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집살이 ②
앞에서, 할머니의 대단한 ‘장손’ 사랑을 언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내가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동분이 26살이던 1986년으로 간다. 그 당시 서당 상황은 이랬다. 치매에 걸려 누워있는 시아버지와 한결같이 까탈스러운 시어머니, 술만 마시면 “형수가!!” 하면서 난동 부리는 막내 시동생, 주성 과 조카 철수와 영희, 여기에 동분과 송일영까지. 식구가 무려 여덟이었다. 이 대식구가 먹고살 수 있었던 건 송일영이 회사택시 굴려 벌어오는 월급 몇 푼과, 그 몇 푼을 쪼개고 쪼개가며 알뜰살뜰 관리한 동분 생활력이었다. 동분 표현 빌리자면 “겨우겨우 굶지 않는 정도”였다. 그렇게나 빠듯한 상황에서 둘째가 덜컥 들어선 거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사연은 이렇다.
“형편이 어려워서 우리도 어지간하면 니네 형 하나만 키우려고 했지. 근데 도무지 안 되겠더라고. 주성이 안쓰러워서. 당장도 그렇지만 나중 생각해서라도 형제자매가 하나는 더 있어야겠더라고. 그러니까 너는 철수랑 영희 덕분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겨. 호호호.”
송씨 집안 장남이자 셋째아들인 송갑영이 감옥에 가고, 그의 아내마저 집을 나가며 졸지에 고아가 된 영희와 철수. 결과적으로 영희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동분이 업어 키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남매가 문제였다. 동분을 괴롭힌 건 당연하게도 시어머니와 막내 시동생이지만, 그 못지않게 영희와 철수도 동분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나란히 1981년, 1982년, 1983년에 태어난 영희, 철수, 주성은 1986년 당시 각각 6살, 5살, 4살이었다. 그 셋은 늘 함께였다. 물론, 함께한다고 셋이 같은 편은 아니었다. 영희와 철수만 같은 편이었다. 세 아이는 아침만 먹으면 벌써 없어졌다. 산이며 들로 뛰어다닌 거다. 그러다 해 떨어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성의없이 휘갈긴 낙서장처럼 주성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다.
“물어보면 영희 누나랑 철수 형이 때렸다는 겨. 니네 형 얼굴 자세히 보면 지금도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많어. 그게 다 영희랑 철수가 그런 거라니까? 진짜로 니네 형 얼굴에 연고 마를 날이 없었어. 그래서 그때 엄마가 혀를 찼다는 거 아니냐. 어린 것들이 어째 이렇게 영악한가 싶어서. 겨우 6살, 5살밖에 안 된 것들이 꼴에 지들은 친남매라고 주성이만 괴롭히는 겨.”
마당에서 잘 놀다가도 울음소리 들려서 보면 영희와 철수가 주성을 구석에 몰아놓고 때리고 있었다. “주성이가 우리 누나한테!!”, “주성이가 내 동생 철수한테!!” 까불었다는 게 이유였다. 놀라서 동분이 달려가면 마룻바닥에 앉아있던 시어머니가 꼭 한마디 거들었다.
“둬라. 안 죽는다, 안 죽어. 애들이 놀다 보면 서로 치고받고 하는 거지. 너는 뭘 그렇게 야단법석이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라더니, 조카들보다 더 얄미운 건 시어머니였다. 주성이 어쩌다 다치거나 울면 애들 다 울면서 크는 거라고 신경도 안 쓰면서, ‘장손’ 철수가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야단법석이었다.
“철수가 어디 요만큼이라도 다쳐서 들어오잖어. 그러면 ‘너는 뭐 하는 얘가 애들도 제대로 못 보냐??!!’ 하면서 빨리 연고 가져오라고 난리가 나. 철수 그것도 약아가지고 내가 어쩌다 잔소리라도 한마디 하면 일부러 큰 소리로 울면서 할머니한테 쪼르르 달려간다? 아휴~! 그러면 니네 할머니는 또 ‘귀한 장손한테 니가 뭔데 뭐라고 하냐??!!’ 이러면서 나를 얼마나 쥐 잡듯이 잡나. 진짜 서러웠다니까? 니네 형이 너~무 불쌍하고. 그래서 결심한 겨.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애 하나 더 갖기로.”
1986년 1월부터 계획했다. 아기가 들어선 건 9월이었다. 몸살이 와서 며칠을 꼬박 앓았다. 임신이었다. 동분과 송일영은 뛸 듯 기뻤다. 그래도 우선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시어머니가 알아봐야 좋은 거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분은 더 고생했다.
“너 갖고 그해 겨울에 날이 얼마나 추웠나, 마당 수도가 다 얼었어. 그래서 마을 밑에 있는 우물에서 물 길어다가 빨래하고 밥하고 그랬단 말여. 근데 니네 할머니한테 임신했다고 말을 못했으니까, 평소처럼 내가 직접 물 길어오고, 그 겨울에 손빨래하고 밥하고. 임신한 몸으로 그 짓을 다 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식사 준비하다가도 헛구역질 올라오면 후다닥 구석으로 뛰어가서 몰래 입덧하고. 그러다 임신 4개월쯤 됐을 때 배가 슬슬 불러오는 바람에 니네 할머니한테 들킨 거지.”
출산할 때도 마음고생이 많았다. 임신 5개월 차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 그래도 집안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런 차에 큰 시누이, 그러니까 송일영의 큰누나 송복희가 실종됐다. 출산 이틀 전이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니네 큰고모가 옆집에 살았어. 나이가 마흔둘이었으니까 결혼은 진작 했고, 남편이랑 자식들이랑 같이 살았지. 그 당시에 니네 큰고모가 보험회사 다녔는데, 젊어서부터 아무튼 멋쟁이였어. 치마 입고 뾰족구두 신고 다니면 그 나이에도 아가씨 소리를 들었으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서당에 오려면 철길 건너서 산길을 한 10분쯤 걸어와야 한다고 했잖어. 그 길이 해 넘어가면 깜깜하고 으슥한 길이란 말이여. 그 길에서 없어진 겨. 구두 한 짝이랑 안경만 떨어져 있더랴. 나야 모르지~! 그 당시에 인신매매범들이 많아서 맨날 뉴스에 나올 때였으니까 인신매매범들이 납치해 간 건지, 어쩐 건지. 눈만 뜨면 니네 아빠랑 할머니랑 큰고모부랑 경찰서 들락거리고, 그 산길 주변 풀숲 헤집고 다니고. 그러니 집이 얼마나 어수선했겄냐. 그런 상황에서 너를 낳은 겨.”
1980년대 여성을 직접 납치하거나 취업 사기 등으로 꾀어 집창촌에 팔아버리는 일이 많았다. <동아일보> 1987년 10월 기사에 따르면 “거리에서 유인한 여중고생과 일간지와 주간지에 낸 허위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부녀자 5백여 명을 전국사창가와 술집에 팔아넘긴 인신매매조직 15개파 40명이 검찰에 의해 적발돼 이중 21명이 구속됐다.”라고 나온다. 또 <경향신문> 1988년 2월 기사엔 “경기도 안양 경찰서는 부녀자들을 유인 납치해 술집과 윤락가에 팔아넘겨온 호남파 한창훈씨(25)와 김정훈씨(22) 등 5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혐의(인신매매 등)로 검거,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라고 나온다. <중앙일보> ‘최은경의 옐로하우스 悲歌’ 시리즈 여덟 번째 기사에서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85~91년 인신매매 형사 사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 피해자의 84%가 성 산업에 매매됐다.”며 “80년대 전두환 정부의 유흥‧향락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로 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한 인신매매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그때 시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우나 고우나 하나 있던 남편도 몇 달 전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훨씬 앞서 장남은 청송교도소에 장기 복역 중이고, 막내아들도 결국 사고 쳐 교도소 간 마당에, 옆집 살면서 말벗 되어줬던 큰딸마저 하늘로 갔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길이 없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그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 눈에나 들어왔을까 싶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배로 열 달 품어 새끼 낳은 동분 입장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탄진에 김주병 산부인과라고 있었어. 새벽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라고. 니네 형한테 ‘엄마가 가서 동생 만들어 올게.’ 하고 아침에 병원 가서 오전 10시쯤 낳았지. 그때 니네 아빠랑 할머니는 큰고모 찾아다니느라 정신 없어가지고, 니네 외할머니랑 같이 갔었지. 그래가지고 니네 외할머니랑 너를 안고 서당에 갔더니만, 니네 할머니가 얼굴이 싹 변하는 겨. 원래 화나면 얼굴 먼저 변하는 양반이었어. 인사도 안 하고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는 거 있지. 그때 니네 할머니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돈이 왔으면 ‘아이고, 제가 갔어야 했는데 고생 많으셨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잖아. 니네 외할머니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안하고 서럽든지.”
어쨌건 주홍이 태어났다. 그때부터 주성은 영희와 철수가 불러도 방 밖으로 안 나갔다고 한다. “내 동생은 내가 지킨다!”라면서 주홍 옆에 꼭 붙어 앉아 보디가드를 자처했다나 뭐라나. 자기도 5살 꼬마였으면서, 도대체 누가 누굴 지키겠다는 건지.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버스 딱 하나 꼽으라면, 나에겐 704번 버스다. 학창 시절 내내, 한 달에 한 번은 꼭 그 버스에 탔다. 목적지는 신탄진, 할머니 집이었다. 이따금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아빠가 바쁘면 엄마라도, 엄마까지 바쁘면 형과 단둘이, 형이 직장생활 시작한 후엔 나 혼자 704번 버스에 올랐다.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다. 아니, 거를 수 없었다. 그건 아빠가 형과 나에게 요구한 거의 유일한 부탁이었다. 매번 타는 버스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난 할머니 집 갈 때마다 입을 삐죽거렸다.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않아서?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오가는 길이 고행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통편이 불편했다. 집에서 나와 20분 이상 걸어야 704번 버스 탈 수 있었다. 그 버스 타고 1시간 가야 신탄진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 30분쯤 걸어야 할머니 집이었다. 왕복 4시간, 아침에 서둘러 가서 점심만 먹고 와도 하루가 끝났다.
빈손이면 그나마 좀 덜 힘들 텐데, 할머니 집 갈 때마다 엄마는 양손 가득 짐 보따리를 싸줬다. 철마다 배추김치부터 열무김치, 깍두기, 동치미 등 김치는 필수였고, 반찬 몇 가지에 손질한 갈치나 동태, 코다리와 무, 대파, 양파 등 각종 식재료와 과일, 거기에 담배 한 보루와 할머니 용돈까지. 그야말로 바리바리 싸줬다. 고생해서 가봐야 ‘장손’도 아닌 손주 퍽 반가워하지도 않는 할머니 반응은 덤이었고. 여하간 할머니 집 한 번 다녀오면 진이 쪽 빠졌다. 잠시 동분 얘길 들어보자.
“그럼 어쩌냐? 니네 큰엄마는 평생을 가봐야 할머니 집 근처도 안 가고, 니네 삼촌은 죽는 그날까지 장가도 못 갔고. 니네 할머니 챙길 수 있는 며느리가 나 하나밖에 없는데 나라도 챙겨드려야지.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아무튼 힘들었어. 니네 할머니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웠다고. 괜히 작고 말랐겄냐? 원래가 성질 예민하고 깐깐한 사람이 입맛도 까다로운 법이거든. 니네 할머니는 그중에서도 대단했지. 누린내나 비린내 나는 거, 아무튼 음식에서 냄새나는 걸 질색하셨어. 그러니까 소, 돼지, 닭 이런 육고기는 아예 안 드셨고, 생선 중에서도 갈치나 동태처럼 비린내 안 나는 것만 조금씩 드셨어. 그러고 보니까 니가 딱 니네 할머니 입맛 닮았네. 호호호. 서당 살 때도 당신 입맛에 안 맞으면 아예 손도 안 대. ‘야~! 가서 고추장 좀 한 숟갈 퍼와라.’ 하면 벌써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겨. 그러면 다른 반찬은 손도 안 대고 고추장에 비벼서 몇 숟가락 뜨고 말어. 그러니 주방 살림하는 내 입장에서 얼마나 피곤했겄냐,”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는 한결같았다. 직접 모시고 산 건 1983년부터 1988년까지 5년 남짓이었지만 그 뒤로도 25년을 더 보살폈다. 자신을 평생 구박한 시어머니를 말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동분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모니까. 부모한테 효도하는데 이유 있냐? 나한테는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어도, 어쨌거나 니네 아빠의 엄마 아녀. 그래서 그렇게 한 거지, 뭔 특별한 이유가 있었겄어.”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마침내 704번 버스에서 해방했다. 그때부턴 매달 엄마 혼자 할머니 집에 다녀왔다. 엄마는 가서도 그냥 오지 않았다. 점심 요리해서 챙겨드리고, 밀린 청소 해드리고, 커피라도 한 잔 같이 마시고 일어났다.
동분은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일어나는데, 시어머니가 “야, 주성 애미야.” 하고 나직이 불러 세웠다.
“그때가 니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딱 1년 전이니까 89세 때네. ‘왜요 어머니,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했더니, ‘고맙다야,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나 싶다.’ 하시더라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니네 할머니가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거. 호호호. 돌아가실 때가 돼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셨겄지. 암만 생각해 봐도 나 같은 며느리 없거든? 당신 61세에 나랑 처음 만나서, 30년 가까이 당신을 챙겨드렸잖아. 그렇게 평생 구박을 했어도 변함없이 챙기는 며느리가 어딨냐?”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시어머니는 요양병원으로 갔다. 그때는 장남 송갑영과 차남 송일영 부부가 돌아가며 매주 요양병원에 갔다. 송갑영 부부가 요양병원에 다녀온 다음 날, 동분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웬일로 니네 큰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받았더니, ‘주성 엄마가 볶아준 돼지고기 먹고 싶으시댜, 노인네가. 다음 주에 그거 좀 해다 드려.’ 하면서 기분 나쁘다는 듯이 톡 쏘아붙이더라? 호호호. 니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식성이 변했나 돼지고기를 쬐금씩 드셨거든. 그래서 내가 한 번씩 빨갛게 볶아다 드렸단 말여. 그게 먹고 싶어가지고 니네 큰아빠한테 미리 얘길 했던 모양이여. 근데 니네 큰엄마가 할머니 식성을 아냐? 집 나갔다가 돌아온 뒤로 평생 시어머니 밥 한 번 안 차려드린 사람인데. 니네 큰엄마는 할머니 보러 가도 절대 집으로는 안 들어갔어. 할머니한테 나오라고 해서 근처에서 칼국수 한 그릇 사 드리고, 용돈 주고 휙 가버렸었지. 그래가지고 내가 ‘아휴, 어머니는 그냥 드시지 왜 그러셨대요. 근데, 형님 어떻게 볶았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평소에 자기들 먹듯이 두툼한 목살 사다가 즉석에서 양념 넣고 달달 볶았다는 겨. 그걸 니네 할머니가 드시겄냐? 그 까다로운 입맛에? 호호호. 나는 항상 대패삼겹살 같은 거 얇은 고기 사다가 하루 전에 양념 조물조물 해가지고 숙성해 놨다가 다음날 볶아서 드렸거든. 그래야 냄새 안 나고 야들야들하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내가 다시 해다 드렸더니, 아이고, 호호호. 아주 잘~ 드시더라고.”
1년을 더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그 1년간, 시어머니는 동분만 찾다가 90세 일기(1922~2011)로 사망했다. 노환이었다. 시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동분은 장례식 내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있었기에 미운 정이나마 들었던 거 같다고, 동분은 회상했다.
송일영의 막냇동생 송삼영은 평생 노모 김동춘과 함께 살았다. 죽는 그날까지 밥벌이하지 않았다. 장남 송갑영과 차남 송일영이 매달 어머니에게 드리는 용돈 뺏어 술만 마셨다. 김동춘은 “저놈 저거, 나 죽으면 어떡하냐.”면서 늘 걱정했다. 괜한 염려였을까. 김동춘이 죽은 6개월 뒤, 송삼영은 51세 일기(1961~2012)로 눈을 감았다. 자연사였다.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간 장남 송갑영이 발견했다. 결혼하지 않았으니, 자식은 없었다. 장례식 없이 조용하게 화장했다.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이었다.
칼바람 부는 어느 추운 겨울. 골목길 모퉁이에 자그마한 포장마차가 보인다. 안에서 뭘 그리 팔팔 끓이는지, 허연 김이 천막 사이로 모락모락 새어 나온다. 주황색 불빛 아래, 그림자가 얼핏 보인다.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고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20대 중반이나 겨우 됐을까, 젊은 주인장이 쭈뼛쭈뼛 인사를 건넨다.
“뭐……. 드릴까요?”
안줏거리를 훑어보니 소 천엽과 간, 꼼장어와 오뎅이 있다. 허연 김 올라오는 오뎅 국물 한 사발이면 뱃속 냉기가 좀 가시겠다.
“오뎅 한 그릇이랑 소주 한 병만 주슈.”
주문을 마치자, 주인장은 미리 썰어둔 오이와 당근 몇 개를 접시에 담는다. 손끝을 따라가다 시선이 멈춘다. 작은 머리통 하나가 보인다. 서너 살밖에 안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있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주인장 바짓가랑이 붙들고 꾸벅꾸벅 존다. 시계 보니 밤 9시가 넘었다. 여느 집 아이 같았으면 벌써 꿈나라로 갔을 시간이다. 그렇지, 졸릴 만도 하다.
“아들인가 보쥬?”
“아~ 예……. 아빠랑 집에 있으라고 해도, 기어코 따라 나와서 이렇게 귀찮게 하네요…….”
남편이란 작자는 뭐하고……. 알 길 없는 사연, 저마다 팔자려니 하고 만다. 소주 한 병에 오뎅 한 그릇을 후딱 비운다. 손끝이 야무지더니, 국물이 깊다.
“들어가실 때 애기 과자라도 한 봉지 사 가슈. 거스름돈은 됐수다.”
5천 원짜리 한 장 건넸더니, 펄쩍 뛰며 잔돈을 주려 한다. 서둘러, 뒤돌아 나왔다.
“자~알 먹고 갑니다.”
컷.
1985년 2월이었다. 당시 동분은 25살이었고, 주성은 3살이었다. 자신을 고등학교 선생이라고 소개한 중년 남성은 동분에게 5,000원을 쥐어 줬다. 동분은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니가 한 번 생각해 봐라. 새파랗게 젊은 새댁이 3살짜리 애기 옆에 앉아놓고 포장마차에서 쏘주를 팔고 있으니, 그 꼴이 얼마나 기막힐 노릇이었겄냐. 짠하고 불쌍했겄지. 그러니까 거금 5,000원이나 줬겄지. 내가 괜찮다고 잔돈 주려니까, 자기가 고등학교 선생인데 애기가 예뻐서 주는 거라고 하고는 서둘러 나가더라고. 그래가지고 못 이기는 척 받은 겨. 그게 참 두고두고 고맙더라고. 그래서 그 아저씨를 못 잊는 겨. 짙은 갈색 롱코트에 회사원들 들고 다니는 검은색 가죽 가방 들고 있었고, 금색 테 두른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인상이 참 선하게 생겼더라고.”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축산품질평가원, 한국소비자원 자료를 종합하면 1985년 소주 1병에 약 338원, 국내산 삽겹살 한 근(600g)에 약 3,578원이었다. 당시 5,000원이면 소주 15병이나 삼겹살 한 근 반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참고로 2023년 현재 소주는 1병에 평균 1,665원, 삽겹살은 한 근에 평균 1만4,904원이다.
얘기했던 것처럼, 시집살이 당시 동분은 ‘분가’하는 것으로 시어머니에게 저항했다. 1984년 12월, 서당에 살던 동분 가족이 대전 대흥동으로 다시 이사 나온 건 말하자면 두 번째 투쟁이었다.
“그때 니네 아빠가 신탄진에서 택시 굴렸는데, 대전으로 이사 나온 김에 대전에 있는 택시회사 취직한다고 그만둔 거여. 근데 또 막상 곧바로 취직이 안 되더라고. 그러는 바람에 니네 아빠가 졸지에 백수가 돼가지고는 한 서너 달 쉬었지. 니네 형이 그때 3살이라 유치원 다녔는데 유치원비랑 월세는 둘째 치고, 당장 세 식구 밥 빌어먹을 판이 된 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이던 때, 송일영 친구가 포장마차 한 번 해보라고 권했다. 아는 ‘일수쟁이’한테 얘기해 이자를 싸게 해줄 테니, 거기서 돈을 좀 빌리라는 말과 함께. 공장만 다니다 결혼했던 25살 동분이나, 운전 말고는 해본 역사가 없는 31살 송일영이나 세상 물정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겁도 없이 일숫돈 50만 원을 덜컥 빌려 포장마차를 차렸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및 대학알리미 자료에 따르면 1985년 당시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약 125만 원이었다. 2023년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약 756만 원이다. 1985년 대비 약 6배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당시 동분과 송일영이 일수로 빌린 돈은 300만 원의 값어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사의 ‘장’ 자도 모르는 젊은 부부가 그 어렵다는 술장사를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어쨌거나 판은 벌어졌으니, 수습해야 했을 터.
“그러니까 환장할 노릇이지, 호호호. 내가 장사를 해봤겄냐, 니네 아빠가 장사를 해봤겄냐. 거금 50만 원을, 그것도 일수로 빌렸으니 죽으나 사나 이제 해야 되는 겨. 엄마가 아침부터 시장에서 장 봐 와가지고 안줏거리 준비하고. 그러다 어둑어둑해지면 니네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를 밀고 끌어서 장사하러 가는 겨. 아빠가 같이 장사하긴? 남자가 포장마차 주방에 있으면 장사 안 된다고 해가지고 니네 아빠는 장사 준비만 도와주고 집으로 갔지. 그럼, 니네 형도 아빠 따라 집에 가 있으면 좋겠고만, 아휴~! 아주 울고불고 난리가 나. 무조건 엄마랑 있겄댜. 그러니 어쩔 수 있냐? 니네 형 옆에 앉혀놓고 밤까지 장사 하는 겨. 그러다 니네 아빠가 새벽 1시쯤 오면 같이 정리해서 다시 포장마차 끌고 집으로 오고.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안주로 팔려고 갖다 놓은 소 천엽이랑 간 있잖어. 쌩 거. 니네 형이 그걸 그렇게 잘 먹더라? 그 어린 것이. 웃겨 죽겠다니까. 호호호. 아무튼 간에 그때 고생 무쟈게 했지. 겨울이라 날도 춥고, 어린 마음에 취객 상대하는 것도 너무 어렵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 그러니까 포장마차 시작한 지 채 석 달이 안 되었을 즈음, 송일영이 동분에게 그러더란다. 아무리 우리가 쪼들려도 이건 못 할 짓인 거 같다고. 당신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안쓰러워서 더 이상 못 보겠다고. 일숫돈 빌린 건 자신이 어떻게든 갚아볼 테니, 포장마차 접자고.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호호호. 아닌 말이 아니라, 나도 진짜 못하겠더라고. 몸도 마음도 고생이고, 니네 형 포장마차에 앉혀놓는 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장사가 대단하게 잘 되는 것도 아니었고. 나랑 니네 아빠랑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 배운 겨. 호호호.”
동분이 포장마차 접고 얼마 안 있어, 송일영이 대전에 있는 택시 회사로 취직했다. 그렇다고 당장 여유 생길 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진 건 아니었다. 회사택시 굴려 받아오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시댁에 생활비 보내고, 빌린 일숫돈 갚고 나면 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했다. 동분은 그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옛날엔 회사택시 기사들이 매일 사납금을 회사에 갖다줬어. 예를 들어 정해진 사납금이 3만 원이다. 그러면 매일 택시 굴려서 3만 원은 회사에 주고, 남은 돈만 본인이 갖는 겨. 그렇게 하고 월급은 기본급으로 쬐금 받는 방식이었지. 그 당시에 니네 아빠가 나한테 매일 갖다주는 돈이래봐야 2천 원에서 5천 원이었어. 그렇게 찔떡찔떡 갖다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겨. 그러고 쬐금 받는 월급으로는 밀린 공과금이랑 월세 같은 거 내고 그랬지. 그러니까 회사택시 굴리는 집은 맨날 푼돈인 겨.”
형편이 그랬다. 쌀 한 말을 사보지 못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동분이 제일 먼저 하는 게 쌀집 가서 쌀 ‘한 되’(곡식, 가루, 액체 따위를 담아 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주로 사각형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다. 쌀 한 되는 보통 1.6kg이다.) 사 오는 거였다. 쌀 한 되로 밥 안치면, 세 식구가 하루 세 끼 딱 먹었다.
“야, 그 시절이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었어도, 누가 쌀을 한 되씩 사냐. 보통 한 말(16kg)씩 사지. 매일 아침마다 쌀집 가는 게 얼마나 챙피했는 줄 아냐. 근데 또 기막힌 게, 그때 니네 아빠 친구 하나가 근처에 살았어. 백수건달 아저씨. 그 양반이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 우리 집에 오는 겨. 와가지고는 밥을 고봉으로 두 그릇씩 먹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니네 아빠는 밥을 많이 안 먹잖어. 그러니까 쌀 한 되로 세 식구가 세끼나 먹었던 거지. 근데 그 양반 오는 날엔 쌀 한 되가 한 끼로 끝났다니까? 나는 막 걱정돼가지고 그 양반 숟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겨.”
때만 되면 찾아와 쌀 축내는 남편 친구가 얄밉기도 하고, 눈치도 없이 매일 친구 부르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참고 또 참았던 동분이 하루 날 잡아 송일영에게 한마디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곧 죽어도 자존심이었던 송일영을 건드린 것. 동분은 동분대로 남의 편이 되어버린 남편 태도가 섭섭했다.
“니네 아빠 한다는 말이, 우리 밥 먹는데 수저 하나 더 놓는 게 뭐 그리 대수냐는 겨. 살림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속 편한 소리 하는 거지. 친구 밥 먹는 것까지 뭐라 한다고, 나한테 승질을 막 부리는데 아휴~!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라고. 그날 니네 아빠랑 대판 싸웠다는 거 아니냐. 그때가 결혼 4년 차였는데, 아마 그게 첫 부부싸움이었을 걸? 그 뒤로는 뭐, 이날 이때까지 무쟈게 싸웠지. 원래 시작이 어려운 겨. 일단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고,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