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동분 씨를 처음 만난 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작은아들이 반갑지도 않은지, 엄마는 자꾸만 시계를 봤다.
“왜? 어디 가야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뿌리공원에서 축제하는데, 오늘 장민호, 그 왜~! 트로트 가수 있잖어. 갸 온다고 해서, 거기 가야 돼.”
“비가 이렇게 오는데 무슨 축제야?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우비 입으면 괜찮어. 별로 춥지도 않은데 뭘~!”
“장민호가 누구길래, 그 사람이 그렇게 노래를 잘해?”
“아니???!!”
“근데 왜? 그 사람 어디가 좋은데?”
“잘생겼잖어.”
“응??”
“잘생겼다고! 몰랐어? 엄마는 잘생긴 남자가 좋아. 호호호.”
뜨악했다. 몰랐다. 엄마가 잘생긴 남자 좋아한다는 걸. 하긴, 엄마도 송주홍의 엄마이기 이전에, 송일영의 아내이기 이전에 여자였는데 말이다. 그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20살 대학생처럼 콧노래 흥얼거리며 곱게 화장하는 엄마를, 나는 한참 넋 놓고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 미뤄왔던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 쓰는 걸 업으로 하는 아들로서, 엄마의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주 오래전이다. 어릴 때부터 파편적으로 들어온 엄마의 지난 세월은 이미 그 자체로 소설이었다. 나는 그저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곧 망설였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엄마의 아들로 38년을 살았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혹은 송일영의 아내. 그 이상의 모습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두려웠다. 내가 우리 엄마의 삶을, 아니 1961년생 정동분 씨의 생애를 온전히 그릴 수 있을까?
그날 난 마침내 엄마가 아닌, 1961년생 정동분 씨를 만났다. 외출 준비로 바쁜 동분 씨에게 정식으로 제안했다.
“동분 씨, 저랑 인터뷰하실래요?”
<61년생 정동분>은 이렇게 시작한 작업이다.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이 시점 나에게, 또 당신에게 1961년생 동분 씨 생애는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가난한 집 넷째 딸로 태어나, 평생 장미꽃 한 번 사준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해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모시고, 두 아들 키우다 마침내 늙어버린 삶이다. 그게 전부다. 의도적으로 친구와의 추억을 묻고, 좋아했던 연예인과 소설책에 관해 묻는다. 다녔던 여행지와 취미에 대해서도 듣는다. 한계가 있다. 이러나저러나 1961년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를 지나온 여성과 그를 중심에 둔 가족 이야기다.
그에 반해 2024년 대한민국은 어떤가. ‘남녀평등’을 넘어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배운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성평등’이라고 말한다. 이미 존재했지만, 나와 당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성소수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마땅하고 옳은 흐름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배웠다. 성인이 된 뒤엔 남자도 집안일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요즘은 집안일에 남녀가 따로 있느냐고, 누가 누굴 돕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거라고 말한다. 이 또한 마땅하고 옳은 말이다.
몇 년 전, 우엉․부추․돌김 세 작가가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900KM, 2020)을 펴냈다. 남성 1인과 여성 2인이 공동명의로 땅 사고, 자신들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같은 해, 홍승은 작가는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낮은산, 2020)라는 책을 냈다. 당시엔 용어조차 생소했던 ‘폴리아모리’ 즉, 비독점적 다자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성 1인과 남성 2인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이슬아 작가는 『가녀장의 시대』(이야기장수, 2022)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가부장이라는 단어에 있던 ‘부(父)’ 대신 ‘녀(女)’를 넣은 가족 이야기다.
과거 언제까지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 자식 낳고, 남자는 밖에서 돈 벌어오고 여자는 살림하고 자식을 돌봤다. 그게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위의 책들은 ‘정답’이라고 여겼던 과거와 작별을 고한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제안한다. 성소수자의 삶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슬아 작가는 『가녀장의 시대』 에필로그에서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그렇다. 바야흐로 2024년 대한민국은 ‘새 시대’다. 물론,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가 여전히 차별받는다. 페미니즘의 ‘페’만 꺼내도 눈에 쌍심지 켜고 급발진 하는 남자가 내 주변에만 세 트럭 이상이다. 갈 길 먼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분 씨가 살아온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변했는데 나 홀로 철 지난 이야기 붙들고 씨름하는 건 아닌가? 내 글이 혹 구시대적인 여성상을 찬양하는, 그리하여 시대를 역행하는 글로 비치진 않을까? 또 혹시 누군가는 멍청하게 왜 희생만 하며 살았냐고, 동분 씨를 비난하진 않을까? 나로 말미암아 동분 씨 삶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날 주저하게 했다.
26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믿어줄까. 난 요즘 그 여인에게 푹 빠졌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이야.
스물셋에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그 뒤로 두어 달에 한 번, 바쁘게 직장 생활할 땐 명절에나 겨우 본가를 찾았다. 전화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바쁜 아들 시간 뺏을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동분 씨가 전화했다. 그때마다 난 서둘러 끊기 바빴다. 애인이랑은 한 시간씩도 통화하면서.
그러니, 모자지간이라고 해봐야 어떤 면에선 친구나 애인보다도 서로를 더 몰랐다. 물론, 동분 씨는 내 표정만으로 모든 걸 파악해내는 듯 하지만. 적어도 난 그랬다. 특히 내가 독립한 이후 동분 씨의 삶(그러니까 동분 씨 50대 이후)에 관해, 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난 2년 동안 매월 한두 번 동분 씨를 만났다. 스물한 번 인터뷰했다. 녹음파일 확인해 보니, 총 2,303분(38시간 23분)이었다. 중간중간 수십 번은 더 전화해 추가 인터뷰했다. 그 시간까지 더하면 40시간은 족히 넘으리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거의 매일 2시간 이상, 주말엔 보통 4~5시간 원고를 쓰고, 또 다듬었다. 녹음파일을 문서화하고, 주제 고민하고, 질의서 준비하고, 원고 쓰기 위해 구상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지난 2년 동안 약 1200시간(600일X2시간+α)은 올곧이 동분 씨 생각만 했다.
주말에 친구 만나도 동분 씨 얘기만 했다. 오죽하면 “마마보이냐? 서른여덟이나 처먹은 놈이 종일 ‘엄마. 엄마, 엄마’ 하고 자빠졌네.”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얼마 전엔 일터에서 ‘그때 동분 씨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열다섯의 동분이 읽었다던 소설책을 찾아 읽었다. 20살의 동분이 만났던 그 남자(송일영 씨, 나의 아버지다.)를 괜히 원망했다. 어떤 글에선 “그날 나는, 할 수 있다면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25살의 동분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달려가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라고 썼다. 이 정도면 상사병 중증이다.
과거의 나에게 누군가 “당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치자. 머리로는 “당연하죠.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 낳아주고 길어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요?”라고 답했을 거다. 근데, 내 가슴까지 진심이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으레 부모를 사랑하라고 배웠다. 그래서 나 또한 당연히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말하자면 나에게 엄마를 사랑한다는 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거나 새치기하지 말자 같은 ‘참’인 명제였다. 너무 당연해서 깊게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그러하다고 여기는 것.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수줍게 고백할 거다.
“저보다 26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어요. 우리 엄마, 동분 씨를 말이에요.”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작업 진행하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 ‘지금 이 시점, 나에게, 또 당신에게 1961년생 동분 씨 생애는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으로 말이다.
이 책은, 38살이나 먹고도 여전히 철들지 못한 아들이 마침내 엄마의 삶에 가닿는 가족 드라마다. 38살 남자가 64살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로맨스로 봐도 무방하다. 그 여정에, 당신도 함께했으면 좋겠다.
난 우리나라 경제가 호황이던 1987년 태어났다. 12살 때 IMF를 어설프게 경험했다. 학창 시절엔 다마고치와 닌텐도를 갖고 놀았다. 24살에 처음 스마트폰이라는 걸 접했다. 이젠 제법 능숙하게 다룬다. 어릴 땐 친구들과 깡통 차기, 땅따먹기하며 놀았다. 지금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를 만난다. 난 그런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2세대로, MZ 세대의 정서와 문화도 어설프게 아는 세대. 한 마디로 끼인 세대. 세상은 우리를 ‘IMF 키즈(IMF 외환위기 당시 10대를 보낸 아이들)’라 부른다.
세대 담론이 범할 수 있는 일반화의 오류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소장이 한강대교 건넜던 1961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현대사와 함께한 동분 씨 삶에도 분명, 보편타당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IMF 키즈가 베이비부머를 비로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나와 비슷한 삶의 주기를 밟아온 30~40대에게도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 ‘아, 우리 엄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구나.’ 하고 당신의 엄마를 이해하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당신의 엄마에게 전화 걸어, “엄마, 별 다른 일 없으시죠?” 하고 물을 수 있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불쑥 당신의 엄마 집에 찾아가,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집밥 먹고 싶어서 왔어.”라고 너스레 떨 수 있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당신이 당신의 엄마를 비로소 사랑하는 계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