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버지
동분의 아버지 정명식은 1925년,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첩의 자식이었다. 정명식 부(父)는 첩이었던 정명식 모(父)에게 방 두 칸과 부엌 딸린 까만 기와집 한 채 줘서 내보냈다. 그런 시절이었다. 정명식 모와 정명식은 그 집에서 둘이 지냈다. 첩의 자식으로 서럽게 자란 정멱식은 술과 노름으로 인생을 허비했다. 그러니 허구한 날 부부싸움이었다. 그게 동분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이다.
“우리 아부지가 날이면 날마다 술 먹고 들어왔을 거 아녀. 그럼 우리 엄니 입장에서 속상해도 상대를 안 하면 그만일 텐데, 우리 엄니도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어. 같이 앉아서 밤새 싸우는 겨. 내가 그걸 보고 자랐으니, 얼마나 집이 싫었겄냐. 요즘 애들 같으면 벌써 가출하고 방황했을 겨. 나도 하루빨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뤄졌다. 정명식과 김춘자는 1953년 첫째 딸 정동순을 시작으로 슬하에 5남매를 뒀다. 5남매 가운데 넷째로 동분이 태어난 건 1961년 3월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전매청에 다녔다. 말하자면 준공무원이었던 셈.
전매청은 담배‧홍삼 및 홍삼 제품의 전매와 인삼 행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재무부의 외청이었다. 1948년 「정부조직법」에 따라 재무부의 1개국으로 출발해, 1952년 재무부에서 독립해 전매청이 됐다. 1965년 신탄진제조창(현 KT&G 신탄진공장.)을 준공해 생산라인을 확대했다. 전매청은 1987년 한국전매공사로 공사화했다가, 1988년 담배 판매시장의 전면 개방으로 수입 담배와 경쟁체제에 돌입하며 1989년 한국담배인삼공사로 사명을 바꿨다. 2002년 12월, 정부지분의 완전 매각을 통해 민영화하고 사명을 (주)KT&G로 변경했다. 한편, 1946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에 청주연초공장을 개설했다. 이후 서울지방전매청 청주분공장(1950)-서울지방전매청 청주공장(1953)-청주연초제조창(1963)-한국담배인삼공사 청주연초제조창(1989)을 거쳤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그럼 뭐하냐? 맨날 술 아니면 노름이었는데. 우리 엄니 하는 말이 죽는 그날까지 월급 한 번 제대로 갖다준 적이 없다는 겨. 그러니까 우리 엄니가 무쟈게 고생했지. 없는 살림에 뭔 놈의 애는 또 그렇게 줄줄이 낳아가지고, 우리 집에 식구가 많았잖어. 할머니, 아부지, 엄니, 언니, 큰오빠, 작은오빠, 나까지 일곱 식구였지. 내 동생 현희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태어났으니까.”
그런 아버지 대신해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다녔다. 집에서 만든 두부와 참기름 등을 팔았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그걸로 일곱 식구가 먹고살았다. 그러니, 형편이야 안 봐도 빤하다. 동분은 ‘까만 기와집’을 떠올리면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 엄니가 해 질 무렵 장사 끝내고 집 올 때면 꼭 주전부리 같은 걸 사가지고 왔어. 우리 집이 언덕 위에 있었는데, 엄니 올 때 되면 저 언덕 밑에까지 내려가서 기다리는 겨. 호호호. 그럼 우리 엄니가 뭐 하러 추운데 나와서 기다렸냐고 하면서도 내 손에 과자를 꼭 쥐어 줬어. 그래도 늘 배가 고팠지. 먹을 게 귀할 때였으니까.”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매일 저녁 ‘김치죽’을 쒔다. 큰 솥단지에 쌀 한 주먹과 국수 조금, 김치 넣고, 물 잔뜩 부어 팔팔 끓이는 거다. 그렇게 해야 일곱 식구가 겨우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어렸던 동분은 바퀴벌레만큼이나 김치죽을 끔찍이 싫어했다.
“어린 마음에 배는 고파도 그건 그렇게 먹기가 싫었어. 그래봐야 예닐곱 살이었으니까. 저녁 먹을 때 되면 벌써부터 삐져가지고 윗목에 돌아앉아 있는 겨. 호호호. 그럼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착한 동분이 일루 와서 조금만 먹어봐라.’ 그럼 마지못해 한 숟갈 먹고 그랬지. 할머니가 우리 엄니한테는 못된 시어머니였어도 나한테는 엄청 잘해줬어. 현희 태어나기 전이니까 내가 막둥이라 더 예뻐했던 거 같어.”
그런 손녀가 안쓰러웠던지, 그때마다 할머니는 화롯불에 고구마나 밤 같은 걸 구워주곤 했다. 그래도 배가 고픈 날이면 동분은 할머니를 졸랐다. 까만 기와집 아래로 부잣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 마당에 과실수가 많았다. 철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게 먹고 싶었던 거다.
“아부지는 전매청 다니고, 엄니는 장사 가고, 언니랑 오빠들은 다 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낮에는 할머니랑 둘이 있었거든. 하루 죙일 할머니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채는 겨. 그럼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동분이 때문에 미치겄다’ 하면서도 내 손 잡고 그 부잣집으로 갔어. 호호호. 그렇게 졸라서 기어코 열매 몇 알을 얻어먹는 겨. 겨울에는 고드름도 많이 따먹었지. 그때는 왜 그렇게 배가 고팠나 몰라.”
그렇게나 동분을 아꼈던 할머니가 죽은 건 동분 7살 때다. 어렸지만, 그때의 상실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덕 위에 서서 할머니 모신 상여가 멀어지는 걸 지켜봤던 기억, 서럽게 울며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쳤던 기억 말이다.
“어쨌거나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 모든 불행이 아부지 때문인 것 같았지.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우리 엄니가 고생하는 것도, 우리가 맨날 김치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다 아부지가 술 먹고 노름해서 생긴 불행처럼 느껴졌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호호호. 아무튼 그때는 아부지를 굉장히 원망했던 거 같어.”
돌이켜보면 그때 불행은 불행도 아니었다. 진짜 불행이 시작된 건 동분 9살,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이하 신탄진)으로 이사 오면서부터였다.
퇴직금으로 노름빚 갚겠다고 직장을 때려치워?
동분이 9살이던 1969년 초여름. 동분 아버지가 신탄진으로 발령 났다.(청주연초제조창에서 근무하다 1965년 준공한 신탄진제조창으로 발령 난 것으로 추정.) 하늘은 알았던 걸까. 동분 가족의 고달픈 앞날을 말이다. 이사 가던 날,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비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신탄진 집을 보고 동분은 깜짝 놀랐다. 나고 자란 ‘까만 기와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누추했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까, 우리집 유일한 재산이었던 그 까만 기와집에 빚이 잔뜩 깔려있었다더라고. 무슨 빚이긴? 아부지가 노름해서 진 빚이지. 그러니까 그 집 팔아서 빚 갚고, 마당도 없는 쬐만한 집으로 이사를 왔던 겨.”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던 노름빚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신탄진 전매청에 6개월이나 다녔을까.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출근을 안 하더라는 것. 사연인즉, 청주에서 졌던 빚이 남아 있었고, 빚쟁이가 날이면 날마다 신탄진 전매청까지 찾아와 아버지를 못살게 굴었단다. 결국, 일을 저질러버렸다. 회사에 덜컥 사표를 던진 거다. 그렇게 받은 퇴직금으로 남은 빚을 다 털고 백수가 돼버렸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학교 갔다 왔더니, 우리 엄니가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겨. 엄니 한다는 말이, 나한테 미리 얘기라도 했으면 내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빚을 갚았을 텐데,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직장을 그만둬버리면 어뜩하냐는 거여. 그때 내 동생 현희가 돌도 안 지났을 때니까, 엄니 입장에선 막막한 심정이었겄지.”
동분 어머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분 아버지는 그때부터 술을 더 찾았다. 단 하루도 맨 정신인 걸 못 봤다. 심지어 동분의 국민학교 운동회 때도 술에 취해 돌아다녔다. 동분은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신탄진엔 신탄진국민학교와 1968년 개교해 규모가 작았던 새일초등학교(개교 당시, 신탄진국민학교에서 6학년만 분리) 밖에 없었다. 하여, 신탄진의 거의 모든 아이가 신탄진국민학교에 다녔다. 그러니 신탄진국민학교 운동회는 단순한 운동회가 아니라, 말하자면 마을축제였던 셈.
신탄진초등학교는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다. 1908년, 지역 선비였던 박홍서 등이 세운 사립신흥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신탄진공립보통학교(1919)-신탄진초등학교(1946)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합뉴스> ‘신탄진초교 대전서 첫 개교 100주년’ 기사 참조.)
“학교 입구부터 운동장까지 사람이 바글바글했지. 그날은 신탄진 사람이 전부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새벽부터 온가족이 총출동해서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까는 겨. 그래놓고 애들한테 ‘엄마 여기에 있을 거니까, 이따 점심 때 여기로 와’ 하는 거여. 그렇게 알려주지 않으면 나중에 찾지도 못햐. 그래가지고 점심시간에 엄니 찾아가는데, 저쪽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겨. 뭔 일인가 하고 봤더니, 글쎄! 아부지여. 아침부터 술을 얼마나 드셨나, 그 사람 많은 길바닥 한가운데 대자로 뻗어서 주무시는 겨. 아휴. 애들이 ‘야~! 동분아, 니네 아부지 여기서 주무신다~~!!’ 하는데, 어린 마음에 내가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했겄냐. 그 정도로 우리 아부지가 술을 많이 드셨어.”
그때는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이 이렇게나 어렵고, 가족들이 이만큼이나 고생하는데 아버지는 왜 술만 드시는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동분은 가끔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부지가 술만 안 드시면 진짜 새색시 같은 사람이었거든. 엄니랑도 술 드셔야 싸우지, 평소엔 세상 자상한 남편이고 아빠였어. 그렇게 가부장적인 시대였어도 우리 아부지는 자식들한테 그 흔한 욕 한 번 안 했고, 회초리 한 번 안 들었어. 늙어서도 자식들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을 안 하셨어. 우리 아부지가 평~생 밥 한 공기를 다 안 드신 양반이거든. 왜 그랬는줄 아냐?”
미우나 고우나 가장이라고, 동분 어머니는 항상 남편 밥을 따로 했다. 자신과 새끼들은 꽁보리밥 먹을지언정, 남편에겐 늘 하얀 쌀밥을 대접했다. 동분 아버지는 그 하얀 쌀밥을 꼭 절반씩 남겼다.
“내가 막내였을 땐 나한테, 내 동생 현희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현희한테, 나중에 우리 큰오빠가 엄니랑 아부지 모시고 살 땐 손주들한테 그 흰쌀밥을 냄겨줬던 거여. 나도 어릴 때 약아가지고 꽁보리밥 안 먹고, 아부지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겨. 그럼 아부지가 항상 절반쯤 냄기면서 이런다. ‘아부지는 배불러서 그만 먹을란다. 동분아, 이거 아부지 밥 갖다 먹어라.’ 그러면 쪼로로 가서 아부지가 냄긴 흰쌀밥을 먹는 거지.”
그런 아버지였다. 동분은 지금도 아버지가 따줬던 홍시 맛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가을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동네 다니며 홍시를 몇 개씩 따왔다. 그걸 새하얀 접시에 하나씩 담아 자식들 머리맡에 놔주곤 했다. 동분이 부스스 일어나면 “우리 동분이 배고프지? 이거 먹어봐라, 맞춤하게 익었다.”라며 밥숟갈로 홍시를 푸~욱 떠 동분 입에 넣어줬다.
“내가 살아보니까, 우리 아부지처럼 말랑말랑하고 여리여리한 사람들 중에서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 사는 게 힘드니까 술을 찾고, 그러니까 더 사는 게 힘들어지고, 그러니까 더 맨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는 거지. 전매청 그만둔 다음부터 술을 더 찾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던 거 같어. 가장으로서 무능한 당신 스스로를 맨 정신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겄지. 의지력 강하고 추진력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훌훌 털어내지만,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영영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거든. 내가 지금, 우리 아부지 잘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녀. 세상 사람들은 우리 아부지를 무능한 가장이었다고 욕할는지 모르겄지만, 나는 그냥……. 가끔 우리 아부지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들어. 끝끝내 펴보지 못하고 사그라진 꽃망울 같다고 할까. 그런 인생이었던 거 같어, 우리 아부지는.”
주홍의 첫돌이 막 지났을 때니까 1988년 6월로 기억한다. 지긋지긋한 시집살이 끝내고, 마침내 분가했다. 신탄진을 벗어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동분은 시댁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집을 알아봤다. 그렇게 이사하고 보니, 마침 친정집과는 가까워졌다. 걸어서 10분이나 걸렸을까. 그때 동분은 28살이었고, 아버지 정명식은 64살이었다. 동분은 그해 여름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그해 여름 보내고 아부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그래도 나는 마음 편히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었지. 그래도 그해 여름, 아부지랑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전매청 그만둔 뒤로,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번 돈도 언제나 그렇듯 술값으로 허비했다. 그나마도 환갑 좀 넘어서 그만뒀다. 술로 평생을 보냈으니, 몸이 버티질 못한 거다. 동분 가족이 분가해 친정집 근처로 이사 왔을 때가 마침 그즈음이었다. 아버지가 일 그만두고, 소일하며 지내던 때.
아버지 입장에서 집에만 종일 있자니 큰며느리 눈치 보여, 둘째 아들네 가자니 거기도 며느리 눈치 보이긴 마찬가지였을 게다. 큰딸은 저 멀리 김천에 있고, 막내딸은 서울에 있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동분이 신탄진에 있어 이따금 찾아갔지만, 시부모 모시며 사는 동분 입장에서 아버지가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터.
“너도 잘 알겄지만 니네 친할머니가 좀 괴팍한 양반이었냐? 어쩌다 우리 아부지가 나랑 주성이 보겠다고 찾아와도 눈길 한 번을 안 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래도 사돈인데. ‘어떻게 먼 길 오셨느냐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빈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우리 아부지 오면 무슨 벌레 보듯 쳐다보고 방문 쾅 닫고 들어가 버려~! 아휴. 그러니 내가 얼마나 무안하고 속상해. 그럼 나도 괜히 아부지한테 화를 내는 겨. 아부지는 여길 뭐 하러 오셨어. 누가 좋아한다고. 그렇게 앉자마자 막 보냈다니까? 우리 아부지, 나한테 와서 밥 한 번을 못 얻어먹고 가셨어.”
그랬던 동분이 분가해 근처로 이사 온 거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당시 동분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아침 7시쯤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다. 8시쯤 송일영이 출근하면 주성을 깨워 밥을 먹였다. 9시, 주성이 유치원 가고 나면 집안일을 했다. 일찌감치 모유 먹고 놀던 주홍까지 낮잠 재우고 겨우 한숨 돌리는 게 딱 10시였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찾아왔다. 6시 땡하면 시작하는 <6시 내고향>처럼.
당시 동분이 살던 집은 상가건물 2층이었다. 1층에 슈퍼가 있었다. 슈퍼 이름이 ‘공주슈퍼’였다.(하여 동분은 나중에도 그 집을 ‘공주슈퍼 집’이라고 칭했다.) 슈퍼 옆으로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올라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부엌이 있고, 부엌 지나면 방이 나왔다. 부엌보다는 방이 좀 높아서 방문 앞에 문턱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신발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오는 구조였다.
“10시만 되면 아무튼 거르는 법 없이 오셨어. 호호호. 근데 또 오셔도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어. 꼭 그 문턱에 걸터앉어. ‘방으로 들어오셔요’ 해도 안 들어와. 거기가 편하시댜. 거기 걸터앉아서 방으로 고개만 빼꼼 해가지고 ‘주홍이는 자냐?’ 하면서 한 번 쳐다보시고. 호호호.”
그때마다 동분은 곤히 잠든 주홍이 괜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첫돌이 막 지났으니까, 한창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 좀 일어나서 외할아버지한테 재롱이라도 한번 떨어주면 좋으련만, 그 시간에 꼭 낮잠을 잤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자는 거 깨우기라도 할라치면 세상 떠나가라 우니, 깨울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머쓱한 마음에 동분이 “좀 깨울까요?” 하면 아버지는 “둬라. 자는 애를 뭐 하러 깨우냐.”하고 말았다.
“우리 아부지가 원래 말이 많은 양반은 아니었거든. 우리 집 오셔봐야 별말씀도 없으셔. 그냥 그 문턱에 걸터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겨. 그러면 나는 토마토 하나씩 갈아서 드리고. 그때가 한창 토마토 철이었으니까. 그럼 그건 또 꿀떡꿀떡 잘 드셨어. 호호호. 그렇게 한 10분이나 앉아 계실까? ‘나 갈란다.’ 하셔. ‘왜요? 좀 더 계셨다 점심 드시고 가셔요.’ 해도 수고스럽게 뭔 점심이냐고. 휙 가셔.”
동분은 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 말씀 없이, 문턱에 가만히 걸터앉아 계셨던 모습.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던 그 모습 말이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가오는 삶의 끝자락을 예견했던 걸까. 그래서 당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느라, 그렇게 허공에 시선을 던졌던 걸까. 그렇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동분으로선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런 양반이었어, 우리 아부지는. 딸 집에 와봐야 끝끝내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턱에 걸터앉고 마는 양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혹시라도 깰까, 얼굴 한 번 쓰다듬지 못하는 양반. 딸이 차려주는 점심상 한 번 못 받고, 끝내 그렇게 떠나버린 양반……. 그해 여름에 말이여. 아부지 붙들어 앉혀서라도 점심상 한 번 차려드렸어야 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라?”
딱, 그 한 철이었다. 그해 여름 끝자락, 가파른 내리막을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전거처럼 아버지는 급격하게 노쇠했다. 여느 때처럼 문턱에 걸터앉아있던 아버지가 바지 밑단을 거둬 올리며 종아리 보여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한테 하신다는 말씀이, ‘동분아, 이거 봐라. 나 왜 이렇게 말랐냐? 자꾸 살이 빠진다?’ 하시는 겨. 그래서 봤더니, 뼈밖에 없어. 그래가지고 ‘아부지, 식사 좀 잘 챙겨 드셔요. 밥을 많이 안 드시니까 자꾸 마르죠.’ 하고 말았어. 그래봐야 아부지 64세였으니까. 요즘 같으면 할아버지 축에도 못 끼는 나이잖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지.”
며칠 뒤, 아버지가 갑자기 앓아누웠다. 동분 집에도 더 이상 놀러 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나 더 지났을까. 아침부터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평생 그런 적 없던 양반이 밤사이 ‘까만 똥’을 지렸더라는 거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자식들 찾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심상찮다고 얼른 와보라는 전화였다.
“전화 받자마자 너 업고, 니네 형 손 잡고 후다닥 갔지. 나야 친정집이 걸어서 10분 거리였으니까 금방 간 거지. 그때 니네 큰삼촌은 멀리 지방으로 일 갔을 때였고, 큰이모는 김천에 살고, 작은이모는 서울 살 때였잖어. 가보니까 작은삼촌만 와있더라고. 가자마자 ‘좀 어떠세요?’ 하면서 아부지 손을 잡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거여. 그래가지고 여기저기 만져봤더니 목 아래로는 이미 송장이여. 딱딱하게 식었더라고. 얼굴이랑 정신만 말짱해. ‘동분이 왔냐?’ 하면서 말씀은 하시더라고. 그래도 내가 그 순간 너무 놀랐나 봐. 코피가 팍 터진 거여. 그랬더니만 아부지가 ‘아이고 동분이 왜 그러냐. 코피 난다. 뒤뜰 가서 쑥 뜯어다가 얼른 막아라.’ 그걸로 끝이었어. 그러고 한두 시간 있다가 돌아가셨으니까.”
동분은, 그날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고 기억한다. 추석 일주일 전이었으니까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디쯤이었을 텐데, 그렇게 뜨겁지 않은 햇살이 포근하게 방 안을 감쌌다. 그런 가운데 정명식은 64세 일기(1925~1988)로 숨을 거뒀다. 끝끝내 나머지 자식은 못 봤고, 동분과 동분의 작은오빠만 자리를 지켰다. 대단할 거 없는 삶이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술을 놓지 못했다. 하여 밥벌이가 변변찮았다. 그런 까닭에 무능한 가장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분은 그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참으로 아버지다운 죽음인 것 같다고.
“평생 술을 드셨으니, 몸이 성치 않았겄지. 그래서 일찍 돌아가신 걸 테고. 그래도 나는 딸이니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여. 아부지가 노가다할 때까지만 해도 엄니한테 다만 얼마씩은 드렸을 거 아녀. 물론, 월급봉투를 따박따박 갖고 오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말이여. 그러다 일 그만두시고,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제 다 했다는 생각. 어쩌면 여생을 짐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겨.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는 게 이상하잖어. 멀쩡하던 양반이 어느 날 갑자기 누워서 보름 딱 앓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인생 전체를 뜻대로 살진 못했지만, 그래도 가는 순간만큼은 당신 스스로 결정하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편하게 눈을 감으셨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부지는 어쨌거나 그런 양반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