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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12. 2023

학교 밖 소녀의 생애

#3 문학소녀

      

 



패티김 / 람디담디담(1970)    


배 떠나갈 때는 울지를 말어

눈물을 흘리면은 마음이 서러워

람디담디 담담 사랑하는 그대

람디담디담 람디담디담 

잊지 못할 그대

멀리 떠나가도 잊지는 않어

그리운 그 노래를 둘이서 부르자

람디담디 담담 사랑하는 그대

람디담디담 람디담디담 

잊지 못할 그대

눈물을 씻고서 웃어보아 주어

행복하던 날처럼 나를 보내주어

람디담디 담담 사랑하는 그대

람디담디담 람디담디담 

잊지 못할 그대 사랑하는 그대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머리가 비상한 것도, 끼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나에게도 개미 똥구멍만 한 재주가 하나 있으니, 바로 글쓰기다. 그 덕에 여태껏 먹고산다. 하여, 미천한 재주나마 갖게 해주신 부처님, 알라신, 예수님께 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 개미 똥구멍만한 글재주가 이번 에피소드와 관련 있다.     

      




이야깃거리를 수집하러 다니던 꼬마 


동분은 일찍이 작은아들 주홍이 기자할 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그래도 내 핏줄 물려받아서 먹고사는 겨. 니네 아빠 닮았어 봐라. 글은 무슨. 엄마가 그래도 한때 문학소녀 아니었냐. 너 임신했을 때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다고. 다 그 덕에 네가 글을 잘 쓰는 겨.”     


나의 첫 책이 나왔을 때도, 다시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때도, 동분은 표지에 적힌 송주홍 세 글자를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니가 그래도 엄마를 닮아서…….”     


그 말에 나는 차마, 학창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책을 읽었으며, 기자할 때 국장과 선배들에게 얼마나 많이 깨져가면서 글을 배웠고, 그 뒤로 지금까지 또 얼마나 많은 글을 썼으며, 그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고민했는지 얘기할 수 없었다. 


“니가 그래도 엄마를 닮아서…….”라는 말에 담긴 속뜻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마도, 작은아들에게 더 많은 걸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이자 위안의 표현 아니었을까. 그것으로나마 안도하고픈 엄마의 소중한 마음을, 나는 감히 깨트릴 수 없었다. 


사실은 그럴 때마다 “정동분의 아들로 태어나 과분하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요. 참으로 행복한 아이였어요. 진심으로 감사해요.”라는 말을 덧붙였어야 했는데. 무뚝뚝한 아들은 이렇게 글로만 적는다. 


어쨌든, 나 또한 늘 그런 생각은 했다. 작가로서 내게 노력한 것 이상의 어떤 재능이 있다면 그건 필히 엄마 DNA일 거라고. 말주변 없고, 글 쓰는 거 본 적 없고, 평생에 걸쳐 신문 외에 책 읽는 거 본 적 없는 아빠한테 ‘작가 아들’이 태어났을 리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야 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야 옳다. 그게 세상 이치다. 그러니까 이번 에피소드는 동분이 평소 늘 강조해왔던 ‘문학소녀’ 시절 이야기이자, 나의 작가 DNA를 추적해보는 시간이랄까. 때는 1970년으로 거슬러 간다. 동분 나이 10살 때다.      


“야, 그 가난한 시절에 책이 어딨어~! 그전까지 책이라는 건 구경도 못해봤지. 교과서 말고는. 그러다가 열 살 때 니네 작은외삼촌이 나를 만화방에 데리고 간 거여. 그게 시작이었지. 호호호.”     


동분은 만화방에서 충격을 받았다. 살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하여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이 만화책에 펼쳐져 있었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동분은 바다 깊은 곳에 갔다가, 우주에 나갔다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아프리카와 유럽에 갔다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 구석기시대에 갔다가 조선시대까지 두루 다녀왔다. 동분은 수중에 돈만 생겼다 하면 만화방으로 갔다. 


이 세상에 만화책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냐만, 나 또한 만화책 덕후로 동네에서 이름 꽤나 날린 역사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보람책방(도서 대여점, ‘영화마을’과 함께 양대 산맥이었다.)에서 장르 가리지 않고 수많은 만화책을 섭렵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명탐정 코난> 등은 당연히 서너 번씩 완독했다. 용돈 전부를 보람책방에 갖다 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성인만화방에 다녔다.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끼어 허영만의 타짜 시리즈를 시작으로 김성모, 박인권, 박봉성 등의 성인만화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만화책 덕후 DNA도 엄마에게 물려받았나 보다. 어쩐지 학창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읽어도 엄마가 잔소리 안 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2003년 2월, 나의 중학교 졸업식 때 우리 엉아 주성(당시 22살)과 함께.  한창 만화책에 빠져살던 시절이다. 


다시 돌아와 동분은, ‘머시매’들만 바글바글한 만화방에 홀로 끼어 만화책을 탐독해나갔다.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만화책 읽다가, 언니한테 끌려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 없어도 그냥 거기서 사는 겨. 머시매들 읽고 있으면 그 옆에 앉아서 같이 읽고, 저쪽 구석 가서 몰래 읽기도 하고. 주인아저씨도 다 아는데 그냥 눈감아주는 거지. 호호호.”     


저녁 먹고 나면, 동분과 친구들은 한 집으로 모였다. 작은 방에 이불 하나를 펼쳐놓고 빙 둘러앉았다. 그 이불 밑으로 하나같이 다리를 쭉 집어넣고 동분의 입만 바라봤다.     

 

“엄마가 그때는 만담꾼이었어. ‘자 그러면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나~!’ 하면서 시작하는 거지. 그동안 만화책에서 읽었던 내용에 살을 붙여서 즉흥적으로다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겨. 뭐, 우주 괴물 나오고, 조선 호랑이 나오고 외계인이랑 싸우는 그렇고 그런 얘기 있잖어. 호호호. 그게 일과였어. 학교 끝나면 만화방 가서 만화책 읽고, 저녁 먹으면 친구 집에 모여서 애들한테 얘기해주구.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재미로 만화방에 더 갔던 거 같어. 애들한테 얘기해주려면 엄마도 소재가 있어야 할 것 아녀. 말하자면 그거 수집하러 간 거지.”    

 

그렇게 즐거운 나날 보내던 12살 동분에게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동분보다 8살 많은 언니가 결혼하게 된 것.           






무엇보다 무서운 건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  


동분 아버지는 술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밥벌이 했다. 아버지가 무능하니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하고, 그러자니 누군가는 또 어머니 대신해 살림 책임지고 막내 여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동안은 동분의 언니가 그 역할 해왔다. 동분의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일찌감치 독립한 상태였다. 동분 나이 12살, 국민학교 5학년 때 언니가 결혼했다. 어머니 대신하던 언니가 출가해버렸으니, 남은 건 동분뿐이었다. 동분이 학교 그만둘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런 시절이었다.      


“엄마가 몇 번 얘기했잖어~! 니네 작은이모는 내가 업어 키웠다고. 엄마 12살 때 니네 작은이모가 4살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어린애가 더 어린애를 키운 겨. 그때부터 엄마가 살림하고 밥하고 그랬어. 니네 작은이모 한글도 가르치고.”     


동분은 14살 될 때까지 집안 살림 챙기고 동생을 돌봤다. 그런 동분에게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보다,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보다,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어린 여동생보다 무서운 게 있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     

 

“그때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딸린 셋방 집에서 아부지랑 엄니랑 나랑 니네 작은이모랑 넷이 살 때였거든. 어둑어둑해지면 니네 외할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서 오는 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어. 저 멀리서부터 소리 지르는 게 들려. 그러면 니네 작은이모 손잡고 후다닥 뒤뜰에 가서 숨었어. 왜 숨긴? 소리 지르고 주정 부리니까 무서워서 숨는 거지. 아무튼 간에 평소엔 새색시인데, 술만 마셨다 하면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 집에 들어오면 ‘이놈의 지지배들 다 어디 갔어!!!!’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아휴~! 동네에서 니네 외할아버지 모르는 사람 없었어.”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한다. 동분의 아버지 정명식(당시 50대)과 어머니 김춘자(당시 40대 초반). 대전 보문산 시민공원에서 찍은 사진. 



동분의 아버지는 한참을 혼자 ‘궁시렁궁시렁’ 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제야 동분과 동생은 ‘살곰살곰’ 방으로 돌아왔다. 그 좁은 방에서 숨죽인 채, 일터에 나간 어머니가 어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곤 했다. 그런 나날이었다. 끔찍하고 지옥 같았다.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았던 안집 주인 할머니가 어느 날 동분 불러다 이렇게 말하더란다.       


“동분아, 할무니의 여동생한테 딸이 하나 있어. 나이가 28살인가 그려. 그 딸이 시내에서 남편이랑 서점을 하거든? 그 집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두 사람 다 서점에 붙들려 있으니까 애 봐줄 사람이 마땅찮은 가벼. 너 여기 있지 말고, 차라리 그 집 가서 애도 좀 봐주고 살림도 해주고 너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으면서 지낼래? 너 안쓰러워서 하는 얘기여~!”     


동분은 어린 동생 혼자 두고 가야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아니면 이 지옥 같은 집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동분은 어머니, 아버지 허락 받고 보따리를 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는 제법 큰 서점으로 손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대전 중구 은행동의 동아책방. 그 사장 댁으로 들어간 거다. 1974년, 동분 나이 14살이었다.      


“동아책방이 어디 있었냐면, 너 그 시내에 이안경원 알지? 그 맞은편 건물 1층에 있었어. 사장님 댁도 그 근처였고. 서점에서 일한 건 아니고~! 14살 짜리가 뭘 안다고 책을 팔았겄어. 또 막상 사장님 댁에 가보니까 애 봐주고 살림해주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더라고. 그 아주머니 옆에서 일손 좀 보태고, 점심때 되면 도시락 싸서 책방 사장 부부한테 갖다 드리고. 그냥 책방이랑 사장님 댁 왔다 갔다 하는 잔심부름꾼이었던 거지 뭐. 용돈 쬐금 받고.”


당시 30대 중후반이었던 남자 사장은 동분을 친조카처럼 아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동분 사정을 잘 아는지라, 그 나이에 맞는 책을 골라 동분에게 권했다. 동분은 그 책으로 알파벳과 한문을 익혔다. 남자 사장은 가족여행 갈 때도 동분을 꼭 데려갔다. 동분은 그때 처음 ‘바다’라는 걸 구경했다. 


자신을 “야~! 이놈의 지지배야!”라고만 했던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 동아책방 남자 사장은 달랐다. 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교양 있는 말투와 친절한 마음씨로 자신을 대해줬다. 동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남자 어른도 얼마든지 멋지고 근사할 수 있다는 걸.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 그 결핍을 동분은 남자 사장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메웠다.     


“그때가 7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대학 나온 사람이 드물 때거든. 근데 사장님이 대학까지 나왔잖어. 더군다나 서점 경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 교양이 넘쳤겄냐. 엄마한테 엄청 잘해줬어. 지금도 가끔 사장님 생각 난다니까? 살아계시면 여든은 훌쩍 넘었겄네. 아무튼 사장님 댁에도 서재가 따로 있었어. 그 서재에 책이 또 얼마나 많았게. 사장님이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얼마든지 꺼내다 읽으라고 하더라고.”     


봄이 되면 사장 댁 마당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폈다. 그 향이 얼마나 진하고 그윽했던지, 동분은 지금도 그 시절 떠올리면 라일락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비록 학교에 다닐 순 없었지만, 하여 교복 한 번 입어볼 수 없었지만, 또 그리하여 책방 오가는 길에 스치는 또래 여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지만, 동분은 제법 덤덤하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꽃향기 가득한 마당에 앉아 소설책과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은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장 댁에서 동분은 김동인, 이광수, 김유정, 이태준, 김승옥 소설을 읽으며 웃을 수 있었다. 김수영, 신경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시를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헛헛할 때면 공책을 펴고, 시를 썼다.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사춘기 소녀의 울분과 설움 같은 걸 적었던 거 같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라일락꽃이 세 번 피고 다시 질 무렵, 동분은 동아책방에서 나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런 나이가 된 거다. 공장에 나가 돈 벌 수 있는 나이, 그렇게 집안 형편 보태야 하는 나이 말이다. 동분의 16번째 생일이 막 지난 때였다.     


      




대하소설로 태교를


만화방에서 세계를 여행하며 이야기 수집했던 만담꾼 꼬꼬마. 동아책방에서 수많은 소설과 시를 탐독했던 문학소녀. 딱 거기까지였다. 동분은 16살부터 쉴 틈 없이 공장에 다녔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다 송일영과 결혼했다. 그때부터는 세상의 거센 풍파를 온몸으로 때려 맞았다. 차분히 앉아 책을 읽는다? 당시 동분에겐 사치였다. 그럴 시간이면 차라리 모자란 잠을 더 잤다. 그 정도로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다 겨우 여유 찾은 게 작은아들 주홍을 임신했던 1986년이다. 동분 나이 26살이었다.      


“그때가 어떤 상황이었냐 하면 니네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면서 니네 형이랑 영희, 철수까지, 애들 셋을 엄마가 다 키울 때였지. 니네 큰아빠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큰엄마도 집 나가서 여전히 안 돌아왔을 때니까. 그뿐이냐? 니네 삼촌은 날이면 날마다 술 먹고 들어와서 난동 피우고. 그래도 애들이 다 유치원 다닐 때여서 낮에는 시간이 좀 남았어. 또 너 임신했을 때라 니네 할머니가 엄마를 좀 덜 괴롭히기도 했고.”     


동분은 오랜만에 다시 책을 폈다. 이때는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 황석영의 『장길산』 등 주로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었다.  

    

“너는 여명의 눈동자가 드라마인 줄만 알지? 아녀~! 그게 원래는 대하소설이었어. 엄마가 그거 읽으면서 얼마나 울고 웃었다고. 그거뿐이냐? 너 임신했을 때 아무튼 간에 대하소설 무쟈게 읽었어. 하루 죙일 읽으면서 저녁때 니네 아빠 오기만 기다렸다는 거 아니냐. 니네 아빠가 일 끝나고 집 올 때마다 한 권씩 빌려다 줬거든. 그러면 다음 날 또 죙일 읽는 겨. 호호호. 태교가 뭐 별거냐?”     






김성종 작가의 『여명의 눈동자』는 일간스포츠신문에 연재한 후, 1977년 전 10권으로 발간한 대하소설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까지 현대사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세 남녀의 치열했던 삶과 사랑을 다뤘다. MBC 창사 3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1년 10월부터 1992년 2월까지 방영했다. 채시라, 박상원, 최재성이 주연을 맡았다. 평균 시청률 44.3%를 기록했다. 편당 최고 시청률은 58.4%였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및 위키백과 참조.)      




과연 그렇다. 엄마와 나의 놀라운 평행이론은 계속 이어진다. 내 나이 24살 때다. 막 복학한 참이었다. 집이 가난해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시험을 잘 봐서 ‘성적우수장학생’이 되는 것. 드디어 시험 기간. 필사즉생 각오로 노트를 펼쳤다. 공부 시작하려던 그때! 도서관에서 빌려놨던 조정래의 『태백산맥』 1권이 하필이면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왔다. 왜 늘 그런 걸까. 공부만 하려고 하면 어수선한 집이 신경 쓰이고(그래서 괜히 청소하게 되고), 이제 진짜 시작해야지 하면 친구한테 전화가 오고(그럴 때면 꼭 통화가 길어지고), 오늘은 무조건 밤샌다는 각오로 책상 앞에 앉으면 평소엔 보지도 않던 EBS 다큐멘터리가 세상 재밌게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 말이다. 그 당시 난, 안 그래도 책에 미쳐서 살 때였다. 아는 사람은 아는 것처럼 『태백산맥』은 소설이 아니다. 마약이다. ‘워밍업할 겸 조금만 읽고 공부 시작할까?’, ‘그래 딱, 여기까지만 읽고 진짜 공부 시작한다.’, ‘오케이, 진짜 더 읽으면 내가 짐승이다, 딱 이 페이지만 읽고 시작하자.’ 그렇게 1권 읽고, 2권을 읽었으며, 3권을 막 읽고 있는데 싸한 느낌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망했구나…….’     


그때의 그 허탈하고 비참했던 심정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이래서 태교가 중요한가 보다. 여하간 엄마 뱃속부터 대하소설 읽었던 작은아들이 1987년 5월, 드디어 태어났다. 이놈의 작은아들이 나중에 커서 교복 입은 채로 담배 꼬나물고, 밥 먹듯 가출을 해댔다. 그래도 기자로 일하면서 결혼까지 성공해(?) 겨우 동분을 안심시키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하고 노가다를 뛰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6년째다. 그렇게 여전히 제 잘난 맛으로 사는 통에 동분 속을 단단히 썩이고 있으니, 그 문제적 작은아들이 바로 본인이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무슨 놈의 책 


동분은 아주 옛날부터 작은아들 주홍에게 동아책방 시절 얘기를 몇 번이나 들려줬다. 감수성 풍부했던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물었다. 당신 인생에서 동아책방은 어떤 의미였는지. 동분은 한참 고민한 끝에 이렇게 답했다. 그곳에서 시와 소설을 읽으며 사랑을 배웠고,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그런 사유의 과정이 있었기에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그때 처음으로 내 미래를 고민해봤던 거 같어. 내가 지금은 비록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다니고, 이렇게 책방 심부름꾼으로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 형편이 나아져 다시 공부도 하고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국문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멋진 시를 쓰는 문학도가 되고 싶었어.”      


마당에 앉아 책 읽던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사람, 시와 소설 읽으며 사랑을 배웠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사람. 그런 애틋한 기억 때문일까, 혹은 못다 이룬 꿈 때문일까. 동분은 두 아들에게도 교과서 공부보다는, 독서를 권하는 엄마였다. 그렇다고 강요한 건 아니었다. 책 읽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와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는 정도. “주홍이 책 읽는구나! 뭐 읽어?” 하고 관심 가져준다거나. 그런 엄마였다.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대전엑스포가 한창이던 1993년으로 간다.      




대전엑스포는 1993년 8월부터 11월까지 93일 동안 대전광역시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로, 대전세계박람회라고도 한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이었다. 자기부상열차와 태양열자동차 등의 첨단기술을 소개했다. 마스코트는 ‘꿈돌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을 비롯해 약 200개 중소기업이 참가했다. 외국에서는 108개국, 33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관람자 수는 약 1,400만 명이었다. 대전엑스포는 개발도상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박람회로 기록됐다.(두산백과 참조.)     




동분 가족은 그때 처음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사실 아파트라고 부르기 민망한 11평짜리 주공아파트였다. 거실 겸 안방이 하나 있었고, 두 사람이 누우면 더 이상 공간이 없는 아주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33살이었던 동분은 그때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았다. 남편 송일영은 개인택시를 굴렸다. 부부에겐 초등학교 5학년 큰아들과 7살짜리 작은아들이 있었다. 입에 겨우 풀칠하는 4인 가족이었다. 


요즘이야 어린이를 위한 동화전집이 워낙 흔하다. 중고서점과 당근마켓 등도 활성화되어 있어 얼마든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그땐 아니었다. 하드커버 동화전집이 귀했다. 가격도 매우 비쌌다. 부잣집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책이었다. 11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사는 동분 가족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땐 동화전집 가지고 다니면서 방문판매 하는 아줌마들이 많았어. 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엄마가 돈이 어딨겄냐.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외상으로 사는 겨. 그땐 그걸 월부라고 했어. 월부. 일단 책을 받고, 아줌마가 매달 와서 책값을 조금씩 받아 갔지. 엄마는 그렇게라도 니들한테 책을 사주고 싶었던 거여. 여하간 그렇게 책 산 날은 니네 아빠랑 대판 싸우는 날이었어.”     


송일영은 동분과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가난하게 살지언정 빚은 지지 말자는 게 송일영 생각이었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무슨 놈의 책이냐면서, 책이 밥 먹여주느냐고, 동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책 때문에 니네 아빠랑 얼마나 많이 싸운 줄 아냐? 그렇게 싸우다가 엄마가 지면 다음 날 아줌마한테 전화해서 도로 책을 가져가는 거고, 어떻게든 엄마가 이기면 그 책을 지키는 거고. 그렇게 몇 번 사줬던 거 같은데? 너 어릴 때 동화전집 많이 읽지 않았냐?”     


분명히 기억한다. 디즈니동화 100권과 만화로 읽는 한국의 역사 20권, 세계위인전 60권. 운동장에서 공 차고 노는 걸 좋아했던 형과 달리, 난 지독할 만큼 책 읽는 걸 좋아했다. 하여, 180권 모두 7살 꼬마가 독차지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에 책이라고는 그 180권이 전부였다. 난 하드커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 책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엔 내용을 전부 외워버릴 정도였다. 그러니, 그 180권이 지금의 날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엄마가 그러했듯, 나 또한 그 책을 읽으며 세상을 조금 알 수 있었고, 그보다 많은 걸 상상해볼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 배경에 엄마의 빛나는 투쟁이 있었다. 이제와 보니 과연 그렇다. 동분은 남편과 싸워 세 번 이겼고, 11평짜리 주공아파트에 하드커버 전집을 기어코 180권이나 쌓았다. 엄마 말이 옳았다. “너 글 써서 먹고사는 건 다 엄마 덕분이여.”라던 말. 아, 엄마가 국문과를 꿈꿨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2013년 2월, 작은아들 주홍의 대학교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 



“그럼 내가 국문과 들어갔을 때 기분이 남달랐겠네?”

“그럼~! 엄마 꿈을 대신 이뤄준 것 같아서 엄청 기뻤었지.” 

“왜 그땐 얘기 안 했어? 진작 얘기하지.” 

“뭘 그런 걸 얘기허냐. 다 옛날 얘기인데, 쑥스럽게.”     


살며 평생 효도 한 번 못 할 줄 알았는데, 효도 한 번은 한 셈이 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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