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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21. 2023

가난한 덕선이들의 찬란한 청춘

#4 친구 ①



조용필 / 단발머리(1980)     


그 언젠가 나를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마음에 되살아나네

내마음 외로워질때면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이 그리워질때면 꿈길을 헤매는데

음- 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그 언젠가 나를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마음에 되살아나네

내마음 외로워질때면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이 그리워질때면 꿈길을 헤매는데

음- 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그 언젠가 나를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마음에 되살아나네

그 언젠가 나를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엄마가 전생에는 남자였던 거 같어. 순할 순(順), 꽃 화(華), 순화라는 여인을 사랑했던 남자. 안 그러냐? 젊어서는 고순화, 늙어서는 김순화. 호호호.”      


그렇다. 동분 인생엔 유독 소설 같은 장면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순화’다. 살며 마음 나눈 친구가 딱 둘인데, 두 사람 이름이 거짓말처럼 똑같이 순화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반짝반짝 빛나던 청춘을 함께 나눈 고순화와 40대부터 희노애락의 정을 나눈 김순화. 동분은 ‘순화들’에 관해 이렇게 표현했다. 

      

“엄마가 니네 할머니 모시고 한창 마음고생하면서 고순화랑 연락이 끊긴 거거든. 그렇게 30대까지 고생 많이 했지. 니네 아빠 택시 몰다가 사고 나서 병원에 몇 달 동안 입원하고, IMF 터지면서 이불 장사 안 돼서 형편 어려워지고, 그게 다 엄마 30대 때 있었던 일이잖어. 먹고살기 빡빡하니까 친구도 없었어. 그러니까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고 맨날 속앓이만 했다는 거 아니냐, 엄마가. 그렇다고 뭐 니네 아빠가 언제 한 번이라도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준 줄 아냐? 그래서 고순화가 나한테 김순화를 보내준 게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가지고 엄마가 또 기대를 해보는 거여. 김순화가 죽고 나서 엄마가 또 혼자잖냐. 김순화가 하늘에서 또 다른 순화를 나한테 보내주지 않을까, 하고. 호호호. 이번엔 박순화일라나?”     


아들로서, 간절히 소망해본다. 또 다른 순화가 엄마의 노년에 함께할 수 있기를. 그 소설 같은 이야기가 또 한 번 현실이 될 수 있기를. 각설하고 시작해보겠다. ‘순화들’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한 덕선이들의 찬란한 청춘 


동분이 고순화를 처음 만난 건 18살, 제화공장에 들어가면서다. 그 공장에선 열 명을 한 조로 묶어 작업시켰다. 동분이 소속된 조의 조장이 고순화였다. 먼저 다가와 인사 건네던 고순화를, 동분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순화가 항상 단발머리였거든? 처음 봤을 때도 귀 밑에까지 살짝 내려오는 단발이더라고. 얼굴은 갸롬한 게 뽀애가지고 쌍꺼풀도 살짝 져서 예쁘게 생겼었어. 첫날 공장에 갔더니만, 미리 내 얘기를 들었는지 먼저 와가지고 이러더라. ‘소띠라고? 난 쥐띠인데, 그냥 친구하자. 나는 여기 조장, 고순화다.’ 한 살 많은 언니가 친구하자는데, 내가 뭐 마다할 일 있냐? 냉큼 알았다고 했지, 호호호.”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의 생일 에피소드가 나온다. 둘째딸 덕선은 언니에게 치이고, 동생에겐 늘 양보만 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공교롭게 생일까지 언니와 비슷했던 덕선. 이번 생일은 무조건 언니와 따로 하겠노라 선언했지만, 이번에도 언니 생일날에 맞춰 생일상이 차려진다. 결국, 덕선은 그간 쌓였던 서러움을 폭발시킨다. 그렇듯 중간에 껴서 자란 자매형제들은 위아래로 치이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동분 또한 고순화와 친해진 계기를 ‘둘째딸 DNA’에서 찾았다.     


“나도 그렇고 순화도 그렇고 둘 다 둘째딸(동분은 5남매 가운데서는 넷째, 딸 중에는 둘째다.)이거든. 내가 둘째딸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살면서 보니까 둘째딸이 그렇게들 착해. 어릴 때부터 위아래로 양보하는 게 몸에 배서 착해지는 거 같어. 또 얘길 들어보니까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더라고. 순화도 아부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더라고. 그러니까 순화도 일찍부터 공장에 다녔겄지. 나도 마찬가지지 뭐. 아부지 술에 쩔어 사느라 우리 엄니 고생하고, 16살부터 공장 댕기고. 말하자면 가난한 집 둘째딸끼리 서로를 위로해주다가 친해진 겨.”      


1980년, 동분(오른쪽) 20살 때 고순화와 지리산에서. 


동분의 10대는 그야말로 ‘탈출’이었다. 술에 쩔은 아버지와 좁디좁은 단칸방. 그 구질구질한 생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는 게 10대 동분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14살에 동아책방 사장 댁으로 갔고, 16살에 친구 따라 대구 섬유공장에 갔으며, 나중 일이지만 송일영과 결혼하기 전까진 언니 집에 얹혀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엔 기숙사에서 지냈다.      


“공장이 대화동이었으니까, 사실 신탄진이랑 먼 거리는 아니거든. 출퇴근할 수 있었지. 근데 일부러 기숙사 딸린 공장으로 간 겨. 집에 있기 싫어서. 기숙사 갔더니, 한 방에 6명씩 자는 구조더라고. 이층 침대 세 개 있고. 거기에 방장 언니가 하나 있는데 승질이 얼마나 드러운지, 얼굴에도 심술이 그득그득했어. 애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다고. 그래서 엄마가 일요일만 되면 무조건 순화네 놀러갔다는 거 아니냐. 일요일이라 일은 쉬는데, 방장 언니 때문에 기숙사에는 있기 싫고, 집에도 가기 싫고, 그러니까 순화네로 간 거지.”     


얘기했듯, 고순화 집 형편도 동분 집 못지않았다. 그 당시, 대전천변엔 한국전쟁 전후로 형성된 판자촌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그 어딘가에 고순화 집이 있었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어. 그 골목을 이리저리 가다보면 순화네여. 대문도 따로 없고, 마당도 없어. 입구도 좁고 창문도 없어서 대낮에 가도 어두컴컴했어. 그래도 거기가 그렇게 좋았어. 순화가 있었으니까.” 


국민학교 5학년 때 학교 그만둔 동분과 달리, 동네 친구들은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사이 동분은 신탄진을 벗어나 동아책방과 공장 기숙사를 전전했으니, 관계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열등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관계를 먼저 끊은 건 동분이었으므로. 그러니까 동분에게 고순화는 사회에서 사귄 첫 친구이면서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사정은 고순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한 살 어린 동분에게 선뜻 먼저 친구 하자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분만큼이나 순화도 친구가 그리웠을 테니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  


70~80대 노년층이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이유에 관해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맥락으로 얘기했다.(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박정희가 정치를 잘해서, 덕분에 대한민국이 먹고살 만해졌다고 생각해서 우상화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요. 근데 그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이겁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었던 60~70년대가 자신들의 전성기거든요? 그때가 20~30대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박정희를 부정하는 순간,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여했던, 자신들의 젊은 시절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박정희를 더 우상화하는 겁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전성기를 추억하는 방식인 거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나는 그래서라고 본다. 그 사람을 만났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었고, 뜨거웠고, 그래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므로. 그러니까 실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나의 모습을, 적어도 나만큼은 기억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첫사랑을 잊을 수 없는 건 아닐까. 


동분 얘길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순화와 어울렸던 시절이 동분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때였구나, 그래서 동분은 고순화를 잊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자. 1980년, 동분 20살 때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통금이라는 게 있던 시절이여. 근데 1년 중 따~악 하루, 크리스마스 이브에만 통금이 해제됐어. 이미 며칠 전부터 순화랑 단단히 준비를 했지. 호호호.”      







야간통행금지제도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부터 실시했다. 당시엔 미 제24군 사령관의 ‘일반명령’이었다. 이후 1954년 4월 1일, 「경범죄처벌법」에 “전시‧천재지변 기타 사회에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 내무부장관이 정하는 야간통행 제한에 위반한 자”라는 조항을 만들어 법으로 제도화했다. 하지만 관련 법령에 모호한 부분 등이 있어, 성탄절이나 연말연시 등에는 일시 해제하기도 했다. 36년 만인 1981년 12월 10일, 이 제도의 전면 해제 건의안이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가결됐다. 이에 따라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점으로 야간 통행이 자유로워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성인으로 맞이하는 첫 통금 해제 날. 동분과 고순화, 두 사람은 어떤 이벤트를 준비했을까. 서로에게 편지쓰기? 선물 교환? 크리스마스트리 꾸미기? 자신이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다고, 그렇게나 늘 강조해왔던 동분인데 말이다.      


“아이고, 내가 아들한테 별 얘기를 다 허네. 호호호. 지금도 목동에 맞춤패션거리가 있잖어? 그때는 그 동네가 다 양장점이었어. 요즘이야 다들 기성복 사서 입지만, 그 시절엔 다들 옷감 떼다가 양장점에서 맞춰 입었거든. 그래가지고 순화랑 둘이서 모직으로 옷감을 떼서 투피스 정장을 맞춰 입었다는 거 아니냐. 나는 옅은 하늘색, 순화는 살구색으로.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에, 위에는 엉덩이 좀 가리는 코트였지. 안에는 블라우스 입고, 부츠 딱 신고! 그러고 나이트에 간겨. 호호호.      


진짜 ‘헐’이다. 내 나이 19살의 12월 31일. 몇 시간 뒤에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는 나는 친구와 술을 진탕 마시고(난 술을 못 마시니까 안주만 먹고) 대전 용전동의 뉴스나이트클럽에 갔다. 성인 자격으로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나이트클럽 입장이었다. 12시 땡땡땡.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나이트클럽으로 입장했다. 아 물론, 턱을 한껏 치켜세우고, ‘민증’을 당당히 보여주면서.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다던 엄마 입에서 ‘나이트’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내가 “헐~~!!”이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래서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생각하는 게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중앙데파트는 너도 알지? 대전천 복원하기 전에, 중앙데파트라고 있었잖어. 그 옆에가 신도극장이었고. 그 뒤에 25시나이트클럽이라고 있었어. 우리 또래들은 기억할 거여. 응? 순진했지~! 순진하긴 한데, 호기심에 간 거여. 엄마도 그때 나이트는 처~~~음 가본 겨. 순화랑 옷 맞춰 입고. 호호호. 거기서 남자 만나고 논 건 아니고. 그냥 춤추고 구경한 거지 뭐. 새벽까지 놀다가 나오니까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라고. 신도극장 앞이 포장마차 거리였거든. 포장마차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 구경하면서 밤새워 놀다 아침에 들어왔지. 그땐 젊었으니까 밤새워도 지치는 줄 몰랐겄지.”      


그처럼 동분은 거의 모든 ‘첫 순간’을 고순화와 함께했다. 그 힘들다는 지리산 등산도 고순화와 함께했기에 가능했고, 오토바이를 탄 것도 물론 고순화와 함께였다.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다더니, 은근히 할 건 다 했다.        


“그날도 일요일이었지. 일요일이었으니까 순화집에 놀러 갔을 테고. 그때 순화한테 나이 차 많이 나는 오빠가 하나 있었어. 그 어둑어둑한 판잣집에서 순화랑 밥 먹고 수다 떨고 있는데, 순화 오빠랑 오빠 친구가 드라이브 가자고 하더라? 오토바이 타구. 좋다고 따라나선 겨. 호호호.”     


고순화는 자신의 오빠 뒤에, 동분은 오빠 친구 뒤에, 오토바이를 나눠 탔다. 오토바이가 처음이었던 동분은 오빠 친구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래도 긴장했는지, 등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토바이는 그대로 출발했다. 동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마에 맺혔던 땀이 식을 때쯤, 슬쩍 눈이 떠졌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귀에 감기는 건 오직 오토바이 엔진 소리뿐이었다. 그때 동분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던 거 같다고, 기억한다.      


“그때 엄마를 태워줬던 오빠의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오토바이를 타고 도대체 어디에 간 건지, 가서 무얼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신기하게 그 장면만 생생해.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던 그 순간 말이여. ‘아, 시원한 봄바람이 이마를 스치는구나,’ 하면서 온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풀리더라구. 이래서 사람들이 오토바이~ 오토바이~ 하는구나, 그때 처음 느꼈지. 호호호. 아무튼 가끔 생각나. 그날의 그 시원한 봄바람이.”           






바스러질 것처럼 여리고 작았던 마음


제화공장에 다닌 3년여 동안 동분 옆엔 늘 고순화가 있었다. 남자 직원들까지 “니들은 맨날 둘이서만 붙어 다니냐?”라고 질투할 정도였다.      


“둘 다 가난하게 자랐고, 그래서 일찍부터 공장에 다니긴 했지만, 큰 걱정이나 고민은 없었던 거 같어. 그래봐야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였으니께. 젊었잖어~!! 지금도 순화 생각하면 즐겁게 놀았던 기억? 그 어두컴컴한 판잣집에서 밥 해먹구 수다 떨고, 이따금씩 멋 부리고 시내로 놀러 나가고. 그럴 때면 서로 예쁘다구 칭찬해주고. 그런 추억밖에 없는 거 같어.”     


동분과 고순화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함께 다니던 제화공장을 나오면서다. 공장 사정이 어려워졌다. 월급이 밀리면서 하나둘 공장을 떠났다. 동분과 고순화도 공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동분은 기숙사에서 나와 언니 집으로 들어갔고, 고순화는 다른 공장에 곧바로 취직했다.      


“나도 좀 쉬었다가 순화 다니는 공장으로 가려고 했었지. 안 그래도 순화가 그 공장 사장님한테 얘기 해놨거든. 그래가지구 언제부터 출근하기로 예정이 됐었지. 그런 찰나에 니네 아빠를 언니 집에서 다시 만난 거 아녀~! 그러는 바람에 일사천리로 청주에 신혼집을 차렸다는 거 아니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집 전화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 만나는 게 일이었다. 더욱이 신혼생활 1년 만에 시부모 댁으로 들어갔으니, 한가하게 앉아 고순화와 전화하고, 약속 잡아서 만날 시간이라는 게 도대체가 어디에 있었을까.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던 동분과 고순화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고순화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1985년, 동분 나이 25살 때다.     

 

1985년, 동분 25살 때 큰아들 주성(3살)과 함께. 


“오랜만에 순화한테 연락이 왔어. 결혼한다고. 그래서 결혼식에 갔었지. 3살짜리 니네 형 데리고. 엄마나 니네 아빠나 형편이 안 좋아서 결혼식을 따로 안 했잖어. 그냥 청주에 신혼집 차리고 살았지. 드레스 입은 순화 보니까 무쟈게 부럽더라구. 결혼식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또 연락이 온 거여. 신혼집에 한번 놀러오라고. 말하자면 집들이였던 거지. 그 신혼집에 한 번 놀러 갔던 게 마지막이었던 거 같어. 그 뒤로는 순화 만난 기억이 없으니께.”      


동분이 결혼해 시집살이하는 몇 년 간, 고순화는 줄곧 공장에 다녔다. 그러다 결혼한 거니, 그래도 모아둔 돈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고순화 남편 직장도 번듯했단다. 그러니 신혼집도 제법 그럴싸했으리라.  

    

“단독 스라브 주택이었어. 대문 열고 들어가니까 쬐만하게 마당도 있고, 방도 두 칸이나 있고, 주방도 깔꼼하니 좋더라고. 그 신혼집에서 커피 타 주는 순화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낯설게 보였나 몰라. 그때는 엄마가 어렸잖어. 겨우 스물다섯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작았겄지. 지금 생각해보면 공장에 같이 다닐 때도 그랬던 거 같어. 없는 처지끼리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는 마음? 그런 작은 마음도 있었던 거 같어. 순화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던 순화가 화려하게 결혼식도 하고 멋진 신혼집에서 커피도 타 주니까 거리감이 느껴지더라구. 상대적으루 내 처지가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그때 엄마 사는 게 워낙 힘들 때였으니까. 아침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점심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저녁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하고 셋이나 되는 애들 씻기고, 정말이지 눈코 뜰 새가 없긴 했지. 근데 그런 건 다 핑계고, 그냥 더는 못 만나겠더라구. 순화를 부러워하는 내가 너무 옹졸해보여서,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또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게 순화한테 너무 미안해서. 어디서, 잘 살고 있겄지…….”   

  

엄마는 자신의 작았던 마음에 관해, 끝내 친구를 잃게 만든 그 작은 마음에 관해, 고백하듯 덤덤하게 풀어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좀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엄마는 언제나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나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을 때, 마지막까지 내 손을 잡아준 건 엄마였다. 나에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큰 어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사람. 


그런 엄마에게도 바스러질 것처럼 여리고 작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생각했다. 25살의 동분이 견뎌야 했던 그 시간에 관해서. 그날 나는, 할 수 있다면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25살의 동분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달려가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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