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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Nov 05. 2023

통제불능

1. 조직 부적응자

나는 길들이기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통제를 싫어하여 도무지 제어가 잘 안 됐다. 말 못하는 영아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하도 열이 뻗쳐 어린 나를 침대에 팽개쳐 버린 적도 있다고 언젠가 시인했다. 쪼그만 게 여간 말을 안 들어먹는 게 아니었단다.


당시 일이 기억날 리 만무하지만 절벽처럼 납작한 내 뒤통수를 매만져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머리뼈가 말랑할 때 모양을 반듯하게 잡아 주려고, 누운 내 고개를 엄마가 살짝 돌려 놓으려 치면 맘에 안 든다는 듯 재까닥 목을 홱 도로 꺾어 언제나 곧은 자세만 고수했다고 한다. 아마 나를 통제하려는 힘에 대항한 역사적인 첫 발버둥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때부터 나는 다루기에 만만하지 않았다. 이후의 모든 양육 과정에 내가 순순히 협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가진 성격을 스스로 가장 잘 아는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엄마가 나를 딱딱한 맨바닥이나 어느 야산 구덩이가 아닌 매트리스 위에 던지는 정도로 화를 삭혀 참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성장기 때는 더 말할 게 없다. 자아가 형성된 이후부터 독불장군이었다. 흔히 말하는 똥고집 역시 많이 부렸다. 이치에 맞든 아니든 원하는 바가 아니면 절대 따르지 않으려 했다. 멋대로 하지 못하면 세상 천지에 존재하는 짜증이라는 감정을 다 끌어모은 듯 ‘꼬라지’를 냈다.


엄마는 고성과 손찌검으로 나를 다스리려 시도했다. 얻어맞기는 싫어 주춤했지만 결국은 반감만 자랐을 뿐 딱히 체벌의 긍정적 효과는 없었던 듯하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더욱 확실한 심리적 성곽을 구축해 나갔다. 이때부터 나는 나를 둘러싼 크고작은 억압에 대해 의문을 품고 소심하게나마 저항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학원에 가기 싫어 일종의 가출을 했다. 열세 살 무렵, 소위 스파르타식 학원이라는 사교육 형태가 유행할 때였다. 방과 후 학원에 반 감금되어 늦은 밤까지 수업을 듣거나 강제 자습을 해야 했다. 학교는 좋았지만 학원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친구들과 떠들고 놀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며,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갇힌 기분이 싫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아이들의 감옥. 극단적인 통제와 상벌로 이루어진 환경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할 영문을 몰랐다.



그러다 한 날에는 무단으로 학원을 하루 빠졌다. 학원 버스를 타고 건물 앞에 내리고선 들어가지 않았다. 혼이 날 게 뻔하니 집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밤 늦도록 밖을 배회했다. 출석이 이루어지지 않아 당연히 학원 측은 집으로 연락을 취했고, 아빠와 엄마는 내 친구와 친구 부모님까지 동원해 행적이 묘연해진 나를 찾아다녔다.


그 때 나는 학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밤이 늦어지자 어린 나도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고작 만으로 열 살 조금 넘었을 뿐인 아이가 늦은 밤에 가 있을 마땅한 곳이란 사실상 없었다. 고민 끝에 공중전화를 찾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에게 학원에 가기 싫어 그랬노라고, 학원이 정말 싫다는 의사를 쭈뼛쭈뼛 밝혔다.



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정 그러면 이 달까지만 나가기를 종용했다. 일종의 타협안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나는 단 하루도 더 있을 수 없었다. 곧바로 반기를 들기엔 벌여 놓은 일이 많고 피곤하여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학원 앞까지 바래다 준 엄마의 기대를 배신하고 나는 또 다시 학원 문전에서 발길을 돌렸다. 전날과 같이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집 앞에 도착해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엄마는 곧 나를 발견했다. 이틀 연속 걱정을 끼쳤다는 이유로 눈에 불빛이 번쩍 할 만큼 뺨과 안면을 손바닥으로 수 차례 얻어맞고 발로 채였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꼬맹이에게 당시로서는 아주 응당한 결과였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으면서도 필요 이상의 규율을 강조하는 집단이나 상황을 부단히 꺼렸다. 가혹하고 비 인간적이라 느꼈다. 고등학생 때는 사실상 강제와 다름없던 야간 자율학습에서도 반에서 거의 처음으로 빠졌다.


수업이 끝난 이후라면 적어도 공부를 할 곳과 공부 시간은 내가 정하고 싶었다. 별도로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할 예정이니 야자를 빼 달라고 담임 선생님을 설득했다. 학원은 당연히 다니지 않았다.


부족한 공부는 영어와 수학에 한해 일주일에 두서너 번 짧게 과외를 받거나, 당시 활발히 공급되기 시작하던 인터넷 강의 수강 정도로 보충했다. 내 방식대로 한 결과 알아 주는 명문 대학까지는 아니지만 서울 안에 있는 학교를 어쩌저찌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갓 성인이 되고 나니 딱 두 가지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군대, 그리고 취업. 병역 이행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병역 거부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국가에 대항할 객기는 없었으므로, 대학 생활을 1년 하고 냉큼 지원하여 빠르게 마치고 나왔다.


군은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온갖 유형의 부조리와 비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만큼이나 하나하나 열거하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지독한 기억을 안고 나왔다. 하나 남은 것이 이제 밥벌이인데, 여태 겪었던 것들과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 웬만해서는 반 평생에 걸쳐 매진해야 하며 삶 자체를 갈음할 만한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만한 토익 시험 한 번을 치른 적이 없다. 잘 나가는 기업에 들어가려 용을 쓰는 것도, 운 좋게 들어가 일을 하는 것도 나 답지 않으며 나로서는 행복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 곳에 속한 내 모습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내 꿈은 언제나 프리랜서였다. 최대한 혼자 힘으로 벌어먹는 삶을 살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경력도 포트폴리오도 없는 개인에게 일을 줄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일단 뭐든 경력을 만들자고 스스로와 타협을 했다. 전공과 영 딴판도 아니며, 특기 중 하나였던 글 쓰는 일을 살리고 싶었다.


내가 찾은 길은 잡지였다. 무작정 국비 지원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 관련 교육을 이수했다. 그렇게 작은 잡지사에 첫 취업을 하며 사회로의 어설픈 첫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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