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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21. 2023

애증의 시어머니

#8 시집살이 ①

      


송골매 / 어쩌다 마주친 그대(1982)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두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음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내 가슴만 두근두근

답답한 이 내 마음 바람 속에 날려 보내리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네

이슬처럼 영롱한 그대 고운 두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음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내 가슴만 두근두근

바보 바보 나는 바보인가봐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왜이리 용기가 없을까

음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내 가슴만 두근두근

바보 바보 나는 바보인가봐     






어릴 때 우리 가족 명절 풍경은 몇 가지 면에서 조금 특이했다. 우선은 할머니의 유별난 결벽증. 당시 할머니는 결혼 안 한 막내아들(나한테는 막내삼촌)과 둘이 살았다. 명절이면 다들 그 집에 모였다. 그 집 가면 양말부터 벗었다. 한 손에 늘 걸레 들고 다녔던 할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방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그 방바닥을 허구한 날 닦아댔으니, 장판이 닳고 닳아 반들반들했던 것. 그러니 양말 신고 다니면 미끄러워 넘어지기 일쑤였다. 안 넘어지려면 벗어야 했다.  


화장실도 좀 이상(?)했다. 분명, 명절 내내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샤워도 하고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할 텐데, 타일 바닥이 건식화장실처럼 언제나 뽀송뽀송했다. 거꾸로 화장실엔 양말 신고 들어가도 될 정도였다. 언젠가 가만 보니, 사람들이 화장실 갔다 나올 때마다 할머니가 쫓아 들어가 타일 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었다.  


새벽 풍경도 나한텐 낯설었다. 명절이니까, 오랜만에 늦잠 좀 자고 싶어도 그 집에선 안 될 일이었다. 새벽 5시면 모든 창문을 전부 열어젖히고 사람들이 자든가 말든가 이불을 모조리 거둬갔다. 할머니 키가 150이나 됐을까. 몸무게는 40kg 정도? 아무튼 대단히 작고 마른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두꺼운 이불을 한 채씩 한 채씩 차례로 들고 나가 탈탈 털어 왔다. 그런 후엔 온 집안을 쓸고 닦았다. 그때마다 우리(할머니의 손주들)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다시 요 방으로 옮겨 다니며 새우잠을 자곤 했다. 그래봐야 아침 7~8시엔 아침 밥상에 앉아야 했지만. 


손주들 얘기 나온 김에 마저 해보자면, 할머니의 ‘장손’ 사랑도 놀라웠다. 명절 보내러 오는 손주라고 해봐야 큰아빠의 딸 영희누나와 아들 철수형, 그리고 우리 형 주성과 나, 이렇게 넷이 전부였다.(할머니의 딸들이 낳은 외손주도 몇 있었지만, 왕래가 거의 없었다.) 할머니는 오직 철수형만 싸고돌았다. “우리 장손, 우리 장손.” 하면서. 사탕이건 과자건 오직 철수형한테만 줬고, 주머니 쌈짓돈도 철수형한테만 갔다. 어린 마음에 그게 참으로 섭섭했다. 


1983년, 1년의 신혼생활을 청산하고 시댁에 들어가자마자 찍은 사진. 100일 된 큰아들 주성과 함께. 



마지막으로 큰엄마와 우리 엄마와 할머니의 이상한 관계. 명절날, 큰집 식구는 큰아빠와 영희 누나, 철수 형 셋만 왔다. 큰엄마는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할머니 집에 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여기서 굳이 밝히자면, 명절에 남편 집에만 혹은 남편 집에 먼저 가는 그릇된 유교 문화를 나는 철저히 반대한다. 그러니까 큰엄마가 할머니 집에 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러했다고 설명하는 거다. 나는 큰엄마 선택을 존중한다. 그 때문에 우리 엄마가 고생한 건 그것대로 안쓰러운 일이지만.     

   

하여, 둘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늘 맏며느리 역할을 했다. 그럼, 맏며느리 역할 하는 우리 엄마한테 좀 고마워하거나, 맏며느리인데 한 번도 안 오는 큰엄마를 원망하거나, 둘 중 하나가 상식일 텐데 할머니는 명절 내내 우리 엄마만 들들 볶았다. 아들인 내가 민망할 정도로 할머니는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구박했다. “넌 이것도 제대로 못 하냐?”가 기본 레퍼토리였다. 


그런 여러 이유로 난 명절을, 정확하게는 할머니 집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사람 앉았다 일어나는 자리마다 쫓아다니며 걸레질하는 그 결벽증도 불편했고, 그런 할머니가 우리 엄마 구박하는 거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언짢았고, 그렇게 구박받으며 차린 우리 엄마 밥상에, 장손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앉는 철수형도 꼴 보기 싫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엄마는 묻어뒀던 시집살이 얘길 종종 들려주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나의 어릴 적 명절 풍경이 떠올랐다. 단 2~3일만 지내도 그렇게나 숨이 막혔던 할머니 집 풍경 말이다. 그렇다. 동분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집살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가슴에 쌓인 울화 


동분의 시아버지 송병두는 1909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父)는 소문난 부자였다. 문의면에서 그 집 땅 안 밟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땅이 많았다. 그런 집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송병두는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컸다. 성인이 된 후에도 변변한 직업 없이 땅 팔아 술 먹고 노름하며 지냈다. 그러다 결혼했는데, 얼마 안 있어 아내가 병들어 죽었다. 자식은 없었다. 


동분의 시어머니 김동춘은 1922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 집도 연산면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김동춘도 일찍 결혼해 딸을 하나 낳았는데, 남편이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죽었다. 남편이 죽자, 시댁에서 “딸은 우리가 키울 테니 재혼하라”고 김동춘을 내보냈다. 


1943년, 각각 배우자와 사별한 송병두, 김동춘이 만나 재혼했다. 두 사람은 1946년 첫딸 송복희를 시작으로 슬하에 5남매를 뒀다. 1955년 넷째로 태어난 아들이 동분의 남편 송일영이다. 


결혼할 때 중매쟁이가 김동춘에게 말하길, “나이가 13살이나 많은 노총각이긴 한데, 땅 부잣집 4대 독자”라고 했단다. 막상 결혼해 보니 송병두는 이미 집안 땅을 다 팔아먹은 상태였다. 한마디로 ‘개털’이었던 것.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송병두는 처가 재산도 조금씩 털어먹어, 끝내는 다 털어먹었다. 하여, 김동춘은 결혼 생활 내내 몸 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 시점 동분의 전언을 들어보자.    

 

“니네 할머니가 얘기해준 건데, 니네 할아버지가 돈만 떨어졌다 하면 처가에 갔다는 거여. 갈 때마다 소도 한 마리씩 얻어오고, 또 돈 봉투도 얼마씩 받아오고 그랬다는 거여. 그렇게 돈만 생기면 노름하고 술 마신다고 집에도 안 들어왔댜. 어떨 때는 처가에서 돈 받아다가 6개월씩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었댜. 그러니 니네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했겄냐? 더군다나 그렇게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양반이, 남편 잘못 만나 친정 재산 다 털리고, 혼자서 5남매를 키워냈으니, 남편을 얼마나 원망하면서 살았겄냐고. 평생에 걸쳐서 가슴에 울화가 잔뜩 쌓인 겨. 그러니까 나는 여자로서 니네 할머니의 삶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녀. 다만, 그 화가 며느리인 나한테 왔다는 게 문제지. 호호호. 야,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지. 그때는 진짜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녀. 내가 아들 앞에서 별소리를 다 허네, 아휴.”        






저년이 내 아들 꼬셔서 


동분 집이나 송일영 집이나 가난하긴 매한가지였다. 결혼식은 생각도 안 했다. 그럼에도 혼인 신고하고 살림 합치자면 양가 부모님께 인사는 드려야 했을 터. 마음 급했던 송일영은 진작 처가에 방문했다. 동분이 시댁에 간 건 1982년 3월이다. 바로 그날이었다. 김동춘과 동분이 시어머니와 둘째 며느리 관계로 처음 만난 날.   

   

“신탄진에 선바위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가 마지막 버스정류장이었어. 거기서 내려가지고, 철길 건너서 산길을 한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서당(이하 시댁=서당)이라는 마을이 나와. 니네 아빠가 그 동네 살았어. 서당에 처음으로 인사드린다고 가서 대문 열고 쭈뼛쭈뼛 마당으로 들어갔더니만, 니네 할머니가 저쪽에서 빗자루 하나 들고 열심히 쓸고 있더라고. 그때 니네 할머니가 딱 환갑이었거든? 쬐만하고 깡마른 데다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거 없이 쪽진 머리를 해가지고는 그때도 이미 할머니였어~~! 아무튼 간에 사람 기척이 있으면 돌아보는 시늉이라고 해야 할 거 아녀? 쳐다도 안 봐. 빗자루질만 계~~속 하는 겨. 어렵게 어렵게 인사를 드렸더니만, 빗자루를 훽 집어던지고는 안방으로 슉 들어가 버리는 거 있지. 그래도 예비 며느리가 처음 인사드리겠다고 온 건데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아휴, 어쩜 그러냐. 니네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여. 그게 첫 만남이었어.”     


동분의 시어머니는 어째서 그랬을까. 그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송일영 집안 상황을 좀 알아야 한다. 


동분과 송일영의 가계도.


젊어서는 집안 땅 다 팔아먹고, 결혼한 다음부터는 처가 재산까지 털어먹은 송병두는 그때 이미 74살의 고령이었다. 당연히 직업은 없었고, 이즈음엔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잃은 지 한참이라, ‘뒷방 노인네’ 신세로 지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아내 김동춘의 잔소리를 묵묵히 견디는 게 일과였다.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 책임졌던 환갑의 김동춘도 물론 수입은 없었다. 송일영보다 각각 9살, 6살 많은 큰딸 송복희와 둘째딸 송준영은 진작 시집간 상황이었다. 


송일영보다 3살 많은 셋째아들 송갑영이 말하자면 집안 가장이었는데, 이 시점 그는 여러 사건사고로 전과가 쌓여 그 악명 높다는 청송교도소에 복역 중이었다. 서당엔 그의 아내와 이제 갓 돌 지난 딸 영희, 백일도 안 된 아들 철수만 있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1980년 사회보호법(죄를 범한 자로서 재범의 위험이 있고, 특수한 교육과 개선 및 치유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보호 처분을 함으로써 사회 복귀를 촉진하고 사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법률)을 제정했다. 이듬해 이 법률을 근거로 경상북도 청송군에 청송 제1~3 보호감호소를 각각 신설했다. 설립 초기엔 삼청교육대를 위한 특수목적 시설이었다. 이후 흉악범과 강력범 등을 주로 수용했다. 1983년 대통령령으로 ‘청송 제1보호감호소’ 명칭을 ‘청송교도소’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3개의 교도소 및 직업훈련교도소를 구분 없이 통칭해 ‘청송교도소’라 불렀다. 2010년, 지역주민들의 요청으로 경북북부 제1~3교도소 및 경북직업훈련교도소로 명칭을 변경했다. 교도소 뒤편으로 광덕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외 방향은 모두 절벽이다. 하여, ‘청송교도소’를 신설한 이래 지금까지 탈옥에 성공한 수감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오원춘, 조두순, 김태촌, 신창원 등 누구나 알만한 죄수가 ‘청송교도소’를 거쳤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및 위키백과 참조.)       



    

그다음이 넷째아들인 송일영이고, 그 밑으로 송일영보다 6살 어린 막내아들 송삼영이 있었다. 송삼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김동춘이 40살이던 1961년에 태어난 늦둥이다. 그때 김동춘은 뒤늦게 들어선 아기가 남부끄럽게 느껴져, 언덕에서 수차례 구르고, 조선간장을 몇 사발이나 들이켰다고 한다. 자연유산을 위한 당시의 민간요법이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태어난 아기가 바로 송삼영이다. 훗날 김동춘이 손자인 나에게 “그래서 니네 삼촌이 평생 속을 썩이는 것 같다.”라고 전한 바 있다. 어쨌든 10대 때부터 이미 비행을 시작한 송삼영은 22살이었던 1982년 당시에도 백수건달이자 알코올중독자로 술 마시고 사고 치는 게 일과였다.  


얘기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한숨이 푹푹 나오는 상황. 서당이 딱 그러했다. 그것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부잣집 외동딸로 귀하게 태어나, 송병두 만나기 전까지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던 김동춘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여기서 김동춘 입장을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그나마 작은아들 일영이가 회사택시 굴려, 일곱식구(송병두, 김동춘, 송갑영의 아내와 자식 둘, 송일영, 송삼영) 입에 풀칠하며 지냈다.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자랑스러운 내 아들 일영이가 한 달 전(1982년 2월) 대한생명 충청북도 지사장 수행비서로 취직했다. 첫 월급으로 거금 25만 원을 받아왔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이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월급봉투 내밀면서 한다는 소리가 청주에 신혼살림 차려 나가겠단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는 바람에 니네 아빠랑 할머니가 한바탕 했던 모양이여.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니네 아빠가 나를 서당에 데려간 거지. 니네 할머니 딴엔 큰아들이 교도소에서 나올 때까지, 작은아들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겨. 근데 갑자기 청주에 신혼살림 차린다고 했던 거니까 승질이 잔뜩 났겄지. 그러니 내가 예뻐 보일 리가 있겄냐? 저년이 내 아들 꼬셔서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서당에 인사를 하러 갔으니, 아휴. 그러니까 엄마는 처음부터 니네 할머니한테 딱 찍혔던 겨.”
 

말 많고 탈 많고 식구까지 많은 데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는 남자. 아무리 술 안 마시고, 성실하면 뭐 하나. 그 남자와 결혼하는 그 순간이, 지옥행 급행열차에 올라타는 순간인데 말이다. 그런 사정 빤히 알면서 동분은 어쩌자고 송일영과 결혼했던 걸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동분과 송일영은 1982년 5월, 청주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보증금 없는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이었다. 첫 달 월세는 송일영이 냈다. 동분은, 공장 다니며 조금 모아놨던 돈으로 세간 살림 몇 가지를 장만했다. 얼마 전 결혼 41주년을 맞이한 노부부는 그렇게 시작했다. 동분 나이 22살이었고, 송일영은 28살이었다.           





아침만 되면 화가 잔뜩 나 있는 시어머니 


올해 67살인 송일영은 여전히 성실하다. 삭신 쑤신다고 매일 앓는 소리 하면서도, 아침에 눈 뜨면 어김없이 1.5톤 탑차 끌고 나가 길바닥에서 이불을 판다. 뿐더러, 예나 지금이나 술엔 취미 없다. 동분에게 남편 송일영은 그런 사람이다. 동분 표현을 빌리자면 “멋대가리 없고 무뚝뚝한 데다가, 고집은 드럽게 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성실한 사람, 타고나길 술과는 친하지 않은 사람. 지금도 그렇고, 1982년에도 그러했다. 동분이 송일영과 결혼한 이유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당시 송일영이 월급 25만 원이나 받는 대기업 직원이었다는 점. 그 정도 월급이면 그래도 부족함 없이 살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결과적으로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25만 원 중에서 연금이니 세금이니 하면서 뗄 거 떼고 실제로 받아오는 건 20만 원 남짓이었어. 물론 20만 원도 그 당시에 적은 돈은 아니었지. 그럼 뭐하냐? 그중에서 절반을 뚝 떼 가지고 니네 할머니 갖다주는데. 그러니까 실제로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건 10만 원이었어. 그걸로 월세 2만 원 내고, 나머지로 생활했으니까 늘 빠듯했지.”     


그나마도 딱 1년이었다. 송일영이 대한생명 충청북도 지사장 수행비서로 일했던 기간 말이다. 경비 절감을 이유로 본사에서 지사장 수행비서를 없애기로 한 거다. 퇴직금 60만 원 받고 쫓겨난 송일영은 동분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서당으로 들어가자고. 동분은 마지못해 알았다고 했다. 동분 또한 더 이상 버틸 명분도, 방법도 없었다.     


“니네 할머니는 니네 큰엄마 집 나갔을 때부터 청주 정리하고 서당으로 들어오라고 난리를 쳤었지. 왜 아니었겄어. 환갑 나이에 연년생 아기 둘을 키워야 하는데. 나는 절대적으루다가 싫다고 했었지. 니네 할머니 성깔 빤히 아는데, 내가 미쳤냐? 거기 들어가게. 그나마 니네 아빠 직장이 청주에 있었으니까, 그때는 안 들어가고 버틸 수 있었던 겨. 안 들어가는 대신 영희를 내가 데려다 키웠던 거고. 그렇게 억지로 버티던 상황이었는데 니네 아빠가 겨우 1년 만에 회사에서 짤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 다시 회사택시 굴린다고 해도, 수행비서 할 때만큼은 못 벌 테니까 두 집 살림할 형편도 안 되고, 어쨌든 회사택시라도 굴리려면 청주에서 굴릴 수 있냐? 신탄진이 말하자면 니네 아빠 ‘나와바리’인데. 그래가지고 울며 겨자 먹기로 1983년 5월에 백일도 안 된 니네 형 주성이를 안고 시댁에 들어간 겨. 얘기했지만, 서당에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가지고 철길을 하나 건넌 다음에 산길을 한 10분 정도 걸어갔거든. 그 산길이 나한테는 진짜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 같았어. 도무지가 발이 떨어져야 말이지.”     


그렇게 시작됐다. 시어머니 김동춘과 둘째 며느리 동분의 길고도 지루한 줄다리기. 동분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한걸음 양보해 시댁에 들어왔건만, 시어머니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말도 말어. 청주 사는 1년 동안에도 내가 서당을 얼마나 드나든 줄 아냐. 시도 때도 없이 전화 와가지고 ‘너 좀 넘어와야겄다.’ 하고 툭 끊어. 그때 내가 니네 형 임신했을 때인데, 그 무거운 몸을 끌고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 가며 갔다는 거 아니냐. 근데 또 막상 가서 ‘어머니 저 왔어요.’ 하면 ‘어, 왔냐?’ 대꾸를 해줘야 할 거 아녀. 쳐다도 안 봐. 그놈의 마당만 허구한 날 쓸고 있는 겨. 호호호. 아니면 마룻바닥 걸레질하고 있던가. 신혼 1년 만에 정리하고 시댁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어. 아침에 문안 인사드린답시고 ‘어머니 일어나셨어요?’ 해도 단 한 번을 대꾸 안 해주셨어. 아무튼 그런 양반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평생, 며느리 인사 한번을 안 받아줬어.”   

    

1984년, 서당 마당에서 큰아들 주성과 조카들을 씻기고 있는 동분. 


서당의 아침은 무척이나 빨랐다. 새벽 5시면 마당에서 빗자루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는 꼭 동분과 송일영이 머무는 방 앞쪽 마당부터 쓸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깜짝 놀라 황급히 마당으로 나가면 시어머니는 꼭 한마디를 붙였다.      


“너는 얘가 왜 이렇게 게으르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쯧쯧쯧.”      


그 꼭두새벽에도 시어머니는 이미 찬물로 머리 감고, 참빗으로 곱게 쓸어 올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비단,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눈 감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태도를 주변 사람에게도 강요했다는 것. 때로는 늦잠도 좀 자고, 때로는 게으름도 피우고 싶은 게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자신이건 남이건 그런 꼴을 못 견뎌 했다. 그래서 주변 모두가 피곤했다.

 

동분이 씻을 겨를도 없이 아침상을 준비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바빴다. 1살 터울로 줄줄이 사탕인 손주 셋(영희, 철수, 주성)을 마당 수돗가로 데리고 나가 씻겼다. 그 이른 새벽에 말이다. 


아침 식사 뒤, 동분이 마당 수돗가에서 설거지하고 대식구 옷을 손빨래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얼기설기 지은 옛날 시골집이라, 방이 많았다. 시아버지 머무는 뒷방, 시어머니와 영희, 철수가 자는 안방, 동분과 송일영, 큰아들 주성의 신혼방, 거기에 막내 시동생 머무는 작은방까지. 시어머니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쓸고 또 쓸고, 닦고 또 닦았다. 매일, 단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그 사이 동분은 빨래를 있는 힘껏 쥐어짜 마당에 널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시어머니가 쫓아 나왔다.     

 

“니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하루에 담배 두 갑씩 태우다 돌아가신 양반 아니냐. 당신은 진작 청소 다 끝내고 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 태우면서 내가 빨래 너는 것만 지켜보고 있는 겨. 내가 빨래 다 널고 돌아서면 쫓아 나와서 빨래를 하나씩 하나씩 다시 거둬. 다시 쥐어짜. 노인네 아귀힘이 얼마나 좋은가 내가 그렇게 있는 힘껏 쥐어짜서 널어놓은 건데도 니네 할머니가 다시 쥐어짜면 물기가 또로로 또 나온다? 호호호. 그럼 또 한 소리 듣는 겨. ‘너는 빨래 하나를 제대로 못 하냐?’ 그렇게 내가 널어놓은 빨래를 하나씩~ 하나씩~ 다시 다 짜가지고 탈~ 탈~ 털어서 주름 한 점 없이 착! 착! 펴가지고 다시 널어놓는 겨. 그런 사람들 있잖어. 본인이 해야지 직성 풀리는 사람. 니네 할머니가 꼭 그랬어. 내가 집안일 하고 있으면 쫓아다니면서 다시 해. 꼭 한마디씩 붙여가면서. 내가 걸레질하고 돌아서면 따라 와가지고 다시 걸레질하고, 마당 쓸어놓고 방에 가서 좀 쉬고 있으면 마당에서 빗자루질하는 소리가 또 들려. 호호호. 아휴, 아무튼 피곤햐, 피곤햐.”      


그런 날이, 말하자면 ‘보통의 하루’였다. 서당은 산골 마을이라, 겨울엔 오후 4시면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저녁 먹고 나면 밤이 길었다. 그런 밤, 동분은 이따금 손수 반죽해 호떡을 굽곤 했다. 시어머니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러면 영희부터 철수, 주성까지 안방에 둘러앉아 하하 호호 웃으며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했으면서, 아침만 되면 벌써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침부터 바가지를 툭툭 던지는 겨. 빗자루질하는 소리도 벌써 달라. 혼자서 뭐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화가 잔뜩 나 있어. 아무튼 일주일이면 2~3일이 그랬어. 아침부터 화가 잔뜩 나 있는 날.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밤에 당신 혼자 가만히 누워서 하루를 돌아보는 겨. 그래서 낮에 쬐금이라도 거슬렸던 게 있으면 그걸 밤새도록 곱씹나 봐. 진짜 그거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겨. 아침에 나 보자마자 ‘너 어제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어? 다시 한 번 말해봐라.’ 하면 또 시작된 거여. 피곤한 하루가. 그런 날은 하루 죙일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사람을 괴롭혔어. 싸가지가 없다는 둥, 친정에서 도대체 뭘 배워왔냐는 둥. 참다 참다 ‘어머니, 도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네?’ 하면서 말대꾸라도 한 마디 해봐~! 온 집안이 난리가 나. 일부러 식사도 안 드셔. 니네 삼촌한테 쪼르르 가서 이르고. 아휴, 그럼 또 니네 삼촌이 술 먹고 저녁때 들어와서 나한테 삿대질 해가며 형수가 뭘 잘했다고 우리 엄니한테 대드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참고로 동분과 송삼영, 그러니까 송일영의 막냇동생은 61년생 동갑이다. 신탄진 바닥이 그렇듯, 동분과 송삼영은 한 다리 건너는 친구의 친구 사이였다. 그런 송삼영이 술만 마셨다 하면 ‘형수님’도 아니고 ‘형수가!’ 하면서 삿대질을 해댔으니, 동분 속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의외로 남편 송일영 덕이었다.      


“니네 삼촌이 술 취해서 난리 치면 니네 아빠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서 삼촌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 쌔렸어. 호호호. 어디 싸가지 없이 형수한테 대드냐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고부 사이에 낀 남편이라잖어. 그래도 그때는 니네 아빠가 항상 내 편을 들어줬어. 근데 당연한 거 아니냐? 누가 봐도 니네 할머니가 나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건데? 호호호. 아무튼 니네 할머니한테 깨지고 방에 오면 니네 아빠가 내 손 꼭 잡아주면서 ‘당신이 참어. 어쩌겄어. 우리 엄니 성깔이 원래 저런걸.’ 그랬다니까? 그러면 나는 또 금세 누그러져가지고 니네 할머니한테 가서 ‘어머니, 아까는 제가 죄송했어요. 그만 화 푸시고 식사 하셔요.’ 하고. 호호호.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얘기하는 겨. 그때는 진짜루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내 탓인 것만 같은 시아버지의 치매 


동분이 시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건 아니었다. 동분 나름대로 열렬히 저항했다. 방식은 ‘분가’였다. 남편 송일영의 동조와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시어머니가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렇게 동분과 송일영, 큰아들 주성까지 세 식구는 1983년 12월 대전으로 나왔다. 청주 신혼집 정리하고 시댁에 들어간 지 꼭 6개월 만이었다.      


“니네 할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들들 볶아대지, 니네 삼촌은 술만 먹었다 하면 온 집안을 들쑤시지. 도무지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니네 아빠한테 얘기한 겨. 난 이렇게는 못 살겄다, 나가서 살자. 그렇게 대전 읍내동 나와서 6개월쯤 살았지. 근데 또 대전 나와 산다고 서당에 아예 안 가볼 수 있냐? 노인네 혼자 애 둘을 키우고 있는데? 한 번씩 가보면 집이 어수선햐. 그리고 우리 세 식구야 니네 아빠가 돈 벌어오니까 먹고살지만, 시댁엔 제대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없었잖어. 니네 삼촌이 근근이 일을 하긴 했지만, 맨날 술 먹고 사고 치는 게 특기인데 돈을 제대로 벌어왔겄어? 그래가지고 1984년 여름에 내가 먼저 다시 서당에 들어가자고 한 겨. 노인네 안쓰러워서. 그 정도 고생했으면 이제는 며느리 소중한 줄 알겄지 하는 기대감으로.”     


물론, 시어머니는 변함없는 사람이었다. 그 성질 어디 안 갔다. 결국, 동분은 버티지 못했다. 1984년 겨울, 동분 가족은 또다시 이삿짐 싸서 대전 대흥동으로 나왔다. 그곳에도 또 6개월쯤 지냈다.                            


“82년에 청주에서 신혼살림 시작한 뒤로 3년 동안 니네 아빠랑 나랑 도대체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는지 아냐? 몇 개 되지도 않는 세간 살림을 쌓았다가 풀었다가. 아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더라고. 그런 데다가 대흥동에서 지낼 때도 서당에 한 번씩 갔었는데, 완전 개판이었어. 영희랑 철수가 한창 아장아장 뛰어다닐 때였으니까, 노인네 혼자 감당이 되겄냐고. 이렇게 살다 간 진짜로 다 죽겠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데? 그래서 결심한 거지. 나 하나만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한데, 고집 그만 부리자. 니네 큰아빠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만 내 인생은 없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나를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다시 시댁에 들어간 겨. 그리고 결정적으로다가 니네 할아버지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     


그렇다. 이 시점, 동분의 시아버지 송병두가 등장한다. 그가 결정적으로 동분의 마음을 움직인 거다. 동분과 시어머니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춰두고, 지금부터 동분의 시아버지 송병두 얘기 좀 해야겠다. 


동분의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에겐 무능한 남편이었어도, 동분에겐 자상한 시아버지였다. 이야기는 다시 1983년 2월, 설날로 간다.      


“니네 형 주성이가 1983년 2월생이니까, 완전 만삭이었지. 청주 신혼집에서 살 땐데 설날이니까 시댁에 갔을 거 아녀. 연휴 끝나서 청주로 가려니까 니네 할머니가 ‘너는 며칠 더 있다 가라.’ 하시는 겨. 니네 아빠는 그때 아직 수행비서 할 때니까 출근해야 해서 먼저 가고, 나만 붙들린 거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3일이 지나도 니네 할머니가 집에 가란 소리를 안 하는 겨. 출산 예정일은 다가오는데 배냇저고리니, 기저귀니 하나도 준비를 안 했었단 말여. 설 지나고 준비하려고. 그래가지고 4일째 되던 날, 안 되겄어.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가지고 ‘어머니, 저 이제 청주에 좀 가볼게요.’ 했더니만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시댁에만 오면 집 갈 궁리부터 하냐?’ 하면서 또 난리를 부리더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서둘러 짐 싸가지고 청주로 왔지. 그날 밤부터 배 아파가지고 다음날 니네 형을 낳은 거 아니냐. 아휴, 까딱하면 서당에서 니네 형 낳을 뻔했어~! 호호호.”     


1984년 여름, 큰아들 주성과 함께. 



‘아들’이면 만사형통이던 시절이었다. 남편 송일영 입이 귀에 걸렸다. 시어머니도 당연히 기뻐해 주실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는 며느리로서 대접을 좀 해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결과적으로 헛된 기대였다. 동분이 아직 시어머니를 잘 몰랐던 것.      


“니네 아빠가 신나서 니네 할머니한테 전화했을 거 아녀. 아들 낳았다고 했더니, ‘그러냐?’ 하고 전화를 툭 끊더래. 그래도 당신 친손자 낳은 건데 잘했다, 고생했다, 한 마디가 없으시더라는 겨. 왜긴? 안 그래도 연년생 애가 둘이나 있는데, 애가 하나 더 늘었으니 반갑지가 않았던 거지. 그런저런 걸 떠나서 아무튼 니네 할머니는 나를 평생 싫어했어. 처음부터 당신은 반대한 결혼인데 우리가 고집 부려서 했으니 그게 평생 못마땅한 거야.”     


산부인과에서 애 낳고 청주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엄마 도움으로 몸조리하며 지낸 지 2~3일이나 지났을까.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봤더니, 시아버지였다.     

 

“니네 할아버지가 그때 75세였는데, 그 추운 겨울에 배낭에다가 미역이랑 배냇저고리랑 기저귀랑 해가지고 한 짐 바리바리 싸 들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온 거여. 나랑 주성이 보겠다고. 그해 겨울이 유독 추웠거든. 그날따라 찬 바람이 얼마나 불었나, 귀랑 코는 빨개가지고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우리 집에 들어오시는데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들어오셔서는 앉자마자 니네 할머니 몰래 왔으니까 비밀로 해달랴. 호호호.”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 동분에게 내밀었다. 이름이 두 개 적혀있었다.      


“니네 할아버지가 원래 문의면에서 부잣집 도련님이었잖어. 그래가지고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었다는 겨. 서당 살 때도 동네 사람들이 애 낳으면 할아버지한테 찾아와서 이름 지어가고 그랬어. 말하자면 동네에서 ‘엘리뜨’였던 거지. 아무튼 니네 할아버지가 ‘송주성, 송주홍 이름을 두 개 지어가지고 왔는데, 아가 너는 뭐가 좋겄냐?’ 하고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님, 주홍이는 좀 여자 이름 같고, 주성이가 좋겠네요.’ 했지.”  

   

다시 얘기하겠지만, 나의 할아버지 송병두는 1987년 1월 사망했다. 그리고 그해 5월 내가 태어났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셔,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엄마는 1983년에 여자 이름 같아 선택하지 않았던 ‘주홍’이 생각났다. 그렇게 난 송주홍이 됐다. 이따금 엄마가 농담처럼 “그래서 니네 형은 하나씩 하나씩 착실하게 이뤄나가는 것 같고,(成, 이룰 성) 너는 그렇게 평생 정착 못하고 떠돌면서 사는 것 같어.(洪, 넓을 홍)”라고 말한다.   

          

“아무튼 그날 니네 할아버지가 집으로 가서 할머니한테 뒤지게 혼났다는 거 아니냐. 노인네가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닌다고. 근데 나는 그날을 평생 못 잊어. 친정아부지도 아니고 시아버지가……. 세상에 그런 시아버지가 어딨냐?”      


시아버지 송병두 입장에서 이제 23살밖에 안 된 며느리와 그가 낳은 첫아들이 얼마나 궁금하고, 또 보고 싶었을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 아내 눈치 보여 며칠을 꾹꾹 참다가 끝끝내 참지 못하고, 새벽녘 아내 몰래 집을 나섰으리라. 시장으로 가 건어물 가게에 들러 때깔 좋은 미역 한꾸러미 사고, 아동복 매장에 쭈뼛쭈뼛 들어가 그 쭈글쭈글한 손으로 배냇저고리를 한참 뒤적였으리라. 그러다 주인장이 추천해준 배냇저고리와 기저귀를 받아들고 어쩌면 흡족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선물이 담긴 배낭을 앞섬에 안고 버스에 올랐을 테고. 좌석에 앉아, 며칠 전부터 고민해 지어둔 이름 송주성과 송주홍, 그걸 적어둔 쪽지가 안주머니에 잘 들어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선잠에 들었으리라.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동분 집에 왔으리라. 


시아버지는 줄곧 그랬다. 그렇듯 언제나 동분 편이 되어줬다. 당신의 아내 성격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시집살이에도 꿋꿋하게 버텨주는 둘째 며느리가 고맙고, 또 미안했던 것.      


“니네 할아버지가 호남형이었어. 키도 훤~칠하니 크고. 니가 꼭 니네 할아버지 닮았잖어. 그래서 사람들이 너 태어났을 때 니네 할아버지가 환생한 것 같다고 농담했다니까? 니네 할아버지가 1월에 돌아가시고, 니가 그해 5월에 태어났으니까. 아무튼 간에 니네 할아버지는 생전에 나만 졸졸 쫓아다니셨어. 말씀도 없으셔. 그냥 서너 걸음 옆에서 나 일하는 거 구경하는 겨. 호호호. 봄에 나물 캐러 가면 옆에 와서 구경하고, 무거운 거 있으면 들어주고. 마당에서 집안일 하고 있으면 거들어 주고. 니네 할머니가 나 괴롭히고 있으면 와가지고 말려주고. 그랬어, 줄곧.”     


시아버지는 떡을 참으로 좋아했다. 그때는 떡 장사꾼이 ‘다라이’에 떡 담아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팔았다. 멀리서 “떡 사세요.” 소리 들리면 혹시라도 놓칠까, 동분은 후다닥 뛰어갔다. 그렇게 사온 떡을 시아버지에게 갖다드리면, 시아버지는 꼭 동분에게 먼저 하나를 건네곤 했다. 그런 시아버지가 치매 앓기 시작한 건 동분 가족이 대전 대흥동으로 이사 가면서부터다.      


“집에 있어 봐야 니네 할머니 바가지 긁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우리가 읍내동으로 나와 살 때도 자주 놀러 오셨단 말여. 오시면 2~3일씩 지내다 가시고. 우리가 대흥동 살 때도 몇 번 오셨었지. 그랬는데, 한 번은 우리 보러 간다고 새벽에 출발했다는 사람이 저녁에 다 되도록 안 오는 겨. 니네 아빠랑 근처 경찰서 돌아다니면서 신고하고 대흥동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지. 겨우 찾았어. 그때 치매가 시작된 거여. 그렇게 며칠 있다가 모셔다드리면 2~3일 있다가 대흥동 또 와. 또 없어져. 그럼 또 경찰서랑 골목길 뒤지고 다니고. 아무튼 대흥동 사는 내내 니네 할아버지 찾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니까?”     


그러던 어느 날, 대흥동 놀러 왔던 시아버지가 또다시 없어졌다. 동분과 송일영은 밤늦도록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자정이 다 되었을 때, 저 멀리, 시아버지가 보였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시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 보는 순간, 동분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모든 게 자기 탓처럼 느껴졌다.      


“니네 큰엄마 말이여. 뻣뻣하고 싸가지 없는 며느리나마 하나 있던 거, 당신 아내가 내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니네 할아버지가 내내 괴로워하셨거든? 그랬는데 상냥하고 싹싹하던 둘째 며느리까지 분가해버리니까 마음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던 모양이여. 그래서 치매가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러다 바지에 똥 지린 모습까지 보고 나니까, 도저히 안 되겄더라고. 치매는 점점 심해지는데 우리 보겠다고 2~3일 걸러 한 번씩 찾아오시지, 그때마다 없어지는데 그러다 영영 못 찾기라도 해봐. 아휴. 그래도 서당은 시골이니까 길 잃어봐야 금방 찾거든. 그래서 니네 아빠한테 얘기했지. ‘주성 아빠, 안 되겠다. 우리 그냥 다시 서당으로 들어가자.’ 그랬더니 니네 아빠가 내 손 꼭 잡으면서 ‘우리 엄니랑 살 수 있겠어? 고맙고 미안해.’ 하더라고. 그때가 그때여. 나를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시댁에 다시 들어간 때가.”    

 

1985년 여름부터 치매 앓기 시작한 시아버지는 결국 1986년 초에 드러누웠다. 그때부터 1년 꼬박 앓다가 1987년 1월, 79세 일기(1909~1987)로 사망했다. 그 1년간 시아버지 병시중 든 건 동분이었다. 끼니마다 죽 끓여 입에 떠드렸다. 똥오줌 지리면 송일영과 함께 이불 빨고, 양동이에 물 받아와 방바닥까지 물로 싹 씻어냈다. 그렇게나 1년간 자신을 고생시켰건만, 동분은 시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서 오열했다. 임신한 산모가 그렇게 울면 탈 난다고 주변에서 달래도, 동분은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하필 또 니네 삼촌이 사고 쳐서 감옥 가 있을 때거든. 아들도 니네 아빠 하나, 며느리도 나 하나, 그런 상황에서 니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겨. 모르겄어. 왜 그렇게까지 울었는지. 아들이 셋이나 되는데 두 놈이나 감옥 가 있는 상황에서 돌아가신 니네 할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나한테 잘해줬던 거, 주성이 낳았을 때 청주까지 찾아왔던 거, 니네 할머니가 나 구박할 때마다 옆에서 편 들어줬던 거, 그런 기억이 막 스쳐지나가면서 그냥 모든 상황이 서럽게 느껴지더라고. 혼자 상주 노릇했던 니네 아빠는 더 했겄지. 둘이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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