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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12. 2023

나눌 분(分)

#1 이름



“탕탕탕!!”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와 육사 장교 250여 명, 사병 3,500여 명이 한강대교를 건넜다. 오전 4시 30분, 쿠데타 세력이 방송국을 접수했다. 라디오 방송으로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동분과 송일영의 가계도. 


이름처럼 살아온 삶


“응애~! 으으응애애애~~!!”  

    

그 시각,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의 까만 기와집에서 울음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이제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갓난아이 울음이었다.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을 리 만무하건만,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분아~! 동분아~! 우리 예쁜 동분이가 왜 이럴까…….”     


동순, 동근, 동운, 동분, 현희까지). 가난한 집안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1961년 3월 20일생 동분 씨.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만큼이나 기구한 동분의 삶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61년 우리나라에서 1,046,086명(전체 인구 25,765,673명)이 태어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두 번째로 많은 출생아였다. 출생아가 가장 많았던 건 1960년으로, 1,080,535명이 태어났다. 6‧25 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베이비붐 세대라 칭하는 이유다. 참고로, 2022년 출생아수는 249,000명이다. 1961년 대비 25% 수준이다.      


훗날 동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점집에 방문해 운수를 점치곤 했다. 100점짜리 시험지 받아든 아이처럼 만족스런 표정으로 “비~ 밀~!”이라고 하는 날은 뭔가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온 날이었다. 부적을 사오면서 “이게 다~ 이름 때문에 그려. 이름. 에휴~!”라고 하면 뭔가 잘못된 날이었다. 그렇듯 동분은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때마다 이름을 걸고 넘어졌다. 동래 정(鄭), 동녘 동(東), 나눌 분(分). 동분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마지막 글자였다.      


“내가 어떻게 알어~! 우리 아부지가 지어준 걸. 나누면서 살라고 그랬나 보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가지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는데, 나눌 게 어디 있다고 이름에 분(分)을 붙여줬나 몰러.”     


평생 술에 절어 사느라, 월급봉투 제대로 한 번 집에 갖고 온 적 없다던 동분 아버지는 어쩌자고 동분에게 분(分)을 붙여줬을까. 모를 일이다. 동분 말처럼 이름이 동분 인생을 그렇게 이끈 건지, 동분이 이름 따라 그렇게 산 건지, 그 또한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엎치나 메치나 동분은 그 이름처럼 살아왔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마음을 나누면서 말이다. 


 




1982년, 동분과 남편 송일영은 사진관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결혼식을 갈음했다. 양가 모두 가난해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신혼이랄 게 없었던 신혼 


말 나온 김에, 남 자식까지 키워야 했던 사연 살짝 들어보자. 1982년, 동분과 송일영이 막 결혼했던 때다. 청주에 신혼살림 차리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꼭두새벽부터 시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새벽녘 애들이 우는데도 달래는 기척이 없어 가봤더니만, 맏며느리(송일영의 형수)가 밤사이 애들 재워놓고 도망갔더라는 것.    

  

“니네 큰엄마가 얼마나 약은 사람인 줄 아냐? 아무리 사는 게 힘들었어도, 내가 니네 아빠랑 결혼 안 했으면 니네 큰엄마가 집을 나가진 않았을 겨. 막막하던 차에 내가 구세주처럼 ‘짠’ 하고 등장을 해준 거지. 그러니까 내가 송씨 집안으로 오자마자 바로 도망간 거 아니냐. 무슨 폭탄 돌리기 하는 것처럼. 물론, 내가 니네 큰엄마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녀. 니가 생각해 봐라. 영희랑 철수는 이제 겨우 2살 1살인데 남편은 감옥 가서 언제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지, 시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들들 볶아대지, 막내 시동생은 술만 처먹었다 하면 지랄발광을 해대지, 믿고 의지할 구석이 단 하나라도 있어야 버틸 거 아녀.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니네 큰엄마가 진짜 독하긴 독해. 아무리 그래도 그때 철수는 완전 갓난아기였어. 백일도 안 됐을 때니까. 그런 아기를 버리고 도망간 겨. 아무튼 대단햐.”     


여자라면 아니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어리디어린 아이들의 잠자는 모습과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이 메어온다. 차라리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라면 좋으련만... 우리들은 큰 아이를 청주로 데려오기로 했다. 나의 몸속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키우는 날까지는 열심히 사랑스럽게 키워 보련다. 『동분의 일기』 1982년 6월 20일 中     


그래서 동분과 송일영에겐 신혼이랄 게 없었다. 신혼생활 한 달 만에, 기저귀도 안 뗀 2살 영희를 떠맡았으니 말이다. 매우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동분은 아기를 키워보기는커녕 임신도 해본 적 없는 ‘새댁’이었다.  

    

“그때 니네 할머니가 환갑이었는데, 그 나이에 애 둘을 혼자 어떻게 키우냐? 그렇다고 니네 할머니가 집안 장손인 철수를 나한테 맡길 리 없고. 그래서 내가 영희를 청주로 데려와서 키운 겨. 결국 1년 만에 시댁 들어가서 내가 영희랑 철수 둘 다 키웠지만. 결과적으로 영희 국민학교 입학식 하던 날까지 내 손 잡고 갔어.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니네 큰아빠가 감옥에서 나왔지. 그러고 또 얼마 안 있다가 니네 큰엄마가 집으로 돌아왔고. 그러니, 도대체 그 세월이 몇 년이냐.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영희랑 철수는 진짜루 내가 다 키웠어. 니네 큰엄마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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