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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장모님 유산

나의 장모님은 남다르신 분이다. 신기하게도, 벌레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벌레 앞에서 장모님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방에 벌레를 죽인다. 벌레의 종류, 크기, 생소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떤 벌레라도 장모님 눈앞에 띄면 그걸로 끝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장모님은 벌레 최상위 포식자셨다. 자비심 따위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살충 머신이셨다.


처음엔, 장모님이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지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오랜 시간 동안 단련해 온 능력인 줄로만 알았다. 수많은 벌레들을 섭렵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특이한 버릇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가 더 있었다. 


장모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의 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버릇이라고 하셨다. 어렸을 적부터 딸은 벌레를 유독 무서워했단다. 벌레만 나타나면, 어쩔 줄 몰라했단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단다. 그런 딸 앞에서 장모님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해져야 했단다. 그 딸은 자라서 지금 내 아내가 되었다. 


패턴은 항상 같았다. 벌레를 보고 놀란 아내가 기겁하면, 어디선가 장모님이 등장하셨다. 맨손으로 벌레를 마구 잡으셨다. 어떤 벌레도 장모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어디서 감히 내 딸을 위협해. 이 한마디와 함께 몇 차례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고 나면, 그걸로 상황 종료였다. 아내가 무서워했던 벌레는 여지없이 죽어 있었고, 거짓말처럼 아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벌레는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채 알지도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지금의 나와 사는 아내는 아직도, 변함없이, 벌레를 무서워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벌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벌레 앞에서 공황에 빠지는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벌레가 무섭긴 무섭다. 차이가 있다면, 아내가 무서워하는 벌레와 내가 무서워하는 벌레가 살짝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아내만큼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던 나는 장모님이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내 앞에서만큼은 용감해져야만 했다. 모두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를 둔 죄다. 


아내는 벌레가 나타나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창한 구조신호 같은 건 없다. 소리를 지르고, 벌레로부터 간신히 도망쳐 오는 게 전부다. 장모님의 방식과 나의 방식은 다르다. 벌레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나는 주로 생포해서 살려주는 쪽이다. 내가 장모님보다 더 착해서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맨손으로 벌레를 잡지 못한다. 일단은 아내의 눈 밖으로 벌레를 치우는 것이 목적이다.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하냐고? 또 잡아서 살려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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