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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21. 2023

50년, 그 노동의 역사

#7 노동사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동분 삶을 다루자면 노동사(勞動史)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짐 보따리 하나 싸 들고 동아책방 사장 집에 들어간 게 14살 때다. 동분 나이 올해 64살이다. 50년이 넘는다. 그 세월, 수많은 직업과 현장을 거쳐 오늘의 청소노동자에 이르렀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 형제를 먹였다. 결혼해서는 송일영과 함께 두 아들을 키웠다. 시작은 공장이었다.      

           





새하얀 솜을 붉게 물들이다

공장[1976~1981]  


“동아책방에서 나오고 얼마 안 됐을 때니까, 16살 때지. 동네 친구 중에 양순이라고 있었어. 걔네 이모가 대구에 살았어. 지금은 어떤가 모르겄는데, 그때는 대구가 섬유도시였거든. 섬유공장도 다 대구에 있었지. 그래가지구 양순이 이모 소개로 대구에 있는 코딱지만한 직물 공장에 들어가게 된 거여. 양순이랑 둘이서 짐 보따리 하나씩 들고 기차 타고 대구 내려가는데 눈물이 또로록 흐르더라? 동아책방이 사실 정식적인 직장은 아니었잖어. 그냥 용돈 좀 받고 잔심부름이나 했던 거지. 그러다가 처~음으로 취직이라는 걸 하게 된 거니까. 더군다나 신탄진 촌년이 대구까지 가게 됐으니, 어린 마음에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되고 여러 가지루다가 복잡한 마음이었던 거지 뭐.”      


대구 직물 공장은 모든 게 최악이었다. 그때가 1976년이었으니 비단 그 공장만 그랬을까만, 16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주야 2교대로 12시간씩 일 시켜가면서 월급으로는 겨우 9,000원을 줬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및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1976년, 쌀 한 가마니(80kg)에 약 26,000원이었다. 세 달 월급을 모아야 겨우 쌀 한 가마니 사는 수준이었다. 2023년 7월 기준, 쌀 한 가마니에 188,948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당시 동분 월급은 65,000원의 값어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2023년 최저 월급이 2,010,580원이니,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소년‧소녀공들이 얼마나 심각한 노동 착취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아름다운전태일, 1983)에 따르면, 1970년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시다’가 월급으로 1,800~3,000원, 미싱보조가 3,000~15,000원, 미싱사가 7,000~25,000원, 재단사가 15,000~30,000원 받았다. 당시 재단사 4년차였던 전태일 열사 월급이 23,000원이었다.    

  

그나마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숙소도 형편없었다. 공장 옆 간이건물(아마도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한다.)의 비좁은 방에서 도대체 몇 명이나 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제일 큰 골치는 수돗물이었어. 물이나 좀 콸콸 나와야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을 거 아녀. 숙소에서 지내는 애들은 잔뜩인데, 수돗물이 무슨 애기 오줌처럼 졸졸졸 나오니 아침마다 아주 전쟁이여, 전쟁. 한 번 씻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니까, 다들 제대로 씻지를 못하는 겨. 다른 건 어떻게든 참겠는데, 수돗물 때문에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 그래가지구 추석 때 고향 갔다 온다고 집에 와서는 다시 안 갔지. 집에 며칠 있어 보니까, 아휴~! 못 가겠더라고. 그게 첫 직장이었어. 한 6개월 다녔나? 호호호.”     


동분의 두 번째 직장은 그 이름도 유명한 ‘펭귄표’ 통조림 공장이었다. 대전에서는 1973년부터 대덕구 대화동에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펭귄표 통조림 공장도 대화동에 있었다.        

 

펭귄표 통조림 모태는 대한종합식품이다. 1966년 정부는 불량식품 근절 및 베트남 참전 군인 식량 보급을 목적으로 통조림 사업을 시작했다. 1968년 구룡포에서 공장을 가동하며 꽁치 통조림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74년 벽산그룹이 인수해 민영화한 뒤 1980년대 후반까지 복숭아 통조림 등으로 전성기를 누렸다.(나무위키 참조.)      


“대구에서 와 가지고 놀고 있었지. 그때 니네 큰외삼촌이 먼저 펭귄에 다니고 있었거든. 펭귄이 꽁치 통조림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때는 복숭아 통조림도 인기가 많았어.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니까 복숭아 통조림이 무쟈게 팔렸나 어쨌나 일손이 부족했던 모양이더라고. 니네 큰외삼촌이 집에서 놀지 말고 공장 와서 같이 일이나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따라간 거지.”     


동분이 기억하는 당시의 복숭아 통조림 제조 과정은 이랬다. 복숭아를 깨끗이 헹군 후 뜨거운 물에 푹 삶는다. 여기까진 기계가 한다. 삶은 복숭아가 레일 따라 쭉 오면 줄줄이 선 작업자들이 잽싸게 껍질을 벗긴다. 껍질 벗긴 복숭아는 다시 레일을 따라간다. 그곳에 또 줄줄이 선 작업자들이 복숭아를 반으로 가르고 씨를 뺀다. 반으로 쪼갠 복숭아는 레일 끝으로 가, 눅진한 설탕물과 함께 통조림 통에 담긴다. 동분은 여기서 여름 내내 복숭아 껍질을 벗겼다. 그럭저럭 일이 할 만했다. 계속 다녀보려고 마음먹은 참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름이 끝나 물량이 줄었으니,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했다.      


“얘는! 그때 정규직이 어딨냐? 일 있으면 하는 거고, 일 없어서 그만 나오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거지. 그때는 다 그랬어. 주먹구구식이었지.”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동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17살 동분은 또다시 공장 문을 두드렸다. 섬유공장이었다. 동분은 그 공장에서 딱 1년 일했다. 1977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엄마가 다닌 공장은 실 뽑는 공장이었어. 매일 아침마다 솜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솜을 우리 공장으로 가져다줬어. 그 솜을 한 뭉탱이씩 들어다가 기계에 넣고 탈~탈 터는 거여. 그럼 도톰한 실이 감겨서 나와. 그걸 다시 두 번째 기계에 넣으면 우리가 쓰는 가느다란 실이 되는 거여. 근데 니가 한 번 상상해 봐라. 기계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솜을 탈탈 털어 제끼는데, 그때 무슨 환기시설이 제대로 있었겄냐, 요즘처럼 방진마스크 같은 게 있었겄냐. 쉬는 시간도 없이, 날이면 날마다 12시간씩 기계 앞에 서 있었으니 먼지를 얼마나 많이 먹었겄어. 그 기계 앞에 10분만 서 있어도 머리에 뽀얀 먼지가 가득 앉을 정도였는데.”     


그 공장에 다닌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솜 뭉탱이를 한가득 안아 나르는데, 새하얀 솜이 붉게 물들었다. 피였다. 동분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처음엔 보름에 한 번,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 나중엔 하루가 멀다고 툭하면 코피가 터지는 겨. 그리고 처음엔 코피가 터져도 금방 멈추더니, 나중엔 코피가 한 번 터지면 멈추질 않어. 모르긴 몰라도 그 공장 다니면서 매일매일 한 다라이씩은 코피를 쏟은 거 같어. 엄마 생각에, 태생적으로 코가 약한 데다가 열악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바람에 코가 망가져 버린 거 같어. 그때라도 병원 가서 제대로 치료받았으면 이날 이때까지 고생은 안 할 텐데, 그때는 병원 갈 생각도 못 했지. 그래가지고 엄마가 지금도 비염으로 무쟈게 고생하잖냐. 먼지 조금만 날리면 재채기하고 콧물 줄줄 흐르고. 아휴~ 말도 말어.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몰라. 얼마나 괴롭다고.”     


그런 시절이었다. 미련할 정도로 참아야만 했던 시절. ‘매일매일 한 다라이씩’ 코피를 쏟아도, 그리하여 새하얀 솜을 시뻘겋게 물들일지라도, 가족 먹여 살리자면 꾹 참고 먼지 ‘구뎅이’로 뛰어들 수밖에 없던 시절. 동분은 그렇게 21살까지, 방직공장과 제화공장 등을 전전했다. 동분의 어머니는, 동분 월급날마다 잊지 않고 기숙사로 찾아왔다. 


     


1978년 18살의 동분(오른쪽). 같이 공장 다니던 친구와. 


       




길바닥에 좌판을 펴다 

이불장사[1996~2004]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1996년 1월로 간다. 동분 나이 36살이었다. 22살에 결혼해 36살까지, 5년의 시집살이와 포장마차 장사, 갖가지 부업과 고깃집 불판 닦기 등 고난의 세월이 없지 않았으나, 우선 넘어가자.


당시 송일영은 개인택시를 몰았다.. 1991년 개인택시를 받았다. 그날은 송일영 지인 결혼식이었다. 함께 결혼식 다녀와 쉬려는데, 송일영이 출근하겠다며 준비를 하더라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니네 아빠 성실한 것 빼면 볼 것도 없는 양반 아니냐.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하루 쉬지, 굳이 나가겠다고 하더라고. 하루 공친 데다가 축의금도 솔찬이 깨졌으니, 니네 아빠 딴엔 다만 몇 푼이라도 벌어와야겄다 싶었나벼. 그때 끝까지 말렸어야 되는데…….”     


택시 몰고 나간 지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경찰서였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진 맞은편 자동차와 정면충돌한 후, 이 사고를 피하지 못한 뒤차들이 줄줄이 박아 5중 추돌 대형 교통사고가 났던 것.      


“전화 받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갔더니만,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어. 차들이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나뒹구는데 진짜 끔찍하데? 부랴부랴 니네 아빠 차를 봤더니 앞뒤로 아주 박살이 나가지고 무슨 종이 구겨놓은 것 같더라고. 아휴, 특히나 운전석 쪽 밑으로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겨. 그 구멍 보는 순간, 니네 아빠 두 다리가 아작 나도 났겠구나 싶더라고. 니네 아빠는 벌써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해서, 또 헐레벌떡 병원으로 가는데 진짜루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 니네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 신세 조졌구나. 우리 가족 어떻게 먹고사나. 그 생각만 했다니까? 병원 가서 니네 아빠 보자마자 다리부터 만져봤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다행히도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데? 그제야 휴우~ 하고 한숨 돌렸지.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거지. 정강이뼈 부러지고, 발가락 힘줄도 끊어졌지만, 어쨌든 두 다리는 건졌으니까. 그래도 그때 니네 아빠 병원에 몇 달이나 입원했었어.”  

    

송일영의 자부심이자, 유일한 재산이었던 개인택시 ‘로열프린스’는 폐차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송일영은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통상 개인택시 번호판이라고 한다.)를 3,950만 원에 팔아넘겼다. 그 돈으로 이불세일매장을 차렸다.      


“니네 큰아빠가 못 배워서 그렇지, 머리가 비상한 양반이거든? 그래가지구 그 당시에 어디서 땡처리하는 싸구려 이불을 잔뜩 받아다가 창고 같은 매장 한두 달씩 빌려서 후려치기 하는 식으로 제법 돈을 만졌단 말여. 니네 아빠는 그 나이 먹도록 운전대 말고는 잡아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잖냐. 근데 그렇게 큰 사고가 났으니, 더 이상 운전은 하기 싫었겄지. 차도 폐차시켰고. 그런 데다가 목돈도 생겼겠다, 니네 큰아빠 장사하는 거 보니까 할 만해 보였나 보지? 니네 큰아빠처럼 이불세일매장을 한번 해보자고 그러더라? 그래서 시작한 겨. 니네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신탄진 출신이잖어. 보고 잴 것도 없이 신탄진에다가 매장 차렸지. 이불은 당연히 니네 큰아빠한테 받아왔었고.”     


그래도 처음엔 장사가 제법 됐다. IMF 터지기 전이어서 아직은 경기가 괜찮기도 했고, 홈쇼핑도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은 개념조차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불 사려면 오프라인 매장 가서 사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질은 좀 떨어져도 시세보다 훨씬 싼 ‘땡처리’ 이불은 불티나게 팔렸다. 대전 곳곳 다니며 짧게는 한두 달, 장사 좀 되는 동네에선 서너 달씩 매장 옮겨가며 이불을 팔았다.      


“그땐 진짜루 돈 버는 재미가 있었어. 한 번은 유성시장 들어가는 길목에다가 매장 얻어서 장사했었는데, 거기는 장날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오니까 괜찮게 팔리더라고. 거기서는 한 넉 달 했을 겨. 그렇게 딱 1~2년 좋은 시절이었지. IMF 터지면서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홈쇼핑 나오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아예 이불을 안 사 가더라고. 당연한 거 아니냐? 홈쇼핑에서 좋은 이불을 그렇게 싸게 파는데 우리 같은 개인 장사꾼이 당해낼 수 있냐는 말이지.”     


우리나라 TV 홈쇼핑은 케이블 방송(1995년 3월 송출 시작)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최초의 TV 홈쇼핑은 1995년 8월이다. 홈쇼핑 문화가 익숙하지 않던 초기엔 판매실적이 저조했다. 홈쇼핑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한 건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편리한 구매 방식이 그제야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결과적으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 87%를 달성해 오늘과 같은 시장을 만들었다.(나무위키 참조.)      


그래도 미련이 남아 매장에서 2년을 더 버텼다. 그러는 사이, 바짝 벌었던 돈도 다 까먹었다. 마지막으로 매장에서 장사했던 때를 동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0년 1월이었고, 대전에선 더 이상 답이 없다 싶어 경기도 안양에 매장 얻은 직후였다.      


“그해 겨울에 얼마나 추웠나,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안 지나가. 대전에서 출퇴근할 수가 없으니까 매장 근처에 여관방 하나 잡아서 지냈거든. 그러니 경비는 경비대로 깨지지, 이불은 안 팔리지, 밥 사 먹는 돈이 아깝더라고. 매일 아침 겸 점심으로 니네 아빠랑 둘이 라면에 김치 넣고 팔팔 끓여서 대충 먹고 그랬다니까? 팔아보겄다고 2.5톤 탑차에 이불은 가득가득 실어다가 풀어놨는데, 이건 또 다 어떡하나 싶더라고. 그 썰렁한 매장에 요만한 난로 하나 갖다 놓고 죙일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진짜 한숨만 푹푹 나오더라. 원래는 한 달 장사하려고 갔던 건데, 거짓말 안 보태고 보름 동안 이불 10장도 못 판 거 같어. 그래서 니네 아빠한테 얘기했지. 주성 아빠, 접자. 이제 가게에서는 못 하겄다.”     


그렇게 길바닥으로 나왔다. 2.5톤 탑차에 이불 싣고 전국 방방곡곡 시골을 누볐다. 이 역시도 시아주버니 도움을 받았다.      


“니네 큰아빠는 벌써부터 세일매장 접고 시골로 다니기 시작했지. 아무리 홈쇼핑이다 인터넷 쇼핑몰이다 해도 시골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본 물건만 산다는 걸 니네 큰아빠는 진작에 알았던 겨. 아무튼 똑똑햐. 안목도 높고 장사 수완도 좋고. 가끔 너무 똑똑해서 탈이지만. 그래가지구 니네 큰아빠가 먼저 훑고 다닌 시골동네 찾아 댕기면서 길바닥에서 팔기 시작한 겨. 안 다닌 데가 없지. 영덕, 청송, 의성, 군위, 관촌, 순창, 평창, 태백, 강릉, 논산, 부여. 그때 뭐 스마트폰이 있냐 네비가 있냐. 아침에 니네 큰아빠랑 통화해가지고 ‘관촌 읍내 가면 무슨무슨 다방 있는데, 거기 다방 사장한테 양해 구하고 그 앞에 이불 펴놓고 장사하면 좀 팔릴 거다.’ 그런 식으루 얘기 듣고 가는 거지. 너 기억 안 나냐? 너 중고등학교 때 외할머니가 맨날 우리 집 와 있었잖어. 그때가 그때여.”     


그때 동분과 송일영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다녔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분에게 “맨날 남편이랑 여행 다니는 기분 들어서 좋겠다.”고 했지만, 그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다. 길바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서러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까.      


“먹고 자는 게 제일 큰 문제였지. 대전에서 한두 시간 거리면 새벽에 좀 서두르면 되는데, 강원도나 경상도 쪽은 자동차 기름값에 대전 오가는 시간 생각하면 당일치기로 갈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보통 2박 3일 코스로 간단 말이여. 군위 갔다가 다음날 의성 갔다가, 그다음 날 영덕에서 장사하고 대전 오는 식으루. 근데 돈 벌러 간 사람이 어디 펜션이나 호텔에서 먹고잘 수 있냐? 그랬으면 누구 말마따나 여행 기분도 들고 했겄지. 맨날 경비 아낀다고 찜질방이나 싸구려 여관방에서 자고, 컵라면 먹어가며 길바닥에서 장사하는 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여행이었겄냐.”      


자리 차지하는 것도 늘 문제였다. 길바닥 장사라는 게 그렇다. 네 자리 내 자리가 따로 없다.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인근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장사해도 새벽 3~4시에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조금만 늦게 가도 이미 다른 장사꾼이 좌판을 폈다. 그놈의 자리 때문에 생판 모르는 장사꾼과 얼굴 붉히며 싸운 적도 많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곡성에서다.      


“곡성 시장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시장 가려면 무조건 그 다리를 건넌단 말여. 그래가지고 일찌감치 가서 자리를 잡았지. 쫌 있으려니까 계란 장수 아저씨가 오더라? 본토배기인데, 여기는 원래부터 자기 자리라는 겨. 니네 아빠가 가만있겄냐? 그 성질에? 먼저 맡으면 임자지,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딨냐고 두 팔을 막 걷어붙이는 겨. 분위기 보니까 그 계란 장수 아저씨랑 니네 아빠랑 크게 한판 붙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선 겨. 설마하니 여자한테 손찌검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나랑 말싸움 좀 하다가 열이 뻗쳤는지, 트럭 가서 계란을 두어 판 가져오더라? 그러더니 우리 장사하는 바닥에 홱~ 내팽개치는 겨. 난리가 났지. 계란 다 깨져서 여기저기 튀고, 껍데기 굴러 댕기고. 그러고는 슉 가더라고. 아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다 있다? 같은 길바닥 장사꾼끼리. 어쨌든 장사는 해야 하니까, 니네 아빠랑 휴지 갖다가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진 계란 대충 훑어내고 껍데기 주워 담는데, 진짜 서러워서 눈물이 뚝뚝 나더라고.”      


날씨도 늘 걱정이었다. 덥고 추운 거야 몸이 좀 고생스러워도 버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비든 눈이든 내려서 아예 장사를 안 갔으면 상관없는데, 비 소식 없어서 장사 갔다가 갑자기 쏟아질 때가 있었다.      


“그때가 2월 초였는데, 눈 온다는 예보도 없었어~! 그러니까 장사를 갔겄지. 근데 오전에 바람이 휭 한 번 불더니만 구름이 잔뜩 끼더라고. 그러고는 순식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 이불 위에 눈이 막 쌓이기 시작하는데, 아휴 나는 막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 이불이라는 게 비든 눈이든 한 번 젖으면 오염돼서 팔 수가 없잖어. 그러니까 정신없이 이불에 쌓인 눈 치워 가며, 눈물 훔쳐가며 차에 이불을 실었지.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녀. 한 번은 대전에서 장사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겨. 진짜 그날은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쏟아져서 이불 다 버렸지. 그래서 엄마가 장사 다닐 때 먹구름만 끼기 시작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떨렸었다니까? 그럴 때마다 ‘주성 아빠, 비 쏟아질 거 같어. 빨리 장사 접자.’ 막 그랬었지. 한 번은 겨울에 대관령으로 장사 갔었거든. 내가 미쳤지, 그 겨울에 대관령은 뭐 하러 갔나 몰라. 원래 대관령이 바람으로 유명한 동네잖어. 그날따라 바람이 무쟈게 불더라고. 등받이 베개 2인용 큰 거 있지?. 그게 막 날아가서 차 도로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하나 주워 오면 저쪽에서 이불이 막 날아다니고. 아휴, 길바닥 장사하면서 고생한 거 얘기하자면 끝도 없어. 두세 시간 거리로 장사 가서 개시(開市, 하루 중 처음으로, 또는 가게 문을 연 뒤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거래.)도 못하고 온 날도 허다하고. 시골 가면 꼭 읍내 건달들이 있거든? 그때 엄마가 40대 초반이었으니까, 완전 아줌마는 아니었잖어. 괜히 와가지고 엄마한테 건들건들 희롱하는 놈들도 많았어. 그럼 니네 아빠가 돈 만 원짜리 베개 하나씩 주면서 보내고. 그렇게 돈 벌어서 니들 먹여 살린 겨.”      


그랬어도 먹고사는 건 늘 빠듯했다. 누구는 “세금도 안 내고 월세도 없는 노점상 장사꾼들이 주말엔 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험담했지만, 그런 건 진짜 줄 서서 먹는 떡볶이나 호떡 포장마차 한두 곳 얘기였다. 동분처럼 공산품 파는 장사꾼들은 30% 마진으로 하루 10~20만 원, 많아야 30만 원 장사였다. 그러니 하루 벌이라고 해봐야 10만 원 안팎인 거고, 기름값, 식비, 여관비 같은 경비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왔다.      


“니네 형은 그때 군대에 있었으니까 걱정할 게 없는데, 문제는 너였지. 좀 있으면 대학 들어가고, 그러면 돈이 더 들어갈 텐데 뒷바라지 해줄 자신이 없더라고. 그래서 너 19살 때, 그러니까 니네 아빠랑 전국 떠돌면서 이불장사 4~5년 했을 무렵부터 니네 아빠 혼자 이불장사 하고, 엄마는 식당 다니기 시작했지.”    

  

안 그래도 답 안 나오는 이불 장사에 두 사람이나 붙어 있을 수 없었다. 동분은 2005년, 45살부터 이 식당 저 식당 떠돌며 김밥을 말고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1997년, 이불 세일 매장에서 장사하던 시절. 37살의 동분. 





퇴직금 10만 원 

야채장사[2008~2014]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2008년, 동분 나이 48살이었다. 이 식당 저 식당 떠돌다 마땅치 않아 관두고, 파출부로 부잣집 다니며 청소해주던 때였다.      


“이불 장사 다니면서 알게 된 노점상인들끼리 부부동반 계모임을 했었어. 그중에서 야채 언니가 남편이랑 아파트 장터 다녔었거든. 하루는 계모임에 갔더니만 직원 구한다고, 파출부 그만하고 자기들 따라다니면서 야채나 팔라고 하더라?”     


언니, 동생 하며 한 달에 한 번 만나 식사하던 야채 ‘언니’와 야채 ‘사장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장사야 물론 10년 가까이 했지만, 야채를 파는 건 당연히 처음이었다. 시작하고 며칠 좀 헤맸다. 매일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야채 가격도 헷갈리고, 때마다 신선도가 다른 야채는 판매하는 요령도 달랐다.      


“그랬더니만, ‘이불 장사를 그렇게 했으면서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팔어? 왜 이렇게 장사하는 게 어설퍼!!’ 하면서 면박을 팍 주는 거여. 그때 아차 싶더라고. 이래서 아는 사람이랑 같이 일하지 말라고 하는 건데. 원래부터 독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휴~ 그 정도로 까다롭고 지독한 사람인 줄은 몰랐지. 결과적으로 내가 그 언니 따라다니면서 7년 동안 야채 장사 했는데, 아무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실수하면 그렇게 사람을 면박하고, 소리 지르고, 짜증 부리고. 아휴. 직원이 나까지 둘이었는데, 내가 일하는 7년 동안 같이 일하는 직원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몰라. 장사 힘든 것보다도 그 언니 때문에 못 버티는 겨. 성질머리 때문에.”      


식사 시간도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씩 일 시키면서 간식 한 번 없이 점심 한 끼 딱 주는데, 그 점심이 가관이었다. 맛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동분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야채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집에 야채가 얼마나 흔하겄냐. 그 야채로 할 수 있는 요리는 또 얼마나 많고. 근데 매일 같이, 전날 저녁에 자기들이 집에서 끓여 먹고 남은 찌개를 싸가지고 오는 겨. 반찬은 딸랑 김치. 엄마도 살림하는 사람인데, 이게 오늘 끓인 찌개인지, 어제 끓여서 먹고 남은 찌개인지 구분 못하겄냐? 자기들이야 자기들이 먹다 남은 찌개니까 상관없겄지만, 우리 직원들한테는 아니잖어. 그게 개밥이지, 안 그러냐? 그러니까 맛의 문제가 아니라, 한마디로 쫀심이 상하는 겨. 그래도 어뜩하냐?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거 아녀. 한 번은 내 동생 현희가 나 장사하는 데 왔었거든? 마침 내가 밥을 먹고 있었단 말여. 그 밥 보더니 현희가 놀래더라. 언니는 어떻게 저런 걸 먹으면서 일하냐고. 내가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나, 눈시울을 다 붉히더라고. 아휴, 내가 민망해가지고.”     


그 7년 동안 동분은 썩어버린 아채처럼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 내 장사할 때와 남 장사 도와주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게 동분을 여러모로 지치게 했다. 똑같은 게 있다면 야채 장사 또한 길바닥 장사였다는 점. 아침저녁으로 야채를 트럭에서 내리고 올리는 것 또한 직원인 동분 몫이었다. 야채는 이불보다도 무거웠다.      


“그때 엄마 허리가 다 아작난 겨. 야채는 한 박스가 대부분 20kg이거든. 아침마다 그걸 차에서 다 내려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겄냐. 그런데다가 야채를 바닥에 쭉 진열해 놓고 팔았단 말여. 그러니 하루에도 허리를 수백 수천 번씩 숙일 거 아녀. 너도 그 야채 아줌마 본 적 있지? 엄마랑 겨우 5살 차이인데 그 언니 허리는 완전 굽었잖어. 그게 평생 야채 장사해서 그렇게 된 거라니까? 나도 야채 장사 계속했으면 그 언니처럼 됐을 겨 아마.”     


하루 12시간, 일주일에 6일씩 일해서 동분이 받은 월급은 110만 원. 그만둔 게 2014년이니까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그 당시에도 110만 원 받는다고 하면 다들 놀랐다. 어떻게 겨우 그 돈 받고 일하느냐면서.      


참고로 2014년 최저시급은 5,210원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동분 월급을 계산해보면 최소 162만5,520원(5,210원X12시간X26일)은 받았어야 했다. 동분은 7년 동안 최저시급에도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았다. 매우 당연한 얘기지만, 근로계약서 없었고, 북리후생 및 연차수당, 주휴수당 등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개밥’ 같은 점심 한 끼와 월급 110만 원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분이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건 월급이 적어서도,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두 아들이 장성했고, 하여 그전보다 돈 들어갈 때가 줄었다. 결정적으로 송일영이 늙어버렸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야채 장사하고 있었을 거라며, 동분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분은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어코 참아내는 사람.      


“엄마 야채 장사 그만둔 게 니네 아빠 딱 60살 됐을 때여. 이미 그전부터 여기저기 아프다고, 맨날 죽는소리를 하긴 했었지. 늙어서 혼자 이불 장사 다니려니까 힘도 들고, 챙겨주는 사람 없으니까 적적하기도 할 테고. 옆에서 마누라가 좀 챙겨줬으면 싶었던 겨. 그런데다가 그 몇 년 전에 니네 아빠가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졌었잖어.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르는 양반인데, 혼자 장사 다니다가 쓰러지기라도 해봐.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그리고 니네 아빠가 언제 때 됐다고 밥 챙겨 먹는 사람이냐? 장사 안 되면 안 된다고 굶고, 장사 잘되면 바쁘다고 굶고. 안 봐도 뻔햐~ 밥은 안 먹고 믹스 커피나 홀짝거리고 담배나 뻐끔거리고 앉아 있을 거 아녀. 그래서 그만둔 겨. 니네 아빠 때문에.”     


야채 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만뒀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집에 한 번 오라는 전화였다. 그래도 7년이나 일했으니, 퇴직금 좀 주려나 보다 하고 갔다. 지독한 거로는 스크루지도 울고 갈 정도라는 건 이미 잘 알았다. 100만 원까지는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50만 원은 주겠거니 싶었다. 봉투에 든 건 만 원짜리 10장이었다. 동분은 믿기지 않아, 그 10장을 세고 또 세어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장이었다.     

  

“같은 길바닥 장사였어도 이불 장사랑은 차원이 달랐지. 노점상 하면서 직원을 둘이나 쓰는 게 쉽냐? 그 정도로 장사가 잘됐단 말여. 그 언니 집이 얼마나 넓었다고. 아마 돈 무쟈게 벌었을 겨. 그런 사람이 7년이나 일한 직원한테 퇴직금으로 10만 원이 뭐냐, 10만 원이. 그렇게 넓은 집에서 10만 원 든 봉투 받아 나오는데 진짜로 없던 정까지 뚝뚝 떨어지더라. 요즘도 엄마가 허리 때문에 고생하잖어. 아휴.”     


회사 생활 한 번 해본 적 없는 동분은, 그때 인생에서 처음으로 퇴직금이라는 걸 받았다. 10만 원이었다. 그 대가로 동분은 만성 요통을 얻었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퇴직금제도의 설정 등) ①에서는 “퇴직금제도를 설정하려는 사용자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퇴직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라고 나온다. 평균임금에 관해서는 「근로기준법」  제2조(정의) 제6호에서 “평균임금이란 이를 산정하여야 할 사유가 발생한 날 이전 3개월 동안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된 임금의 총액을 그 기간의 총일수로 나눈 금액을 말한다. 근로자가 취업한 후 3개월 미만인 경우도 이에 준한다.”라고 정의한다.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일했기에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관련 법률을 근거로 한 번 계산해보자면 동분은 당시 퇴직금으로 최소 770만 원(110만 원X7년)은 받았어야 했다. 2014년 최저임금 기준으로 하면 자그마치 1,137만8,640원(162만5,520원X7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2009년, 동분(당시 49살)의 조카 결혼식장에서 다같이 찍은 가족 사진. 가장 오른쪽이 본인 23살 때다.  


      

쌔가 빠지게 일한 몸뚱이 

청소노동자[2018~]  


동분에게도 물론, 꿈은 있었다. 어릴 땐 문학도를 꿈꿨고, 나이 먹은 후엔 유치원 교사를 꿈꾸기도 했다.      


“엄마가 옛날부터 아기들을 무쟈게 좋아했거든. 왜 그런 사람들 있잖어. 타고나길 아기들 예뻐하고 같이 놀아 주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엄마가 딱 그런 사람이여. 니네 형수랑 같이 요섭이, 민설이(주성의 자식들) 키울 때도 엄마가 동화책 얼마나 많이 읽어줬다고. 20대 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 형편이 좋아서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그 뭐여. 유아교육과라고 하나? 그런 과 졸업해서 유치원 선생 했으면 참 잘했을 텐데, 하는 생각. 근데, 그건 그야말로 꿈이었고. 스물둘에 결혼해서 먹고살기 바쁜 인생이었는데 뭘. 다시 태어나면 공부 열~심히 해서 한 번 도전해 볼까? 호호호.”      


아이들이 좋아 유치원 교사를 꿈꿨다던 동분이 공부한 건 노인을 위한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였다. 더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던 사람이 알래스카로 이민간 꼴이다. 때는 2008년, 동분이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한 즈음이었다. 자격증 따두면 나중에 분명 쓸모 있을 거라는 지인 말에, 동분은 학원을 찾았다.      


2008년, 정부는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요양보호사 제도를 시행했다. 초기엔 인력확보를 위해 일정기간 소정의 교육과정만 이수하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2010년 1월, 노인복지법 제39조의2(요양보호사의 직무‧자격증의 교부 등) ②를 개정했다. 지금은 요양보호사교육기관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나무위키 및 국가법령정보센터 참조.)      


“말도 말어. 엄마가 자격증 딴다고 1년이나 고생했다는 거 아니냐. 작업복 입고 땀 삐질삐질 흘려가며 야채 팔다가 퇴근하면 저녁 8시여. 그럼 밥도 못 먹고 부랴부랴 학원으로 가는 겨. 죙일 땀에 쩔었으니 얼마나 거지꼴이겄냐. 창피하니까 학원 화장실 가서 옷만 대충 갈아입고 야간반 수업에 들어갔었지. 수업 끝나고 집에 오면 밤 10~11시. 그제서야 저녁 먹고, 다음날 또 8시까지 출근하고. 그때 엄마가 오십 가까웠으니까 젊은 나이가 아니잖어. 피곤하지 왜 안 피곤했겄어. 더군다나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죽겄더라고. 호호호. 나중엔 실습한다고 한 달 동안 일요일마다 요양원 가서 노인들 케어하는 것도 배웠어~! 원래 1년이나 걸릴 게 아닌데, 엄마가 일하면서 학원 다니다 보니까 이래저래 오래 걸린 겨.”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송일영 따라다니며 다시 이불 장사한 건 2년 정도. 날이면 날마다 죽는소리하는 송일영 걱정돼서 따라나서긴 했지만, 이번엔 동분이 죽을 판이었다.      


“아무튼 간에 엄마는 니네 아빠랑 안 맞어. 붙어있으면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 알지? 니네 아빠 성깔. 스트레스받아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런 데다가 막상 둘 다 이불 장사에 매달리니까 생활이 쪼들리더라고. 그래도 엄마가 야채 알바하면서 100만 원 남짓 벌어서 용돈 쓰고, 공과금이랑 보험료 같은 걸 냈었는데, 그 돈이 없어지니까 생활이 안 되더라고. 그래가지고 2017년부터 다시 각자 벌기 시작한 겨. 니네 아빠는 혼자 이불 장사 댕기고, 엄마는 요양보호사를 1년 정도 했지. 원래는 바로 대학병원 청소 일 하려고 했는데, 자리가 안 나는 바람에 요양보호사 하면서 자리 나길 기다린 거지. 그러다 자리 났다고 해서 2018년 5월부터 지금까지 병원 청소하는 겨.”     


대학병원에서 보내는 하루는 바쁘다. 새벽 6시 30분부터 청소를 시작한다. 우선은 간호사실, 처치실, 약제실 등 사무 공간부터 쓸고 닦는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다음은 복도와 화장실. 긴 걸레 들고 다니면서 복도를 한 번 훑어낸 후,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화장실 청소엔 꽤 공을 들인다. 화장실만 봐도 그 건물 청결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게 동분 생각이다. 솔과 수세미로 변기와 세면대, 타일 바닥과 문손잡이 등을 꼼꼼하게 닦아낸다. 화장실 청소까지 끝내면 아침 8시 40분이다. 이때부터 20분가량 잠시 쉰다. 병실 청소가 남아있긴 하지만, 기상 전인 환자도 있고, 환자 아침 식사가 7시 40분부터라 아직 식사 중인 환자도 있다. 밥상머리에서 먼지 피울 순 없다. 9시가 딱 되면 병실로 간다. 9시부터 입원 환자의 진료와 재활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자리 비우는 환자가 더러 있다. 꼭 진료가 아니더라도 9시면 산책이나 가족 면회 등으로 왔다 갔다 하는 환자가 많다.      


“이왕이면 한두 자리라도 더 비었을 때 청소하는 게 서로한테 편하잖어. 침대가 비어있으면 하다못해 이불이라도 한 번 더 털어줄 수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그래서 병실 청소를 마지막에 하는 겨.”     


누가 가르쳐줬을 리 없건만, 동분은 청소 동선을 철저하게 계산한다. 병실 청소까지 끝내면 11시 30분, 점심시간이다. 바로 이 시간이, 요즘 동분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후딱 밥 먹으면 12시거든. 그럼, 엄마까지 마음 맞는 아줌마 네 명이서 꼭 커피를 마시러 가. 대학병원이라 커피가 좀 싸.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1,500원이여. 그거 하나씩 시켜놓고 수다 떠는 겨. 그 30분이 참 별것도 아닌데, 엄마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하다? 왜, 일하다 보면 이래저래 속상할 때가 있잖어. 청소 일이 그렇지 뭐. 그리고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편이나 자식 걱정도 많고. 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여. 호호호. 그렇게 쉬다가 12시 반부터 4시까지 또 한 바퀴 돌면서 청소하고 퇴근하는 겨.”

“…….”     


남들 학교 다닐 14살에 짐 보따리 하나 싸 들고 나왔을 때, 동분 운명은 이미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공장에서, 결혼한 후엔 시댁에서, 또 30대부터 50대까지는 길바닥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사이 신발 밑창 붙이는 부업을 하고,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고, 식당에서 김밥을 말고, 찌개와 반찬을 서빙 했다. 지금은 청소노동자로 살아간다. 스스로 표현했듯, 동분은 “쌔가 빠지게 일한 몸뚱이”를 여전히 굴린다. 섬유공장 다니던 17살에 망가진 코에서는 오늘도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재채기는 멈추질 않는다. 길바닥 장사하며 아작난 허리는 비오는 날마다 동분을 괴롭힌다. 무릎 연골도 닳을 대로 닳았다. 요즘은 한번 쭈그려 앉았다 일어나는 게 일이다. 그런 몸뚱이를 여전히 굴린다. 덜덜 거리는 폐차 직전의 자동차 굴리듯. 그런 인생이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음 맞는 사람들과 1,500원 짜리 커피 마시는 30분 남짓이 가장 행복하다며 웃는다. 그래서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것이 너무나 소소하게 느껴져서, 그 소소한 걸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서, 그래서.


 

  

2023년 2월, 베트남 가족 여행 가서 찍은 사진. 가장 오른쪽이 본인이다. 아래 꼬마는 큰아들 주성의 첫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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