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주홍 Aug 12. 2023

엄니, 다 끝났어, 나 그 남자랑 잤어

#2 만남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행복한 신혼의 첫날을 맞았다. 얼마 안 된 단출한 살림이지만 난 이날을 무척이나 기다렸던가 보다. 그이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건가보다. 인연, 이상한 우리들이었다. 철없고 사랑이란 모르던 나. 그때의 그인 나에게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생을 알고부터 싹트기 시작한 정. 괴로운 나날들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오늘날 그이를 만나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이다. 알뜰하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아내가 될 것이고, 아이들의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언제나 마음속에 다짐하며 우리들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동분의 일기』 1982년 5월 22일 中


          




웬 머시매와 우리 형님


1978년, 동분 나이 18살 때다. 당시 동분은 주야 2교대 섬유공장에 다녔다. 야간 근무 끝내고 이른 아침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생이 동분을 붙잡았다. 대전에 사는 50대 이상은 혹시 알려나 모르겠다. 서대전네거리에서 옛 충남도청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무궁화백화점이 나온다. 지금도 그 건물이 있다. 그 자리가 40년 전엔 성보극장이었다.      


“그 성보극장에서 일요일마다 노래자랑을 했어. 일반인들 나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 동생이 나한테 ‘언니, 거기서 노래자랑한다는데 놀러 가보자.’ 하더라고. 그래서 따라나선 거지. 뒤에 서서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웬 머시매가 하나 쓱 오더니 ‘아가씨, 저 짝에서 우리 형님이 잠깐 보자는데요’ 하는 거여, 글쎄.”    

  

싫다고, 안 가겠다는 데도 거머리처럼 엉겨 붙는 통에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따라나섰다. 그렇게 동분과 동생, ‘웬 머시매’와 ‘우리 형님’이 다방에 마주 앉았다.      


“그 형님이라는 사람이 결과적으로다가 니네 아빠가 되는 건데, 호호호. 몸에 맞지도 않은 깜장색 가다마이를 쫙 빼입고 까만 구두까지 신고 왔더라고. 안에는 국방색 셔츠를 입었던 거 같은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니네 큰아빠 걸 빌려 입은 거랴. 머리는 단발에다가 건들건들해 보이더라고. 근데 또 말은 없어. 니네 아빠가 지금도 말주변이 없잖냐. 그냥 가만 앉아가지고 뒷주머니에 꽂아놨던 빗을 한 번씩 꺼내서 머리를 싹싹 빗어 넘기더라? 그 모습이 썩 나쁘지 않더라고. 깔꼼한 게 괜찮네 싶었지. 니네 아빠가 그래도 빠지는 인물은 아니잖어.”     


‘웬 머시매’와 ‘우리 형님’은 처음부터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딴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사이 ‘웬 머시매’가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동분과 ‘우리 형님’, 둘만 남았다. 일단 나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더니, 대뜸 버스에 올라타더라는 것. 그렇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에 내려 한참 걸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떨어졌다.  

   

“그때 엄마는 그냥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지. 신탄진에서만 살았으니까 대전을 아냐? 암 것도 모르지. 날은 자꾸만 어둑어둑해지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슬슬 무섭더라고.”     


여기서 잠시 ‘신탄진’이라는 동네를 설명해야겠다. 신탄진은 행정구역상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이다. 근데 그건 행정 편의상 지정한 거고, 지금도 신탄진 사람들은 그냥 신탄진이라 한다. 신탄진과 대전을 별개라고 생각하는 거다. 대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별도의 도시라고 해야 할까. 신탄진은 그런 특수성이 있는 동네다. 


그러니, 신탄진에서 공장만 왔다 갔다 하던 18살 소녀에게 어딘지도 모르는 대전 밤거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첫인상 나쁘지 않아 따라나섰던 낯선 남자는 저만치 훌쩍 앞서 걷고만 있으니, 그 속을 알 수 없어 더 두려웠을 것.      


“니네 아빠가 얼마나 응큼한지 아냐? 내가 아들한테 별 얘길 다 허네. 휘적휘적 걸어가던 니네 아빠가 여인숙 앞에서 딱 멈춰서는 거여. 엄마가 얼마나 놀랬게. 그때 엄마가 겨우 열여덟이었는데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겄냐, 뭘 해봤겄냐. 그때는 남자랑 한 번 자면 죽으나 사나 결혼하던 시절이었잖어. 여인숙 앞에서 니네 아빠는 들어가자, 나는 절대 안 된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지. 겨우겨우 뿌리치고 집으로 왔어. 그날 집에 가서 니네 큰외삼촌한테 얼마나 뚜두려 맞은 줄 아냐?”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여동생이 밤늦게 들어왔으니 큰오빠 정동근 입장에선 걱정도 되고, 화도 잔뜩 났을 터. 아이스하키 선수처럼 큰오빠가 삽자루를 들고 달려들었다. 올케가 말린 덕에 삽자루는 피했지만, 그날 동분은 태어나 처음으로 큰오빠에게 매질을 당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회초리 같은 걸로 나를 한참 때리더니 방에 가둬. 니네 큰외삼촌이 그러더라. 동분이 저거 내일부터 일 못 가게 지키라고. 방에서 한 발자국만 나오면 패 쥑여버린다고. 그래서 며칠 동안 일도 못 갔어. 그걸로 니네 아빠랑은 끝인 줄 알았지. 니가 생각해 봐라.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집에 안 보내줄려고 했으니까. 니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더군다나 니네 아빠 때문에 집에 늦게 가서 맞기까지 했으니, 인상이 좋게 남았을 리 있겄어? 나쁜 놈으로 낙인이 따~악 찍힌 거지.”


  

1978년, 공장 다니던 시절의 18살 동분(오른쪽).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칠 확률은



방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을까. 큰오빠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너 한 번만 더 늦게까지 돌아 댕기면 이 정도로 안 끝나는 줄 알어!!”라는 무서운 경고와 함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공장에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 형님’, 즉 송일영이 서 있었다. 동분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비볐다. 설마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엄마가 방에 갇혀있는 며칠 동안 매일 공장에 찾아왔던 모양이더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했더니, 그날 내 목에 걸려 있던 공장 출입증 카드를 봤다는 겨. 아휴. 그래서 나는 당신 만날 생각 없으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막 밀치고 후다닥 공장으로 들어갔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송일영이 공장 앞으로 찾아왔다. 동분은 난감했다. 공장 사람들 보는 눈도 있는데 괜한 소문이라도 퍼질까 두려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다방에서 커피 한 잔만 딱 하자는 송일영을 따라나섰다.     


“엄마가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어. 호호호. 얼굴도 순하니 괜찮고, 몸무게도 47kg이었으니까 적당히 늘씬했지. 군살도 없고. 키도 그때로 치자면 큰 편이었고, 무엇보다 비율이 좋았지. 엄마 다리가 지금도 길잖냐. 그래가지고 공장에도 엄마 좋다는 머시마들이 꽤 있었어. 호호호. 그러니까 니네 아빠도 엄마한테 완전히 푹 빠졌던 거여. 나 좋아해 준다는데 기분 나쁠 사람 어디 있겄냐? 그렇긴 한데, 아무튼 니네 아빤 아니었어. 나한테 완전 찍혔잖아, 나쁜 놈으로!”     


다방에 마주 앉은 송일영은 정식으로 연애해보자고 제안했다. 동분은 선뜻 알았다고 했다. 먼저 나서서 주말에 데이트하자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실은 모든 게 동분 계략이었다.      


“니네 아빠 성깔 너도 잘 알잖어. 그냥 물러날 사람이냐? 일단은 그렇게 약속한 거지. 니네 아빠가 우리 집 주소를 알았겄어,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았겄어. 아는 거라고는 내가 다니는 공장뿐이었으니까. 주말에 어디서 몇 시에 보자고 해놓고 안 나갔지. 공장도 그만 둬버리고. 니네 아빠는 분명 그날 데이트 장소에 나갔을 거고, 바람 맞았으니까 화가 잔뜩 나서 다음날 공장으로 쫓아왔겄지. 그럼 뭐하냐. 호호호. 엄마는 벌써 그만 뒀는데.”      


이제는 완전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그 남자를 설마 다시 보게 될까 싶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1980년, 동분 나이 20살이었다. 제화공장에 다녔다. 출근길이었다. 또각또각, 구두 신고 걸어갔다. 동분 옆으로 택시 한 대가 쌩 지나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쌩 지나갔던 택시가 저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스윽 후진해서 동분 앞에 딱 세우는 게 아닌가.      


“퍼런 셔츠에 기지 바지 칼주름 딱 잡아가지고, 허연 면장갑 쫙 낀 택시 기사가 내려서 ‘라이방’ 선글라스를 벗는데, 보니까 니네 아빠여. 엄마가 얼마나 깜짝 놀랬게.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지. 2년 전에 그렇게 바람맞히고 도망치듯 공장 그만뒀던 거니까 이 남자가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무서워가지고.”  

  

예상과 달리, 송일영은 영국 신사처럼 젊잖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그럴 게 그사이 2년이 흘렀다. 송일영 나이도 어느덧 26살. 백수건달로 동네 주름잡고 다니던 시절은 지났던 거다.      

 

“니네 아빠 한다는 말이, 자기가 변변한 직업이 없어서 차였나 싶은 생각이 들더래. 그뒤로 운전 배우기 시작해서 회사택시를 몰았다는 거여.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냐. 어림도 없지. 니네 아빠가 종이에다가 뭘 적더니 나한테 툭 주더라?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거 자기 집 주소니까 편지 써 달래. 그러고는 쿨하게 가는 겨~ 택시가 슉 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종이를 벅벅 찢어 내삐렀지. 내가 미쳤냐? 너한테 편지를 왜  쓰냐? 흥! 하면서. 호호호.”      


한반도가 반으로 뚝 갈라지고 안 그래도 좁은 땅이 더 좁아졌다지만,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출근하는 동분과 택시 몰던 송일영이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로또복권 1등에 당첨돼 펄쩍펄쩍 뛰다가 벼락 맞아 죽을 확률쯤 될까. 2년 전, 몇 날 며칠을 쫓아다녔어도 끝끝내 차였던 송일영이 자기 집 주소 덜렁 적어주고 무심하게 퇴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이렇게 마주칠 정도면 운명이구나, 오늘 당장 이 사람에게 확답을 못 받아도 분명 다시 만날 것이다, 뭐 이런 확신 말이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또다시 재회한다. 


1980년, 20살이었던 동분(맨 왼쪽)과 조카, 동생과 함께. 






포니를 끌고 나타난 남자 



시간은 다시 흘러, 1982년 동분 나이 22살이었다. 그때 동분은 언니 정동순 집에 얹혀살았다.     

 

“야, 말도 말어. 그 좁은 집에 아부지, 어무니 있지, 니네 큰외삼촌이랑 외숙모 있지, 그 사이에 새끼가 둘이나 있지, 거기에 나, 내 밑으로 여동생 있지. 여덟 식구가 한 집에서 바글바글하는데, 얼마나 답답했겄냐. 니네 작은이모야 그때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상관없지만, 엄마는 스물이 훌쩍 넘은 처녀인데, 그 집에 있고 싶었겄냐. 그래서 니네 큰이모 집으로 들어간 겨.”     


그때 동분의 언니는 30살. 결혼해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 모시며 살았다. 그래도 그 집은 형편이 좀 괜찮았다. 식구도 적었다. 무엇보다도 형부가 동분을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줬다. 그래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운명의 그날은 설날이었다. 종갓집 며느리인 언니 따라 부지런히 술상을 차렸다. 술상 차리기 무섭게 손님이 또 오고, 그 손님 나가기 무섭게 또 다른 손님이 왔다. 부엌에서 겨우 한숨 돌리는 찰나, 거실에서 “손님 왔으니 술상 좀 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니네 큰이모가 부엌에 들어오면서 ‘저기 아자씨 왔네, 아자씨.’ 이러는 겨. 그래서 누가 왔나 힐끔 봤더니, 세상에나. 니네 아빠가 거기에 떡하니 서있는 거 있지. 그래가지고 내가 ‘미쳐 미쳐 어뜩해 언니, 나 어뜩해. 얘기했잖어, 예전에 그렇고 그런 사람 있었다고, 그 사람이 저 사람이여,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상황 설명 좀 해야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송일영은 어쩌자고 동분의 언니 집에 세배를 하러 온 걸까. 상황이 복잡하다. 여기서 핵심 인물은 동분의 형부다. 동분을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줬던 그 형부 말이다. 그 사람 이름이 송인대다. AI가 바둑 두는 세상에 촌수를 따질 수밖에 없어서 참으로 송구스럽지만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은진 송(宋)씨 25대손 송인대는 은진 송(宋)씨 24대손 송일영의 아들뻘이다. 하여, 송일영은 송인대의 어머니(송일영에겐 형수뻘이자 송씨 집안의 큰 어른)에게 세배하러 온 거였다. 


그럼 또 이런 의문이 든다. 은진 송(宋)씨가 적지 않을 텐데, 그 많고 많은 은진 송(宋)씨 집안 가운데 송일영은 왜 하필 송인대 집에 인사하러 온 걸까. 상황은 또 이렇다. 2년 전, 동분과 송일영이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만 해도 동분은 신탄진에, 송일영은 대전에 살았다. 그랬던 송일영 집안이 그즈음 송인대가 사는 신탄진 은진 송(宋)씨 집성촌 주변으로 이사 왔던 것. 그러니까 송인대와 송일영은 윗동네 아랫동네에 사는 이웃사촌이자, 같은 집안사람이었다. 관계가 이렇게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그런 사정으로 동분과 송일영은 또다시 운명처럼 만났다. 동분 나이 18살에 처음 인연 맺고, 20살에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가, 22살에 또다시 극적으로 재회한 것이니, 고무줄보다 질기고 질긴 이 인연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니네 아빠도 나를 딱 알아보더라고. 니네 아빠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여. 그때부터 또 들이대기 시작하는데 그 사연이 한 보따리여.”     


그러면 여기서 또 잠시, 그때의 송일영 이력을 살펴야겠다. 24살에 백수건달로 동분 꼬시려던 송일영은 26살부터 회사택시 굴렸다. 28살인 이 시점엔 대한생명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화생명 전신인 대한생명은 그때도 대기업이었다. 서울 본사만으로는 관리가 안 돼서 전국팔도에 지사를 세웠다. 각 지사를 총괄하는 지사장에겐 고급 승용차 한 대와 수행비서 한 명씩 딸렸다. 당시 대한생명 충청북도 지사가 청주에 있었다. 회사택시 몰던 송일영이 대한생명 충청북도 지사장 수행비서로 덜컥 취직되었던 것. 하여, 한두 달 안에 청주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 동분과 재회한 거다. 그러니 이번에 동분을 놓치면 끝이라고 생각했을 터. 그때부터 송일영은 집안사람을 총출동시켰다. 그 첫 번째가 송일영의 작은누나 송준영이었다.      


“니네 작은고모랑 큰이모가 하필이면 또 동네에서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였나 봐. 난 전혀 몰랐지. 그런 거 보면 니네 아빠랑 나는 어떻게든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 같어. 아무튼 그때부터 작은고모가 문지방 닳도록 우리집에 들락거리는 거 있지. 니네 아빠가 시켰다는 겨. ‘누나, 인대 마누라 동생이 내가 옛날부터 알던 아가씨인데, 그 아가씨가 지금 인대네 집에 와있더라. 난 그 아가씨랑 무조건 결혼해야 겄으니까 누나가 가서 좀 어떻게 해봐라.’ 그랬다는 겨. 작은고모가 큰이모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두 사람이 쿵짝이 되어가지고는 나를 꼬시기 시작하더라고. 근데 또 웃긴 게 뭔지 아냐? 호호호. 작은고모가 그렇게 왔다 갔다 하더니, 한날은 니네 친할아버지가 와. 말도 안 붙여. 슥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슥 가. 니네 아빠가 보냈겄지. 그러고 또 며칠 있다가 니네 할머니가 슥 와. 또 차 한 잔 마시고 가. 니네 큰고모가 또 오고. 다들 나한테 말도 안 붙여. 그냥 슥 와서 내 얼굴 한 번 보고 가는 겨. 니네 아빠가 온 집안사람을 들들 볶은 겨. 빨리 가서 얼굴 보고 오라고. 그 집 아가씨랑 결혼할 거라고. 니네 아빠도 그런 거 보면 대단햐.”     


언니 등쌀에 못 이겼던 동분은 결국, 송일영과 정식 맞선 자리에 나갔다. 그 사이 송일영은 벌써 수행비서로 취직한 상황. 동분 두고 청주로 떠날 수 없어, 그 먼 거리를 출퇴근하며 이사를 미뤘다. 다방 앞에서 만나기로 한 송일영이 저 멀리서 포니(물론, 지사장 수행 차였다.)를 끌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동분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보였다. 오픈카 타고 헌팅 하는 철부지 오렌지족처럼.      


현대 포니(Hyundai Pony)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다. 이 자동차로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세계적으로는 16번째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든 국가가 됐다. 1976년 1월부터 판매했다. 당시 신차 가격은 230만 원 정도였다. 1985년 12월까지 생산했다.(위키백과 참조.)      


“엄마는 차를 잘 모르잖냐. 니네 아빠 말로는 그 당시 신탄진에서 포니는 니네 아빠가 몰고 다니는 그거 딱 한 대였데. 그때가 1982년이니까. 아무튼 그때 니네 아빠가 벌써 28살이어서 그런가, 24살 때 가다마이 입고 빗질하면서 엄마 꼬시던 때랑은 또 좀 다르더라고. 원래도 말이 많은 양반은 아니었는데, 더 점잖아진 것 같기도 하고. 니네 아빠 얼굴이야 뭐 처음 봤을 때부터 나쁘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모래시계의 이정재 같은 느낌이었던 거 같어. 직업도 이정재랑 비슷하고, 분위기도 그렇고. 과묵하면서도 샤프한 느낌 있잖어. 알지? 그런데다가 월급도 25만 원이나 받는다고 하니까. 엄청 큰돈이었지.”      


『종합물가총람』(한국물가정보센터 편집부, 2015)에 따르면 1982년 짜장면 가격은 529원이었다. 2023년 기준, 내가 종종 시켜먹는 대전 동구의 중식당 짜장면 가격은 7,000원이다. 1982년 대비 약 13배 올랐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당시 송일영 월급은 325만 원의 값어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분 말마따나 ‘엄청 큰돈’은 아니어도 28살 직장인이 초봉으로 받은 월급치고는 제법 컸던 것 같다. 

    

동분과 송일영의 가계도.



       

1982년, 22살의 동분과 28살의 송일영. 뒤로 보이는 차가 당시 송일영이 끌고 다녔던 포니다. 






엄니다 끝났어나 그 남자랑 잤어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던 사람과 어떻게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나로선 그 감정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또한 “그냥 운명인가 보다, 하고 만난 거지 뭐.”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무리 우연적인 만남을 몇 차례 반복했다 해도, 서로의 집안이 얽히고설킨 관계여서 의지와 다르게 떠밀린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운명’으로 눙치고 넘어가기엔, 감정의 점프가 너무 큰 거 아닌가?


나는 1982년, 22살의 동분을 생각했다. 매일 같이 술에 절어 제대로 된 가장 노릇 한 번 안 해본 아버지, 그런 아버지 대신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깥일해야 했던 어머니, 거기에 줄줄이 딸린 식구들까지. 그 구질구질한 생활이 싫어 언니 집으로 도망치듯 오긴 했지만, 그런다고 동분의 삶이 버라이어티하게 변화하진 않았을 거다.


밥벌이해야 했던 어머니 대신해 동분은 일찍부터 막내 여동생을 돌봤다. 동분이 국민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 뒤로도 여러 공장 전전하며 집안 살림 보태왔다. 그렇게 22살이 되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동분은 그때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삶이 대단하게 혹은 눈부시게 빛날 거라고, 스스로에게 기대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런 동분 앞에, <은행나무 침대> 황 장군도 울고 갈 뚝심 송일영이 서 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운명과 우연을 넘나들며 어쨌건 지고지순하게 동분을 쫓아다녔다. 그런 사람이 결혼하자고 했을 때, 동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또한 모를 일이다. 


꼭 죽고 못 사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닐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혜은이의 노래 <열정> 가사처럼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은 아닐 거다. 같이 있지 못해도 참을 수 있고, 보고 싶을 때 못 봐도 눈멀지 않는 사랑도 있다. 사랑에 정답은 없을 테니. 그렇기에 동분 또한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그러엄~! 그래도 그때는 정말로 니네 아빠를 사랑했지. 막상 살아 보니 꽝이었지만. 호호호. 엄마가 니네 외할아버지를 보고 컸잖냐. 맨날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월급봉투는 술집에 다 갖다 주고, 그것 때문에 울 엄니가 얼마나 고생했게. 근데 니네 아빠는 지금도 그렇지만 성실한 거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사람 아녀~! 그런데다가 술도 안 마시고. 맞어, 그러고 보니까 그게 컸어. 니네 아빠가 이날 이때까지 술 마시고 사고 친 적은 없잖어. 그래서 결심한 거지. 아,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래도 마음 고생은 안 하겄구나. 그런 믿음직한 모습을 사랑했던 거여.”      


질질 끌어왔던 운명의 시간과 비교하자면 연애 기간은 이등병의 백일 휴가만큼이나 짧았다. 불과 두어 달 남짓. 얘기했듯, 송일영은 동분을 두고 청주로 떠날 수 없었다. 하여, 먼 거리 출퇴근하며 이사를 미뤘다. 동분 마음을 확인한 이상, 하루빨리 함께 청주로 가고 싶었을 것.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래도 아쉬우니, 그때의 연애 이야기를 잠시 따라 가봐야겠다.     


“엄마는 그 당시 다니던 공장 그만두고 잠깐 쉬던 상황이었어. 그러다가 니네 아빠랑 정식적으루 연애를 시작했던 거니까, 시간적으로 여유가 좀 있었지.”     


그에 반면, 송일영은 회사 생활 편하게 했다. 말이 좋아 수행비서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 일찍 지사장 집 앞으로 가 회사에 모셔다드리고, 중간에 큰 볼일 없으면 퇴근 때까지 ‘대기’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송일영과 데이트하기 위해 동분은 이따금 시외버스 타고 청주로 갔다. 오전 11시쯤 송일영 만나 함께 점심 먹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옷 구경도 하고, 다방에서 차도 마셨다. 오후 6시쯤 송일영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 지사장을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오면, 함께 포니를 타고 신탄진으로 퇴근했다. 그 시절을 송일영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는 니네 엄마가 아빠를 더 사랑했었지. 맨날 시외버스 타고 아빠 만나러 왔었으니까. 허허허.”     

 

물론, 동분 의견은 다르다.     


“웃기시네. 몇 번 안 갔거든? 흥~!”     


그런 나날이었다. 이 세상 모든 햇살이 오직 22살 동분과 28살 송일영만을 비추던 나날. 그날의 석양도 그렇게나 아름다웠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붉으스름 하니, 뭔가 좀 묘하게 감동적이더라고. 조수석에 앉아 하염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지. 신탄진에 거의 다 올 때쯤이었나? 니네 아빠가 내 손을 슥 잡더니 이런다. 청주 가서 같이 살자. 그게 다여~!!! 니네 아빠가 그렇게 무드가 없어. 이날 이때까지 장미꽃 한 다발 사준 적 있는 줄 아냐?”    

 

상장 앞둔 벤처기업처럼 탄탄대로만 걸을 줄 알았던 두 사람 관계에 제동 건 이가 있으니, 바로 동분의 작은오빠 정동운이다. 


이 시점에서 동분의 형제자매 관계를 다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동분은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첫째는 동분보다 8살 많은 정동순. 동분와 송일영 만남을 주선한 바로 그 언니다. 둘째는 정동근.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 대신한 실질적 가장이었다. 송일영 때문에 동분이 늦게 들어왔던 날, 동분에게 매질한 바로 그 큰오빠다. 이즈음 큰오빠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떠난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와 카이바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진출을 시작했다. 1976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 공사를 수주하며 본격적인 ‘중동 건설붐’이 시작됐다. 이후로도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공사, 대우건설의 파키스탄 고속도로 건설 등 1985년까지 700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했다. 한편, 1976년에 사단법인 ‘해외건설협회’가 설립했는데, 이곳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해외에 취업한 건설노동자가 1978년에 8만 4,000여명, 1982년에 17만 1,000여명까지 증가했다. 이 가운데 90% 이상이 중동 건설에 파견된 노동자였다.(<우리역사넷> 참조.)


셋째는 정동운.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와 사우디로 간 큰오빠 대신해 이즈음 집안 가장 노릇을 했다. 그리고 다섯째 정현희. 동분이 업어 키운 막내 여동생이다. 


그럼, 동분의 작은오빠는 두 사람 결혼을 왜 반대했을까. 송 씨 집안의 구구한 내력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은진 송(宋)씨 안주인, 그러니까 송일영의 모(母)로 말할 것 같으면 훗날 90살까지 무병장수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가는 그날까지 하루 담배 두 갑씩 태우면서 둘째 며느리 괴롭히는 재미로 살았다나 뭐라나. 여하간 그 팍팍하던 시절에도 새벽 닭 울기 무섭게 일어나 찬물로 머리를 감고, 참빗으로 곱게 쓸어 올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온 집안 문과 창문을 열어 제치고 이불을 죄다 걷어와 탈탈 털어 마당에 널어놓은 후에야 아침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 꼬장꼬장한 성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 집안에 딸이 둘이고, 아들이 셋이었는데, 이 삼형제가 대단들 했다. 첫째 송갑영은 툭하면 주먹질이요, 막내 송삼영은 허구한 날 술이었다. 그나마 둘째 송일영이 사람 구실을 좀 했는데 핏줄은 타고난 거라, 그 성질은 어디 안 갔다. 하여, 그 동네는 물론이거니와 옆 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송씨 삼형제라고 하면 혀부터 찼다. 지나가던 개도 그들을 보면 꼬리를 바짝 내리고 벌벌 떨다가 끝끝내는 오줌을 지렸다나. 


신탄진이라는 촌동네가 무슨 워싱턴이나 런던이 아닌 이상에야, 한 다리 건너면 친구요, 선배고 후배였다. 더욱이 동분 작은오빠와 송일영이 겨우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니, 동분 작은오빠도 송일영을 비롯한 송씨 삼형제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모양. 작은오빠가 동분에게 그러더란다.      


“야, 동분아. 동네 사람들은 삼형제 가운데 그나마 둘째가 괜찮다고들 하는데, 내가 그 송일영이라는 사람, 오가며 안면이 좀 있걸랑? 근데 그 사람도 성깔 보통 아니여. 너 인마, 아무튼 간에 그 집안으로 가면 인생 조지는 줄로만 알어. 큰형도 외국 나가 있는 판에 뭐 급하다고 서둘러. 다 동분이 너 생각해서 하는 얘기니께 쓸데없는 소리 말어.”     


가장 노릇하는 작은오빠가 반대하고 나선 거다. 그런 시절이었다. 이때 송일영은 정면 돌파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동분에게 그러더란다. 작은오빠 한 번 만나서 설득해보겠다고. 동분과 작은오빠, 송일영이 식당에 마주 앉았다. 동분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니네 작은외삼촌이 술만 안 취했어도 엄마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건데……. 에휴~!”      


유전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송일영은 살면서 술이라는 걸 마셔본 역사가 없는 사람인데, 그 피가 고스란히 그의 작은아들이자, 이 글 쓰는 나에게 왔다. 인생을 술로 허비한 동분 아버지 핏줄은 고스란히 동분의 작은오빠가 물려받았다. 송일영과 마주한 동분 작은오빠는 밥술 뜨기 전부터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는 이 결혼 반대요.” 

“아니 왜 반대야!” 

“아무튼 나는 형님이 싫어요.” 

“아니, 그러니까 왜~!”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사이, 동분 작은오빠는 점점 혀가 고부라졌다. 술 한 잔 입에 안 댄 송일영은 냉수마찰한 수도승처럼 정신이 점점 맑아졌다. 식사 끝내고 다방으로 자리 옮겼을 때, 동분 작은오빠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니네 작은외삼촌이 한창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니네 아빠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니만, ‘동분아, 나가자.’ 이러는 겨. 그날 진짜로 영화를 찍었다니께. 니네 작은외삼촌은 비틀비틀 하면서 쫓아오지, 니네 아빠는 내 손을 잡아끌면서 도망가지. 엄마도 에라 모르겄다, 니네 아빠 손 꼭 잡고 냅따 뛴 거지. 호호호. 너 그, 신탄진에 한일병원 알지? 그 자리가 옛날엔 야트막한 산이었어. 니네 아빠랑 나랑 그 산으로 막 뛰어 올라갔다니까? 호호호. 그렇게 멀리 돌아서 다시 신탄진으로 들어온 거여. 헐레벌떡하면서.”     


작은오빠 따돌리기 위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산으로 뛰어 올라가던 두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졸업>(1967)이라는 영화가 있다. 드레스 입고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오는 포스터로 더 유명한 영화다. 영화 엔딩씬, 결혼식장에서 무작정 뛰쳐나온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안의 꽉 찬 승객들 시선은 아랑곳 않고, 맨 뒷자리로 우적우적 걸어간다. 마침내 자리에 앉고, 카메라는 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때 두 사람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설렘과 떨림, 이제부터 믿을 건 오직 상대방뿐이라는 굳건한 마음 같은 거. 그런 복잡 미묘한 심정 아니었을까. 동분과 송일영이 서로의 손을 더욱 맞잡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엄마 손을 얼마나 꼭 잡고 뛰던지, 나중엔 손가락이 다 얼얼하더라니까. 니네 아빠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여. 이대로 이 사람 집에 보내면 놓칠 수도 있겠구나. 신탄진 시내로 다시 돌아와서 숨을 고르는데, 니네 아빠가 그러더라? 오늘, 같이 있자고.”     


그날, 동분과 송일영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와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마침내 ‘역사’를 썼다. 다음 날 아침, 집에 돌아온 동분은 어머니를 붙잡고 이렇게 얘기했다.     

 

“엄니, 이제 다~ 끝났어. 어제 그 사람이랑 외박도 했고, 잠을 안 잤으면 모르겄는데 잠을 잤기 때문에 이제는 같이 사는 수밖에 없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