 머무를 뿐이며, 나는 그것이 매우 빈약하다고 본다.
만약 꺅텔이, 이미 구성된 지식에서 출발해 그것을 더하기 하나에게서 습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 알려진 꺅텔의 위기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이는, 지휘의 자리에 이미 완결된 앎, 즉 총합된 지식(savoir-en-somme)을 놓았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 경험에 가장 잘 부합하는 꺅텔의 구조는, 히스테리 담화의 구조이다. -자끄 알랭 밀레
하나의 지식의 결과는 오직 더하기 하나(plus-un)를 ⒮의 위치에 둘 때에만 얻어진다. 따라서 나는 꺅텔의 구조로 히스테리 담화를 제안한다. 라깡이 “히스테리 담화는 거의 과학 담화와 같다”고 말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만약 내가 더하기 하나의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소크라테스를 택할 것이다. 그는 대화자들에게서 끊임없이 사유와 전개를 ‘도발’해냈다는 점 때문에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우리가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곧 도발된 전개들인 것이다.
더하기 하나는 물음표들을 가지고 와야 한다.그리고, 어떤 히스테리적 주체가 내게 말해주었듯,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맡은 탁월한 기능이라고 자랑했던 바, “머릿속에 구멍을 뚫는 것(faire des trous dans les têtes)”이다.
이는 곧 일하게 만드는 주인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아는 자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분석가로서 꺅텔에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식을 탄생시키는 도발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구조 속에서 집단적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바로 히스테리 담화이다. 히스테리적 전염(épidémies hystériques)이라는 것은 명백히 집단적 전개의 현상이다.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다: 말한 자가 있지만, 또 그 말을 하게 만든 자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챈 자도 있다.
요약하면, 꺅텔의 히스테리를 더 많이 가꾸면 가꿀수록, 전개는 더 집단화된다.
지식의 생산은, 노동자가 주체적 효과에 걸려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 주체적 효과는 자기 자리에 국한되어야 한다. -자끄 알랭 밀레
더하기 하나(plus-un)의 과제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장작을 하라(faire la bûche)’고 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꺅텔의 한 구성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더하기 하나는 자신을 소진시켜 plus-un의 기능을 구현할 필요가 없다.꺅텔의 주체가 되는 것은 더하기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그에게는 꺅텔 안에 주체적 효과(effet de sujet)를 삽입하고, 주체의 분열(division subjective)을 자신에게 떠맡는 일이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plus-un이라는 용어를 moins-un(마이너스 하나)라는 말로 밝히고 싶다. 즉, 더하기 하나는 꺅텔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완전하게(decompléter) 만드는 것이다.그는 꺅텔에 속해야 하고, 그 속에서 ‘결여의 기능’으로만 자리할 수 있다.
논리가 지시하는 바는 이렇다. 앎의 생산은 노동자가 주체적 효과에 짓눌리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주인-기표의 폭로만을 반복할 뿐이다. 주체적 효과는 자기 자리에 국한되어야 하며, 더하기 하나가 그것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이들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흔적(trait propre)을 가지고 꺅텔에 들어와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자끄 알랭 밀레
이 벌떼는, 각자가 ‘그럴 자격’을 가지고 거기에 속해 있을 때비로소 잘 형성된다. 즉, 각자가 자신의 ‘자격(ès qualités)’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다. 이 논리에서 꺅텔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결여(manque-à-être)가 아니라 자신의 표징(insignes)을 바탕으로 작업해야 한다.
따라서 더하기 하나의 역할은, 단지 꺅텔 안에서 주체적 효과의 출현을 이끌어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꺅텔의 구성원들이 S1(주인-기표)의 지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더하기 하나 자신도 꺅텔의 구성원으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즉, 꺅텔에서 일하는 것은 주인-기표들이지, ‘안다고 가정된 주체’도 아니고, 박식한 학자도 아니다.
더하기 하나의 기능은, 각 구성원이 자기 고유의 흔적(trait propre)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바로 ‘팀을 만드는 자’이다. 내가 앞서 ‘향연(Le Banquet)’을 언급했지만, 더 적절한 비유는 ‘부케(bouquet, 꽃다발)’를 모으는 것이다. 즉, 벌떼의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꺅텔에서 영감을 받은 세미나의 올바른 실천 역시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각자가 자기 고유의 흔적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앎을 생산하는 작업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이다.
[…]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실제로 일하는 유일한 실체는, 엄밀히 식별된 요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