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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Nov 04. 2023

프롤로그. 세 번째 사표

기어이 세 번째 사표를 써 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집단 생활과 거리가 먼 성향이다. 집단에 특별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충성심도 없다. 위계와 서열, 나이 따지기, 선후배 놀음을 무척 싫어한다.


직급 사다리에 애처롭게 매달린 채 아래를 굽어다 보는 '윗분'의 뜻모를 소리를 금언처럼 따르는 척 할 스킬도 없다. 그럼에도 여태 몇 년을 집단에 머물렀다. 특정 조직에 들어가고 싶다 염원하기까지 했다.


안정이 고팠다. 생긴 대로 삐딱하게만 살 수 없었다. 먹고 살려면 나를 깎아야 했다. 나는 표류 중이었다.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 최소한의 복지, 그럴듯한 직책, 상사의 인정, 쌓여가는 커리어를 부표처럼 끌어안기로 마음먹었다.


사회가 날 잘 길들여 보길 바랐다. 남들처럼 살자. 남들처럼 살자. 비쭉이는 속을 내내 다독였다. 숨 죽여 엎드린 하루가 그렇게 여럿 쌓였다.


일요일이었다. 눈 뜨자마자 회사 생각이 났다. 24시간 뒤면 출근해야 한다. 마음에 먹구름이 꼈다. 걱정과 불안과 초조한 감정이 잿빛 비로 쏟아져 내렸다.


상념에 푹 절어 얼룩진 채 침대에 눌어붙었다. 꿀보다 더 단 일요일 휴무를 알차게 보낼 에너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뭔가 크게 잘못 되었다고 되뇌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



이보다 한 주 전에는, 아프기를 염원했다. 마침맞게 아내가 코로나에 걸려 있었다. 증상이 아주 경미하여, 아내를 걱정하는 대신 속없는 기대를 품었다. 병세가 나에게 옮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란 것이다. 힘을 내 바이러스야. 나에게 오렴. 힘을 내어 나를 힘없게 만들어 주렴.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주일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 법적 격리 의무는 사라졌지만 사내 규정이 그랬다.


물론 재택 근무 역시 근무다. 일은 해야 한다. 그래도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억지로 잠을 쫓으며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운 눈을 힘겹게 들어올리는 순간, 화장실에 들어서 찌푸린 얼굴에 물을 끼얹는 순간, 풀린 눈으로 무얼 걸칠지 맥없이 고민하는 순간, 메마른 목구멍에 아침밥을 욱여넣는 순간, 대중교통 탑승 시간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현관문을 바삐 나서는 순간, 이동식 인간 압축팩에 다름없는 버스와 열차의 벌어진 입으로 뛰어드는 모든 순간마다 온 몸을 감싸는 음울한 기운을, 재택 근무라면 덜 느껴도 될 터였다.


아내는 켈룩켈룩 기침을 쏟았다. 동시에 나는 속에 든 헛바람을 잔뜩 쏟아냈다.



“우리 여태 딱 붙어 있었으니까 나도 곧 코로나 걸릴 거야.”



“오! 어쩐지 목이 아픈 것 같은데?”



“진짜, 진짜야. 어제는 침 삼킬 때만 살짝 걸리적거리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조금 더 뭔가 부은 느낌이라니까.”



학창 시절 아폴로 눈병이 유행할 때, 학교 한 번 빠져보고자 서로 눈을 부벼 가며 바이러스를 동냥 받던 시절보다 나는 간절했다.


일주일 뒤, 아내는 가뿐하게 나았다. 나는 애석하게도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지 않았다. 멀쩡한 상태를 멀쩡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결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일요일 오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뜻없이 거실을 배회했다. 아내를 향해 웅얼웅얼 한두 마디를 뱉었다. “내일 쉴까?”, “연차 쓸까?” 강렬한 바람을 애써 질문처럼 포장해 냈다. 하루이틀 연차야 낼 수도 있다. 유난 떨 일이 아니다. 점차 세를 불려 가는 불길한 확신이 다만 걱정이었다. 이번에 쉬고 나면 다시 회사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불안했다. 신혼인데다, 이제 막 진급도 하고 연봉도 올랐다. 이제 좀 길이 드나 싶었는데 이따위 불경한 마음을 또 다시 품어도 되나 싶었다. 그럼에도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으며 나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대로는 행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좀비에 물린 시계추처럼 힘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한 지 20여 분. 결심이 섰다.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팀장님 제가 지금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갑작스럽지만 목요일까지 연차를 써야 하겠습니다."



이로부터 꼭 나흘 뒤,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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