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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석 Feb 10. 2021

별로

직업에 대하여 - 꿈과 현실②

사실 그 때까지만해도 그 연봉 액수가 적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확신은 오히려 원장이 만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4년제 나온 사회초년생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할게 뻔할 것이라는 노파심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 듯 하다.


"지금 연봉이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 남자고, 나중에 결혼도 해야 하는데 그 액수로는 어림도 없죠, 그래도 경력을 쌓고 열심히 하다보면 오를 겁니다. 화이팅하세요."


어린 나이의 나는 그 말을 정말 그렇게 해야겠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그 말이,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 같은 화이팅하라는 그 말이 얼마나 희망고문이고 무책임한 말인가라는 생각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질수록 확고해졌다.


그리고 출근 첫날이 다가왔다. 부원장이 자신에게 간단히 일정을 안내받고 업무를 시작하게 될거라고 알려주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학생과 수업이 배정되지는 않았다. 우선 나는 3개월 동안 월급의 80%를 지급받는 수습으로 근무해야 했다. 그동안에는 수업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원 교재에 주로 이용된 도서를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이따금씩 다른 선생님들 수업에 참관해야 했다. 별로였다. 꼬맹이들이 읽는 교재를 몇날 며칠동안 반복적으로 읽어보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읽는 내내 고통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바로 업무를 맡기기에는 신입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게 서지 않아서, 학원의 입장에서는 신입에게 학원의 업무 분위기를 확인시키고 앞으로의 근무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지켜보려는 시간을 가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꼬맹이들의 책을 보다가 뛰쳐나간 수습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전히 별로였다.


부원장의 마지막 당부는 오래 근무하신 선생님들이 많아서 학원에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젊은 선생님들이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것이지만, 젊은 직원이 입사하게 되면 이 고리타분한 멘트는 늘상 듣게 된다. 그런데, 그때 부원장의 멘트는 왠지 모르게 진심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진심이 담겨있었다. 별로였다ㅋㅋ.


다른 선생님들과 사무실을 공유하면서 곁눈질로 어떤 업무를 맡는지 알 수 있었다. 초중생들이 대부분이어서 학부모와 전화 통화가 상당히 많았다. 상담이 끝나면 수업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하고, 다시 상담을 하며 근무 시간이 흘러가는 듯 했다. 학부모 상담은 다분히 지루한 업무의 연속이었다. 애가 어떻다며, 성적이 어떠냐며 이런 대화들을 나누는게 보통이었다. 업무를 하면서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감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도 별로였다.


문제는 수업이었다. 그 따분함은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은 학원에서 만들어진 자료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나는 선생님들이 동일한 소속이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수업 자료로 수업해야 하는 시스템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 선생님은 수업이 훌륭했고, 어느 선생님은 최악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교육의 질은 무조건 떨어지고, 학원이 망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 문제는 첫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원장과 부원장을 포함해서 회의가 진행되는데, 첫 안건은 수업 자료 제작에 관한 것이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해에 쓰던 자료를 그대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의견이 과반을 이루었는데, 아마 회의 시작 전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별로였다.


부원장이 나에게 말했던 분위기 쇄신은 이를 염두해두고 있던 것이었다. 나와 나보다 5살 많은 남자 선생은 그 해에 채용된 신입이었다. 남자만 채용한 것도 의도적이었다. 오래 일한 여자 선생들은 대부분 근속년수가 5-8년 사이였고, 대부분 아이들 엄마여서 새로운 자료를 제작하기 위해 야근하는걸 꺼려했다. 기존의 자료와 수업 방식에 큰 문제가 없으면 변화를 꺼려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별로였다-_


부원장이 수업 참관과 수업 자료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사실 수업 참관에 대해 선생들 앞에서 내가 논평한다는 건 굉장한 부담이다. 같은 연차의 선생들끼리도 서로의 수업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은 상당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고작 들어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파랗게 어린 신입이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수업 피드백을 전한다는 것은 좋게 보면 새로운 시선으로 창의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있지만, 나쁘게 보면 '니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기 쉽다.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을 것으로 안다. 우선 수업 자료의 일부 내용을 지적했고, 수업 방식이 학생들의 사고력 신장에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췄다. 좋은 의견 고맙다는 형식적인 대답을 들은 뒤 회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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