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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벌레를 대하는 마음

아내는 벌레를 싫어한다. 단순히 기피하는 정도가 아니다. 공포를 느낄 정도로 무서워한다. 확실히 아내는 벌레 공포증을 앓고 있다. 


물론 아내가 세상의 모든 벌레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벌레에는 무덤덤한 편이다. 바퀴벌레 같은 몇몇 특정 벌레만 무서워한다. 특히 다리 많은 벌레는 보자마자 몸서리부터 친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벌레를 싫어한다. 적어도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벌레와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 아내가 싫어하는 벌레와 내가 싫어하는 벌레는 다르다는 점이다. 다리 많은 벌레를 유독 무서워하는 아내와 달리, 나는 말벌을 가장 무서워한다. 아내 못지않게 바퀴벌레를 싫어한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를 곁에 둔 덕분에, 나는 번번이 흑기사로 변신해야만 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다. 단지 아내만큼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최소한 벌레로부터 아내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이제는 아내의 비명만 들어도, 어떤 벌레가 출현했는지 대충 짐작을 할 정도다. 잡을 건지, 쫓아낼 건지, 죽일 건지 결정할 일만 남은 것이다.


오랫동안 아내를 지켜온 탓에, 이제는 대부분의 벌레에게는 꽤 무덤덤해졌다. 단 한 녀석만 빼고, 말이다. 여전히 바퀴벌레는 적응이 안 된다. 특히 바퀴벌레 크기가 클수록, 힘겹다. 나도 모르게 겁을 먹게 된다. 무기를 찾다가 번번이 놓치기도 한다.


녀석들은 민첩하고, 영악하다. 한동안 바퀴벌레를 쉽게 잡아 보겠다고 덫을 놓아 보기도 했고, 독이 든 먹이로 유인해 보기도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런 어리숙한 방법에 걸려드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잡히는 놈들은 호기심 많은 초짜뿐이었다. 아마도 진짜 경험 많은 녀석들은 어둠 속에 숨어서 유유히 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바퀴벌레 때문에 살충제를 들고 설쳐대는 짓도 차마 못할 일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지만,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다. 바퀴벌레 한 두 마리 잡겠다고, 여기저기 약을 뿌려 대다가, 결국에는 사람 잡을 지경까지 이르기 일쑤였다. 

해충박멸업체를 부르는 게 그나마 효과는 확실했지만, 일단 목돈이 들었고, 이 방법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잠시 바퀴벌레들을 집에서 멀리 쫓아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바퀴벌레들은 되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많은 식솔을 데리고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퀴벌레에게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퀴벌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퀴벌레와의 공존을 받아들이고, 바퀴벌레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배우고, 어떤 습성을 가졌는지 알아가는 것뿐이다. 바퀴벌레의 역사까지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 존재해왔고, 어쩌면 인류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 존재일지도 모르니까. 가까운 미래에는 바퀴벌레를 통해 인류의 생존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바퀴벌레에 대해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바퀴벌레를 죽여왔다. 때때로 눈앞에서 놓치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순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서 죽였고, 아내가 무서워해서 죽였다. 집에서도 죽였고, 여행 가서도 죽였다. 어미도 죽이고, 새끼도 죽였다. 죄책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바퀴벌레를 보고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그러니까 처음으로 망설였던 건,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놀랍게도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바퀴벌레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바퀴벌레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결국 나는 그 바퀴벌레를 죽일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나는 위선적이다. 입으로는 바퀴벌레와의 공존을 외치지만, 막상 바퀴벌레가 출현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변함없이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바퀴벌레에게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퀴벌레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미묘하지만,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내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안다. 때때로 여행은 일상을 바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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