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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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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Feb 13. 2021

<오늘의 술> 까뮤 VSOP 구형

구형 꼬냑의 숙명, 바사삭

오랜만에 남대문에 들렀다. 새로 맛 볼 술을 몇 병 샀다. 버번 위주인 술 구성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우선 제임슨은 선물용으로 구매. 조니워커 블랙은, 피트 향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위해 경험치 쌓을 목적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까뮤 구형 VSOP를 구했다. 처음으로 사는 브랜디다. 여태 꼬냑, 브랜디 쪽은 건드리지 않았다. 언젠가 XO급으로 입문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다. 그런데 XO급을 구하려면 최소 10만 이상은 써야 한다. 영 못 살 가격은 아니지만 그 돈이면 다른 대안이 너무 많다. 금전적 여유가 넘쳐날 때를 기다린다 한들 다른 우선 순위가 생길 게 뻔하다. 그래서 알량한 욕심일랑 버리기로 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면 타협 뿐이다. VSOP라도 좋으니 일단 꼬냑 맛을 얼른 보기로 했다.

까뮤는 5대 꼬냑(까뮤, 레미 마르탱, 헤네시, 마르텔, 꾸브와제) 중 하나다. 5대라고 해서 가장 맛 좋은 순서대로 잘라 놓은 것은 아니다. 판매량과 인지도, 회사 크기 등에 따른 분다. 국내에서는 까뮤, 레미 마르탱, 헤네시 제품을 찾아보기 쉽다.

나는 까뮤 VSOP 구형을 선택했다. VSOP는 XO보다 하나 낮은 등급이다. 말했듯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구형을 샀다. 구형 꼬냑이 신형보다 조금 더 선호도가 높고 값어치가 있다. 5대 꼬냑 신형에 불만족을 드러내는 여론의 영향이다. 품질은 낮아지는데 값은 올리는 ‘배부른 장사치 짓’을 한다 이거다. 캐러멜 색소를 넣는다든가, 가당을 한다는 이슈 등 신형 꼬냑에 관련한 말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구형을 샀다. 생각보다 쉽게 구했다. 5만원 대에. 시뻘건 전용 박스에 담아 와 즐거운 마음으로 시음을 할 차례.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잔뜩 젖어 보이는 코르크 마개가 애초에 불안불안했다. 슬슬 돌려 따는 순간 맥없이 바스러져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코르크 마개를 쓰는 모든 술병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그 확률은 오래 된 병일수록 높아진다. 코르크가 삭아버리거나 반대로 너무 건조해져 부서져버리는 경우가 잦다. 특히 구형 꼬냑은 이런 꼴을 보게 될 확률이 거의 반반이다. 그렇지만 인간 심리가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다 똥을 밟아도 자신은 다 피할 것 같다. 나도 그랬다. 나만은 승리의 ‘뽕’ 소리(코르크 마개 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얼마간 얼이 빠진 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살려보기로 했다. 잔뜩 젖고 삭아 갈라진 코르크에 와인 오프너를 갖다 댔다. 굉장히 무른 상태기 때문에 힘을 주면 젖은 귀지처럼 바스라지며 안으로 퐁당퐁당 빠질 위험이 있었다. 세심하게 스크류를 돌렸다. 푹 익힌 고구마에 스크류를 박아 넣는 느낌이었다. 몸통을 어느 정도 관통한 듯 싶어 조심스레 뽑아 올렸다. 젖은 코르크가 스크류에 꿰어진 채 병 입구 위로 모습을 조금씩 드러냈다. 해냈다. 성공했다. 코르크 부스러기를 말아 넣은 꼬냑이 될 위기를 넘겼다.



한 숨 돌렸다. 다시금 위스키와 브랜디에 쓰이는 코르크가 얼마나 적폐인지 되뇌었다. 컨디션까지 신경써야 할 뿐더러 밀폐력도 스크류 캡에 비해 탁월하지 않은 비효율적 소재. 오로지 감성을 위해 만들어진 구시대적 산물. 온갖 저주를 퍼붓고 나서야, 슬슬 맛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내용물을 잔에 따라 냈다. 위스키보다는 조금 점도가 있었고 갈색 빛을 띄었다. 오크 향과 풍성한 과실 향이 코를 자극했다. 위스키와 사뭇 달랐다. 포도를 증류한 술 답게 화려했다. 향이 압도적이어선지 입에서 느끼는 맛은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계속 향을 맡고 싶었다. 쥐 오줌만큼 따라 놓고 연달아 킁킁대며 음향(?)했다. 이런 매력이 있어서 브랜디, 꼬냑을 찾는구나 싶었다. XO나 Extra급이 더 궁금해졌다. 분명 금세 맛볼 일은 없겠지만.

밀봉은 버리지 않고 남겨둔 와인 코르크를 박아 넣어서 해결했다. 며칠 동안만. 이후로는 방에 굴러다니던 와인스토퍼로 막아 뒀다. 브랜디, 꼬냑은 에어링 영향을 많이 받아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풀린다 하니, 조금씩만 마시다 한두 달 뒤에 다시 각 잡고 맛을 봐야겠다. 그땐 코르크가 바스라질 일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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