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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석 Feb 01. 2021

환상의 짝꿍, 스타트업

종로, 사원증, 점심 시간, 그리고 청계천.

# 환상


회사는 종로구에 위치했다. 몇 십층짜리 건물에 한 층을 임대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최근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듯 하다. 앞서 말한 인터뷰뿐 만 아니라, 많은 것들이 은행과는 달랐다. 사원증이라는게 있어서 출근 도장을 전자 명부로 체크할 수 있었다. 사원증을 찍어야 문이 열렸는데, TV에서만 보던 삶이 시작된 듯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건물 앞에 청게천도 흐르고 있었고, 정해진 점심시간이 존재했으며 점심을 먹은 뒤에는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도 있었다.


종로. 사원증. 점심 시간. 청계천. 모두 은행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환상적이었다.


은행에서는.. 허름한 지하철역 앞에 있는 지점에 매일 뒷문으로 출근했다. 40분이라는 짧은 점심 시간이, 이마저도 같은 창구의 직원이 휴가를 가게 되면 30분으로 줄어들었다. 청계천은 커녕 은행 건물에 직원 식당이 있어서 건물 밖을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해가 뜨기 전에 출근했고, 두꺼운 외벽의 지점에서 전쟁같은 하루를 보낸 뒤에 해가 지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가끔 해를 볼 수는 있었는데, 지인이 나를 보겠다고 지점까지 찾아와줘야 옆 창구 차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간신히 밥을 먹으러 허겁지겁 다녀오는 그 정도. (물론, 은행마다, 같은 은행이어도 지점마다 여건은 상이하며, 그 때와 지금의 은행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나의 부서와 내가 앉을 자리는 마치 영화 <인턴>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직원과 직원 사이의 간격은 좁았고, 책상 위에는 노트북만 놓여져 있었다. 퇴근 시에는 노트북만 놓여져 있도록 해야 했다. 업무에 필요한 것만 갖추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까. 어느 자리에 위치하더라도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까.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당시 직원의 설명은 그다지 납득되진 않았다. 그래도 길쭉한 테이블에 자리마다 정렬된 노트북을 보며 공허함보다는 깔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영화 <인턴>의 한 장면. 직원들의 일하는 모습.


사무실의 가운데 즈음에는 전 직원 회의공간 겸 카페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늘 아침마다 경영지원팀에서 탄산수와 각종 음료를 채워 넣어놓았다. 적어도 술을 마신 다음 날 갈증을 느낄 일은 없어보였다. 한 캔을 마시고 곧장 냉장고로 가서 두 번째 캔을 집는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오묘한 미소를 주고받곤 했다. 냉장고 앞에는 큰 탁자에는 커피 머신도 있었는데, 캡슐을 사 먹을 때마다 양심적으로, 자발적으로 100원씩 넣어야 했다. 매달 전체 회의에서 캡슐의 숫자와 정산 금액이 맞는지 알려주었는데, 나름 소소하게 재미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 공간을 가로질러 반댗편으로 지나면 개발팀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개발팀이 전체 인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크기도 상당하다. 회사에서 다루는 분야는 기존의 것이었지만, 정체성은 여기에 IT를 접목한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에 시스템 관리는 굉장히 중요했다. 개발자들이 좀비같은 옷을 입고 좀비처럼 걸어다니는 그 공간에는 아마 한 번쯤 갔을 것이다.


입사날로부터 나는 약 일주일 동안 OJT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 이 회사에서 담당할 업무는 신규고객 유치, 기존고객 관리 등이었다. 사업부라고는 하지만 영업부에 가까웠고, 신규고객 유치라고는 했지만 아웃바운드 영업은 없었고 들어오는 문의를 처리하기 바빴다. 은행도 사실상 인바운드 영업이기 때문에 인바운드 영업의 생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처절함'이 부족하고, 대뜸 남의 사무실을 방문해서 입을 털어낼 '실력'과 '뻔뻔함'이 성장하는 속도가 느리다. 몇 명 안되는 스타트업 주제에 인바운드 영업일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 선점 효과에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 세컨드와의 격차 비율도 적당하고 안정적이었다.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시장은 누가 먼저 선점과 독점의 과정을 차지하느냐가 관건이다. 몇몇 창업자들이 쏘아올린 공이 기가 막히게 홈런을 치면서 당시 회사는 쟁쟁한 투자회사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투자받았고, 굉장한 호황을 이루었다. 수 십년 동안 온라인 플랫폼 없이 일해온 많은 고객들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문을 두들기고 상품을 구매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상당한 수의 고객들이.

아마 나는 그 고객들을 감당하기 위해 채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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