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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21. 2023

기꺼이 슈퍼맨 흉내라도 내줄 진짜 슈퍼맨

#4 친구 ②

후반전

나의 생일날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 



동분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생일이었다. 예순 번째 생일. 아침 일찍부터 김순화의 큰딸에게 전화가 왔다. 화면에 뜬 번호를 보는 순간, 동분은 직감했다. 갔구나, 기어이 갔어.       


“전화 받자마자 광주로 달려갔지. 가는 내내 차에서도 얼마나 울었나 몰라.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첫날인 데다가 대낮이라서 아직 조문객이 없더라구. 입구에서 순화 영정사진 보는 순간부터 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아휴.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사위들이 물어보더랴. 도대체 저분은 누구시냐고. 순화 딸들은 날 아는데 사위들은 처음 봤으니까, 도대체 장모님이랑 어떤 사이길래 저렇게도 서럽게 우나 싶었겄지. 딸들이 그랬댜. 우리 엄마랑 제일 친한 친구분이시라고.”     


자신의 생일날 떠난 친구. 무슨 의도를 갖고 그날 눈을 감았겠냐만, 동분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다. 잊지 말아 달라는 김순화의 간절한 바람 아니었겠느냐고. 동분은 그날 장례식장에서 김순화 영정사진을 보며 이렇게 넋두리했다.      


‘아휴, 네가 기일 까먹지 말고 챙겨달라고, 기어코 내 생일에 죽었냐? 응? 그래 이년아, 내가 평생 죽을 때까지 널 잊지 않고, 네 기일 챙길게.’     


“근데, 진짜로 엄마가 그려. 바쁘게 지내다가도 생일이면 순화 생각나. 그때마다 광주까지 갈 순 없어도, 하늘 한 번씩 보면서 ‘순화야~! 거기서는 좀 편하게 지내고 있냐? 나는 좀만 더 살다가 가야겄다. 좀만 더 있다가 하늘에서 보자.’ 얘기하는 겨. 올해는 광주에도 한 번 다녀올라구.”     


얘기했듯, 고순화가 동분의 인생 전반을 함께했다면, 후반은 김순화였다. 그럼 한 번 가보자. 김순화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으로.      


“엄마가 딱 40살이었으니까 2000년이었네. 엄마 고향 친구 중에 양순이라고 있어. 신양순. 연락 끊겼다가 그즈음 우연히 연락이 닿았어. 그래서 한 번씩 만날 때였거든. 그때 양순이가 검정고시 학원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또래 아줌마들하고 계모임을 한다는 거여. 나한테 모임 같이 해보겠냐고 하더라? 그때 엄마가 친구도 없고, 모임 같은 것도 없을 때였거든. 그래서 나갔지. 거기서 순화를 처음 만난 거여.”     


당시 김순화는 계룡시에 살았다. 계모임은 주로 대전 시내에서 했다. 계룡시에서 대전 시내로 나가는 길목에 마침 동분이 살았다. 차를 끌고 다녔던 김순화가 계모임하러 갈 때 동분을 한 번 태웠다. 그게 인연이었다.      

“엄마는 차가 없었으니까, 어쩌다 한 번 얻어 탄 거지. 그날 순화 차에서 이런저런 얘길 하는데 잘 통하더라? 순화도 내가 마음에 들었겄지?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계모임 하러 갈 때마다 순화가 날 태워준 거여. 순화 차 타고 오가며 친해진 거지.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그 계모임에 60년 쥐띠가 많았거든. 그래서 양순이가 쥐띠라고 속였던 거여. 근데 또 김순화는 59년 돼지띠였어. 김순화 입장에선 양순이가 1살만 어리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친구 하자고 했을 테고, 나도 양순이 친구라니까 자연스레 친구가 된 거지. 나중에 순화랑 친해져서 얘기하다 보니까 나보다 2살이나 언니인 거 있지? 그럼 뭐하냐? 벌써 친구 먹었는데. 호호호. 그래서 그냥 쭉 친구로 지낸 겨. 2살 많은 언니랑.”     


나이가 실제로 2살 많기도 했지만, 김순화는 여러 면에서 동분에게 언니 같은 친구였다. 여기서 잠시, 동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문학소녀로 사춘기 보내고 공장 다니다, 일찍 결혼해 시부모 모시다가 간간이 식당 아르바이트한 게 전부였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지 않았다. 동분 본인 입으로도 “원래가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단다. 그 단적인 일화 한번 들어보자.      


“이불장사 처음 시작했을 때가 엄마 36살이었으니까, 너보다도 어렸네. 엄마가 그때까지 장사를 해봤겄냐, 어디서 제대로 손님을 상대해봤겄냐. 그러니 누가 이불만 사러 와도 얼굴 벌게져가지고 말도 제대로 못 했다니까. 엄마가 원래 그 정도로 소심한 사람이었어. 맨날 얘기 안 하디?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다고. 호호호. 그나마 이불장사 계속하면서 좀 외향적으로 바뀐 거지.”     


그에 반해 김순화는 또래 여성보다 덩치도 좋고 성격도 화끈한 편이었다. 그 당시 김순화 직업은 경락마사지사였다.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꾸며 동네 중년 여성들 상대로 마사지 숍을 운영했다.     


“순화가 완전 통뼈였거든. 너도 몇 번 봐서 알겄지만 딱 봐도 힘 좋게 생겼잖어. 손아구 힘이 얼마나 좋았다구. 순화한테 한 번 마사지 받은 아줌마들은 다른 데 가서 마사지 못 받았어. 시원찮다고. 그리고 순화가 ‘이게’ 좋았잖어.(동분은 입 옆에 손을 가져다 대고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해보였다. 한마디로 말솜씨가 좋았단 얘기.) 얼굴 못생기면 옷 잘 입는다고 칭찬해주고, 얼굴 피부 안 좋으면 속살 뽀얗다고 얘기해주고. 어떻게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솜씨가 있었지. 그래서 순화 집 가면 손님이 항상 바글바글했어.”     

 

그런 까닭에 우울하고 힘든 일 있어도, 김순화만 만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너무 웃어서 광대뼈가 다 아플 정도였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2017년 큰아들 주성 결혼식날 동분(왼쪽에서 두 번째)과 김순화(가운데 줄무늬) 모습.




     




쫄쫄이에 빤주 입고기꺼이 슈퍼맨 흉내라도 내줄 진짜 슈퍼맨 


동분 인생 전체가 파란만장했지만, 그 가운데 40대도 만만찮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건 모두 김순화 덕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송일영이었다.      


“이불 장사하기 전까지 니네 아빠는 계속 택시 몰고, 엄마는 엄마대로 알바 다녔지. 그때도 니네 아빠랑 싸우긴 했지만, 그렇게 자주 부딪히진 않았다구. 근데 이불 장사를 같이 하니까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잘 때까지 죙일 붙어 있잖어. 그러니까 맨~날 싸우는 겨. 왜 싸우긴? 니네 아빠 성질 모르냐? 너도 알잖어. 그 고집을 누가 당해? 아휴~! 그래서 엄마가 니네 아빠랑 이불 장사하는 10년 동안 마음고생을 무쟈게 했다는 거 아니냐.”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동분과 송일영은 1996년, 이불세일매장을 차렸다. 불과 1년 반 뒤인 1998년, IMF와 홈쇼핑에 직격탄을 맞았다. 그래도 2년을 더 버텼다. 결과적으로 2000년, 동분 40살 때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2.5톤 탑차에 이불을 싣고 다니며 길바닥에서 팔았다. 김순화와 한창 어울려 지내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그런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동분은 김순화를 만났다.   

   

“니네 아빠 때문에 속상한 일 있으면 순화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겨. 호호호. 그러면 순화가  ‘아이고 우리 착한 동분이, 네가 참아야지. 니 신랑 성격 원래 그런 걸 이제 와서 어쩌겄냐.’ 하면서 토닥토닥 안아줬었지. 순화라고 무슨 특별한 해법이 있었겄어. 그냥 나는 나대로 순화한테 하소연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고, 순화는 순화대로 그때마다 토닥토닥 해줬던 거지.”     


그런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해서라면 쫄쫄이에 ‘빤주’ 입고 망토를 둘러서라도 웃겨줄 사람, 그렇게, 기꺼이 슈퍼맨 흉내라도 내줄 진짜 슈퍼맨. 그런데다가 김순화는 흔쾌히 지갑을 열 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스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야 뭐 늘 어려웠지만, 40대 때 특히 형편이 어려웠지. 순화 만나봐야 엄마가 사줄 수 있는 건 맛있는 칼국수 정도였어. 근데 순화는 일찌감치 이혼하고 쭉 혼자 살았잖어. 마사지 숍에 손님도 많았고. 아무래도 엄마보다는 여유가 있었지. 그러니까 내가 청국장 사면 다음에 순화가 소고기 사주고, 내가 백반집 데려가면 순화는 다음에 장어 사주고 그랬었지. 엄마가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순화가 뭐랬는줄 아냐?”     


김순화는 그때마다 동분 등을 ‘찰싹’ 때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단다.      


“동분아, 친구끼리 누가 사면 좀 어떠냐? 여유 있는 사람이 사는 거지. 허허허. 동분이 너 내 말 잘 들어. 돈은 내가 벌어놓을 테니까 너는 그냥 내 옆에만 딱 붙어있어. 나중에 더 늙거든 우리 둘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면서 살자. 내가 다~ 사줄 테니까 너 노후 걱정은 하지를 말어. 허허허허.”     


그래 놓고 먼저 가버렸다며, 동분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동분, 아니 우리 엄마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감정을 추스른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도 순화 생각하면 이렇게 눈물이 난다? 그만큼 순화는 나한테 특별한 친구였어. 니네 아빠가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엄마한테 순화는 인생의 동반자였어. 죽을 때까지 함께할 유일한 사람……. 내 노후 책임진다더니 왜 먼저 갔느냐고.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옆에만 있지. 아휴.”     


그렇듯 언제나 품을 내어주는 건 김순화였고, 그 품에 기대는 건 동분이었다. 그랬던 김순화가 동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일도 있었다.      


“순화가 죽기 3년 전이었나. 모아둔 돈이 많았으니까, 2층짜리 단독주택 하나 사서 리모델링 싹 해가지고 살림집 겸 마사지 숍으로 꾸미겠다는 거여. 거기서 마사지 좀 더 하다가 늙으면 유유자적하면서 살겄다고. 그전까지는 아파트에서 방 하나 꾸며놓고 했었잖어. 그래서 엄마가 두 팔 걷고 나선 거지. 엄마가 뭐 순화한테 이사비용을 보태줄 수 있겄냐, 비싼 소파를 사줄 수 있겄냐. 그냥 마음으로, 몸으로 도와준 거지.”     


주택 보러 다닐 때부터 매입한 주택 리모델링할 때, 리모델링 끝내고 이사 준비할 때, 이사하고 마사지 숍 오픈 준비할 때, 동분은 웨딩플래너만큼이나 지극정성으로 시간 날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의견 보태고, 짐 싸주고, 짐 풀어주고, 손걸레 들고 바닥이라도 한 번 더 닦아줬다. 리모델링할 때 인부들에게 틈틈이 커피를 대접한 것도 동분이었다. 무슨 대단한 걸 바라서 한 일도 아니었고, 그동안 받았던 마음에 보답하는 차원도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나마 내 친구 순화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분은 마음이 가득 차는 걸 느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웃기겄지만, 엄마가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해가지고 손이 야무지잖어. 순화가 크게 크게는 움직여도 자잘한 건 잘 못 챙기는 스타일이었거든. 그러니까 엄마가 순화 짐 싹 정리해서 박스에 하나씩 하나씩 다 담아주고, 이사 가서도 구석구석 청소 다 해줬지. 그때마다 순화가 ‘동분이 너는 어쩜 이렇게 손이 야무지냐. 이거 다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보답허냐.’ 그랬다니까. 그 얘기를 순화가 죽을 때까지 했어. 내가 동분이한테 보답하고 죽어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뜩하냐고…….”      


동분과 김순화는, 그렇게 20년 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 함께했다. 때 되면 함께 제철 음식 먹으러 다녔고, 계절 바뀔 때마다 꽃구경하러, 단풍 구경하러 함께 산에 올랐다. 중국이며 일본이며 단둘이 해외여행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결과적으로 김순화와의 마지막 추억이었던 일본 온천여행을, 동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본 온천여행이 뭐 별 것 있냐? 아침저녁으로 온천에서 몸 지지다가 오는 거지. 그러니 3박 4일 동안 둘 다 피부가 뽀~애 가지고 빤짝빤짝 윤이 나는 겨. 호호호. 아침마다 순화랑 서로 얼굴 만지면서 칭찬해주느라 바뻐. 피부 좋아졌다고. 호호호.”     


그러던 셋째 날 밤이었던가. 호텔 옥상에 있는 노천탕으로 갔다. 여자만 출입하는 노천탕이었다. 몸을 지지던 김순화가 풍경 본다며 난간에 가더니, 깔깔깔 웃으며 동분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쫓아가서 내려다봤더니 1층이 남자 노천탕인 거 있지. 일본 아저씨 하나가 홀딱 벗고 덜렁~ 덜렁~ 하면서 돌아다니더라고. 호호호. 어두운데다가 물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순화 한다는 말이 ‘야~ 저놈 저거 다 보인다. 일본 머시매 거를 우리가 언제 또 보겄냐. 허허허. 실컷 구경하고 가자.’ 엄마가 그때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나 몰라. 호호호. 순화가 항상 그랬어. 별 것 아닌 거로도 그렇게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줬어.”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김순화(왼쪽)와 일본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죽어가는 친구가 힘겹게 건넨 그 한마디


김순화 죽기 2년 전이었다. 그때 동분은 손주들(주성의 자식들) 돌보느라, 김순화를 자주 못 만났다.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동분은 그즈음 배우자 외도를 직감한 사람처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만날 때마다 김순화가 몰라볼 정도로 말라 있더라는 것.      


“순화 덩치가 원래 좋잖어. 근데 몸매도 늘씬해지고, 얼굴도 요만해지는 거여. 그래서 내가 순화한테 ‘야, 다이어트허냐? 왜 이렇게 살을 뺐어?’ 그랬더니, 아니랴. 일부러 살을 뺀 게 아닌데, 요즘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살이 쭉쭉 빠진다는 거여. 근데 또 자기가 보기에도 훨씬 예뻐졌거든? 갸롬하니. 그래서 좋아하더라고. 살 빠지면 좋은 거 아니냐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나이 먹으면 누구나 그러하듯, 자연스레 늙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옷이 커져 입을 게 마땅찮다는 김순화 말에, 심지어 쇼핑도 함께 다녀왔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소화가 자꾸 안 된다는 겨. 그즈음 순화가 술을 많이 마시고 다녔거든. 그래서 내가 ‘순화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술 좀 줄여야겄다.’ 그랬지. 그러더니 또 좀 있다가 감기가 한 달째 안 떨어진다는 겨. 그 얘기까지 들으니까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동분은 김순화에게 서둘러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 그리고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엄마가 그때도 대학병원에서 청소할 때였잖어. 한창 청소하고 있는데, 순화한테 전화가 와. 그러더니 ‘동분아, 너 내일 오후 3시에 시간 낼 수 있어? 건강검진 받았는데, 큰 병원 가보래서 내일 동분이 너 일하는 대학병원으로 예약 잡아놨어. 동분이 니가 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순화랑 통화하고부터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겨. 건강검진 받았는데 큰 병원 가보라고 했으면 뭐가 문제가 있단 얘기잖어.”     


다음날, 김순화는 담낭암 판정을 받았다. 병원 밖으로 나와, 동분과 김순화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순화가 그러는 겨. ‘동분아, 나 진짜루 죄지은 것도 하나도 없고,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병에 걸리는 거냐.’ 그 말 하는데 진짜 나도 미치겄더라고.”     


김순화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그럼에도 전이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몇 달 뒤 집에서 쓰러졌다. 곧바로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동분과 함께 이사하고, 함께 청소하고, 함께 노후 보내자며 농담 주고받던 그 2층 주택 집으로 말이다.      


“서울 병원에 서너 달 입원했었지. 엄마도 몇 번 갔다 왔었고. 근데, 그때 엄마가 요섭이랑 민설이(주성의 자식들) 때문에 정신없을 때였거든. 아침에 병원 출근해서 죙일 청소하고, 집에 오면 그때부터 니네 형수랑 교대해서 애들 봐주고. 그러는 동안 니네 형수는 저녁 준비하고 집 정리하고. 그럴 때였어. 그래서 엄마가 한 열흘 정도? 순화한테 전화를 못 했어. 오랜만에 전화했더니만, 순화가 펑펑 울면서 ‘동분아, 왜 이제 전화했어. 응?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어. 나 이제 죽으려나 봐. 호스피스로 가야 한데.’ 그 얘길 듣는데 아휴…….”     


동분과 전화 안 한 열흘 사이, 김순화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던 것.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으니 호스피스를 알아보라고 했고, 이에 큰딸이 사는 광주 호스피스로 가게 된 거다. 동분이 전화했을 때도 큰딸이 대신 받아, 핸드폰을 귀에 대주는 형편이었단다. 그 정도로 김순화는 이미 기력을 다한 상태였다.     

 

“나랑 전화하고 이틀 뒤인가? 광주 호스피스로 들어간 겨. 그날 내가 순화한테 전화해서 그랬지. ‘순화야, 내가 여기 일을 쉴 수 없어서 3일 있다가 내려갈 건데, 너 내 얼굴은 한 번 보고 가야할 거 아녀. 나 내려갈 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 3일 동안 엄마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는 줄 아냐? 혹시라도 그사이에 무슨 일 생길까 봐.”     


3일 뒤 동분은 광주 호스피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김순화를 본 순간, 동분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한 달 전, 서울 병원에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김순화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병실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랬던 내 친구 순화는 없고, 웬 백발의 왜소한 할머니가 거기 누워있었다. 죽을 날이 가까웠던지, 입도 마르고 눈도 말라 있었다. 눈물도 안 나오는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멀겋게 동분을 쳐다보더라는 것. 큰딸이 거즈에 물을 적셔 몇 번이나 김순화 입을 닦아줬다. 그제야 김순화는 힘겹게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 동분이……. 예뻐…….”      


김순화는 언제나 그랬다. 동분만 만나면 습관처럼 예쁘다고 말해줬다. 그게 김순화식 인사였다.      


“만나면, 쭉 훑어보고 칭찬해줄 포인트를 찾어. 내가 머리 염색했으면 우리 동분이 머리 염색했네? 아휴 예뻐. 손톱 매니큐어 발랐네? 예뻐. 옷 새로 샀구나? 아휴 동분이 예쁘네. 항상 그랬어. 만나기만 하면 뭐라도 하나 예쁘다고 해주는 게 순화의 인사법이었어.”     


동분이 다녀간 다음 날, 그러니까 동분의 예순 번째 생일날 김순화는 눈을 감았다. 남편마저 내 편이 돼주지 않을 때 언제나 자신에게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 그리하여 나를 다시 나로서 살게 해준 단 한 사람. 동분에게 김순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날개 하나가 떨어진 느낌이었지. 엄마의 40~50대를 빛나게 해준 건, 니네 아빠가 아니라 순화였어. 순화 죽고 나서 엄마가 한동안 맨날 울고 다녔거든. 집에서 밥 먹다가도 훌쩍, 병원에서 청소하다가도 훌쩍, 차 타고 가다가도 눈물 나가지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울고 그랬지. 엄마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순화를 못 잊을 거여…….”     


언제였던가. 문득 궁금해 김순화 씨 안부를 물었다.    

   

“엄마 참, 순화 아줌마는 잘 지내시지?” 

“아휴~! 넌 몰랐겠구나. 순화 죽었어, 야.”

“아 그랬어? 편찮으시다더니, 그렇게 됐구나. 몰랐네…….”     


그때는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순화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넌 몰랐겠구나. 순화 죽었어, 야.”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흘린 눈물과 삭혀야 했을 그 슬픔에 관해서 말이다. 


‘김순화’에 관해 인터뷰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갓길에 차 세워놓고 울었다는 엄마 모습이 자꾸만 그려졋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아들인 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떨어져 살아도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차 안에서 우는 엄마 옆으로 쌩쌩 지나갔을 자동차들과, 그 익명의 운전자들과, 나는 다르지 않았다. 그런 아들의 무심함을, 나는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2005년, 백아산 정상에서 45살의 동분(오른쪽)과 김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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