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상
엄마가 낯설다. 내가 38년이나 알고 지낸 사람이 맞나 싶다. 엄마와 인터뷰하며, 그런 순간이 제법 많았다.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순간 말이다. ‘우리 엄마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하면서. 그래서 민망하다. 내가 그동안 엄마를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싶어서. 한편으론 안도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엄마를 조금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그러다 문득, 나는 엄마의 ‘오늘’도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장성한 두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고, 송일영과 단둘이 지내는 요즘 말이다. 하루 일과랄지, 쉬는 날 풍경이랄지, 근심과 걱정 또는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 같은 것들. 하여, 64살 동분 씨에게 물었다. “당신의 오늘은 어떠셨나요?”
동분의 아침은 남들보다 조금 이르다. 새벽 5시면 알람이 울린다. 씻고 준비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다. 5시 45분이다. 직장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도착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믹스 커피 한잔 마신다. 6시 40분, 일하러 올라간다. 아, 동분은 청소노동자다. 전 정권 대표적인 노동정책이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혜택을 받았다. 2018년부터 하청 소속 청소노동자로 대학병원에서 청소했다. 그러다 2020년 대학병원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덕분에 월급이 조금 올랐고, 정년을 보장받았다. 명절 보너스와 복지카드도 받는다. 현재는 7년 차 베테랑 청소노동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틀차인 2017년 5월 인천국제공항에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다. 이후 1단계(2017~2018년)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교육기관 등 835개 기관, 2단계(2018~2019년) 835개 기관의 자회사나 출연출자기관, 3단계(2019~2020년) 민간위탁 기관 등을 거쳐 18만5천267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2020년 6월 기준) 이명박 정부(13만3천562명), 박근혜 정부(7만 3천755)명보다 훨씬 많은 규모였다.(<매일노동뉴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성과와 한계는’ 참조.)
퇴근은 오후 4시. 집에 오면 4시 40분이다. 씻고 1시간쯤 쉰다. 주로 거실 소파에 반쯤 누워 TV 본다. 6시부터 저녁 식사 준비한다. 송일영은 평생 식도락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상차림도 단출하다. 찌개나 국에,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 몇 가지.
저녁 먹고 나면 또 소파에 누워 TV를 본다. 평일 저녁 7시 40분과 8시 30분에 시작하는 드라마는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밤 10시 미니시리즈는 잘 안 본다. 그건 그냥 젊은 애들 드라마 같다. 재미없다. 거실 소파에서 TV 보다가 안방에 가서 눕는 건 밤 11시쯤이다. 슬슬 눈이 감긴다. 하루가 저문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일요일엔 쉰다. 쉬는 날엔 주로 언니 정동순을 만난다. 김순화 먼저 떠나보내고 난 다음부터는 더 그런다. 편하게 연락해 커피라도 한잔할 사람이, 이제는 언니밖에 없다. 언니는 정씨 집안 장녀로 동분과는 8살 차이지만, 어릴 때부터 사이가 각별했다. 언니 입장에서도 ‘드센 남동생들’보다는, 16살이나 어린 막내 여동생보다는, 동분을 편하게 여겼다.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니네 큰이모의 큰아들 있잖어, 융섭이. 걔가 벌써 52살이여. 근데 니네 작은이모가 올해 56살이잖어. 큰이모 입장에서 자기 아들보다 꼴랑 4살 많은 막내 여동생이랑 대화가 통하겄냐? 작은이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구. 엄마야 그 중간에 딱 끼어있으니까 큰이모랑도 통하고 작은이모랑도 잘 어울리지. 실제로도 그런 게, 엄마가 지금 니네 작은이모랑 병원 청소일 같이 하잖어. 점심 때 같이 밥 먹구 커피 마시구. 평일엔 작은이모랑 맨날 붙어 댕긴다고 봐야지. 그러다 주말엔 큰이모 만나서 놀고. 호호호.”
일요일 오전에 만나 종일 논다는 64살 동분과 72살 정동순. 그 둘은 도대체 뭘 하면서 종일 노는 걸까. 그 연령대 여성의 여가를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늠할 수 없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쇼핑.
“몰랐어? 엄마 취미가 쇼핑이여. 옷 사는 거 엄청 좋아해. 니네 외할머니가 지금도 옷 욕심이 있거든? 구십 넘은 노인네가. 호호호. 근데 세 자매가 똑같어. 니네 큰이모랑 작은이모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다들 쇼핑하는 거 무쟈게 좋아해. 그래서 한 달에 최소 두 번은 큰이모랑 백화점이나 아울렛 가는 거 같은데? 내일도 큰이모랑 아울렛 가기로 했어~~! 호호호. 아휴~ 맨날 옷 사는 건 아니고. 그럴 돈이 어딨냐? 그냥 옷 구경하면서 커피 마시고 밥 먹고 노는 거지. 엄마는 그냥 그런 게 좋아. 백화점 돌아 댕기면서 옷 구경하고 만져보고 예쁜 거 있으면 한 번 입어보고, 그러다가 진짜 예쁜 거 있으면 좀 비싸도 하나씩 사서 옷장에 잘 쟁여놓고, 특별한 날 이 옷 저 옷 꺼내서 입어보고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이나 액세서리까지 코디하고 신경 써서 화장하는 거. 한마디로 쇼핑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거지. 어쨌든 내 힘으로 돈 벌 때까지는 부지런히 쇼핑하자고 다짐한 참이여. 호호호.”
동분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예쁘고 싶다. 비록 못 배웠고, 여전히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어 보이는 건 끔찍하게 싫다. 없어 보인다는 게 꼭 돈의 문제는 아니다. 말하자면 위엄이랄지 기품 같은 거. 그런 건 그 사람의 인격과 배경지식에서도 드러나지만, 단정한 헤어나 깔끔한 옷차림, 윤이 나는 구두에서도 드러난다는 게 동분 생각이다. 더욱이 늙으면 머리도 하얗게 세고 주름도 생기는 데다가 만사가 귀찮아지다 보니, 스스로에게 조금만 소홀하면 더 추해 보일 수 있단다.
“엄마는 머리 허애가지고 부스스한 산발에다가, 아무거나 대충 주워 입은 것 같은 모습으로 다니고 싶지는 않어. 그래서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 가서 염색하고, 두어 달에 한 번은 커트하고 파마 새로 하는 겨. 엄마가 머리에도 무쟈게 신경 쓰는 사람이여. 호호호. 엄마는 예쁘고 싶어, 여전히.”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몰랐다. 엄마가 백화점 다니고 미용실 다니면서 예쁘게 꾸미는 걸 좋아했었다니.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엄마’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뒷모습이었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요리하는 뒷모습 말이다. 밥 먼저 앉혀놓고, 그 사이 국과 반찬 몇 가지 뚝딱뚝딱 만들고, 밥이 뜸 들기 시작하면 식탁에 수저 놓고 국그릇에 국 퍼 담고, “주성아~! 주홍아~! 밥 먹자~~!”라고 외침과 동시에 밥솥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퍼주던 그 뒷모습.
이제 와 보니, 그건 그냥 나의 고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엄마에게 그런 모습만 기대했던 거 같다. 일터에 나가 성실히 일하고, 집에 오면 씻을 겨를도 없이 식사 준비하고, 소화할 틈도 없이 세탁기 돌리는 모습. 또는 밤 10시든 11시든 “엄마, 나 배고파~”라고 했을 때, 언제든 안방에서 나와 냉장고 열며 “뭐? 계란이라도 삶아줘? 라면 끓여줄까?”라고 말해주는 엄마 모습 말이다. 백화점 가서 쇼핑하고, 친구들 만나서 차 마시고 영화 보거나 미용실 가서 수다 떠는, 그리하여 자주 외출하는 엄마 말고.
그런 기대는 아마 형과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내에게, 엄마에게 일방향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기심이 똘똘 뭉쳐 어쩌다 백화점 한 번 가려는, 오랜만에 친구 한 번 만나러 나가려는 엄마의 발목을 붙들고 또 붙든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 엄마의 아들로 38년이나 살았으면서 엄마 취미가 쇼핑이라는 것도 몰랐겠지. 혹은 알면서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애써 외면했던 걸지도. 엄마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엄마는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과 대학 졸업식 때도, 우리 가족이 여행 갈 때도, 옷장에 아껴두었던 새 옷을 꺼내 입지 않았을까. 아마도,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샀을, 혹은 6개월이나 12개월 할부로 몰래 샀을 그 옷을 말이다.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엄마가 옷장에 잘 쟁여놨던 새 옷 꺼내 입었을 때 예쁘다고 말해주지 못했을까. 다음에, 아니 이번 주말에 당장, 엄마 손 꼭 잡고 백화점에 다녀와야겠다. 가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
“엄마, 돈 신경 쓰지 말고 예쁜 거 골라. 다 사줄 테니까.”
TV 보는 게 일상의 유일한 낙이라는 동분. 제일 좋아하는 방송은 <나는 자연인이다>, <6시 내 고향> 같은 프로그램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은퇴하고 귀농해서 사는 사람들 많이 나오잖어. 엄마도 사실 그렇게 살고 싶거든. 마당에서 텃밭도 가꾸고, 강아지도 몇 마리 키우고, 꽃도 구경하면서. 근데, 그럴 상황이 못 되니까, 그런 거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거여. 호호호. (이 집 팔고 시골로 가면 되지?) 이 집 팔아야 얼마나 한다고. 그나마 절반은 은행 꺼잖어. 은행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생활도 해야 하는데 시골로 갈 수 있냐? 돈 벌 수 있을 때까지는 벌어야지.”
그렇게 대답한 동분에게 로또에 당첨돼서 10억 원이 생기면 뭐 할 거냐고 물었다. 동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두 아들 얘길 꺼냈다.
“이날 이때까지 물려준 것도 없는데 10억 생기면 니네 형이랑 너랑 집 한 채씩 사줘야지. 남들은 자식 결혼할 때 집 한 채씩 턱턱 사주는데, 엄마 아빠는 그러질 못했잖어. 그게 늘 마음에 걸려. 엄마는 이 집이면 충분해~! 아빠랑 둘이 사는데 넓으면 뭐 허냐? 따순 물 나오고 웃풍 없으면 된 거지. 아파트가 최고여.”
불과 5분 전까지, 시골 가서 살고 싶다던 동분은 금세 말 바꿔 아파트가 최고란다. 그저 즐거운 상상이나 한번 해보자고 물었던 질문이었다. 진짜로 10억을 준다는 것도 아닌데, 동분은 그 상상에서조차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빤히 보이는 그 거짓말이 나는 조금 서글퍼 괜히 투덜거렸다.
“엄마는 요즘 아파트가 얼마나 비싼데 10억으로 집을 두 채나 살라고 해? 웃겨 진짜.”
‘근황’이 이번 인터뷰 주제였다. 나는 동분 씨 근황이 궁금했다. 근데 동분 씨는 자꾸만 “주성이, 주홍이”를 입에 올렸다. 이제는 송주성, 송주홍의 엄마가 아닌 정동분으로만 살아도 되련만. 요즘 가장 큰 걱정이 뭐냐는 물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니네 아빠가 맨날 아프니까 그게 걱정이지. 니네 아빠가 10여 년 전에 뇌경색이 살짝 왔었잖어. 그것 때문에 여태 약 먹잖어. 그것뿐이냐. 폐기종에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까지. 요즘은 허리랑 어깨도 맨날 아프댜. 아주 그냥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여. 니네 아빠 한 달 병원비만 30만 원이 넘어. 근데 이제 엄마도 슬슬 아프단 말여. 허리도 계속 안 좋고, 무릎도 아프고. 그래서 걱정인 거여. 둘 다 드러눕게 될까 봐. 엄마랑 아빠 맨날 하는 얘기가 우리는 제발 병원에 누워서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자는 거여.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괜히 있겄냐? 부모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어 봐라. 돈은 돈대로 깨지지, 마음은 마음대로 안 좋지, 시간 내서 계속 쫓아다녀야 하지. 니들한테 물려준 재산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어. 그게 부모 마음인 거여.”
남편 아파서 걱정이라는 첫 말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남편뿐이구나. 근데 이어지는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엄마는 평소 스스로를 “쌔가 빠지게 일한 몸뚱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평생 살아온 덕에 두 아들 무탈하게 키워냈다. 그랬으면 됐지, 뭐 한다고 아픈 것까지 자식 눈치를 보냔 말이다. 속상한 마음에 벌컥 화가 났다.
“엄마는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형이랑 내가 밥벌이 다 하는데 뭐가 걱정이라고 그런 소리를 해. 그러니까 엄마도 아프면 참지 말고, 그때그때 병원 좀 댕겨. 오래오래 사셔야 자식들 덕 좀 볼 거 아녀.”
엄마 앞에선 늘 이 모양이다. 마음과 말이 따로 논다. 작은아들의 느닷없는 ‘버럭’에 무안했던지, 동분은 그것 말고 큰 걱정은 없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마음이 편하고 좋아. 병원 청소 일도 그럭저럭 할 만하고, 월급도 그 정도면 괜찮고. 니네 아빠도 어쨌든 아직은 밥벌이하니까, 두 사람 먹고살기에 큰 부족함은 없어~!”
두 아들 걱정도 이제는 안 한다. 주성이야 이날 이때까지 크게 걱정 끼친 적 없는 자식이었다. 제때 결혼해서 자식도 넷이나 낳았다. 얼마 전엔 청약에도 당첨됐다. 몇 년 뒤에 넓고 좋은 새 아파트에 들어간단다. 돈은 못 보태줬어도 한시름 놨다. 문제는 늘 주홍이었는데, 이제는 작은아들 걱정도 덜었다.
“너 이혼하고 1년 동안 연락도 안 됐잖어. 도대체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휴. 그러다 1년 만에 만났는데 니가 더 잘 알겄지만, 그때 니 얼굴이 그게 사람 얼굴이었냐. 빼싹 말라가지고 산송장이 따로 없었지. 그래도 지금은 밥벌이도 하고, 글 쓰는 일도 다 잘되고 있는 거 아녀? 엄마는 잘 모르지만 책도 두 권이나 내고 TV에도 나오고 라디오도 몇 번 나왔으니까, 잘하고 있는 거겄지. 너야 뭐 늘 걱정은 돼도, 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어련히 알아서 사는 놈이니께 알아서 잘하겄지. 엄마는 니 얼굴만 봐도 알어. 이혼하고 1년 만에 만났을 때 비하면 그래도 지금은 니 얼굴이 많이 편해 보여. 그지? 너도 지금은 다 괜찮은 거지?”
괜찮다고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엄마와 많은 대화 나눌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차마 낯간지러워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시골은 언제 갈 계획이냐고. 지금이라도 가겠다면 형과 상의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동분은 머나먼 얘기라고 답했다. 적어도 여든은 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내가 살아보니까 그려. 니네 외할머니가 딱 80살이 되니까, 더 이상 엄마로 안 보이더라고. 거꾸로 내가 챙겨드려야 할 노인으로 느껴지지. 그때 깨달은 겨. 아, 엄마로서의 역할이라는 게 여자 나이 80살까지구나. 그래서 생각했지. 내 나이 80살까지는 주성이 주홍이도 엄마를 찾겄구나. 그때까지는 엄마 역할을 해야겄다. 그때는 이제 니들도 니들 자식한테 부모 역할을 해야겄지. 엄마 그만 찾고. 호호호. 그렇게 한세대가 저무는 거여.”
80살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16년이나 더 엄마로 살겠다는 동분의 선언에 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인터뷰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만감이 교차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날도 제법 추운 날이었는데 자동차 창문을 전부 열어놓고,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다.
38년을 제멋대로 살았다. 언제나 내 선택의 기준은 나의 행복이었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이 과연 옳았던가.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 엄마와 아빠, 형의 희생을 묵인했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그렇게 고집해서 얻어낸 행복을, 그렇게 살아온 삶을 과연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회의가 드는 거다. 오래오래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언제까지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인생에서 80살까지 엄마 역할을 하겠다니. 그럼, 당신 인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