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43일 차

플라스틱 쓰레기를 또 만들어 냈다는 죄책감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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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 안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2리터 들어 있거든요. 아이스크림 2리터는 꽤 많은 양이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아이스크림이 사라지는데 이틀밖에 안 걸렸다는 게 믿어져요? 마트에서 사 온 다음 날, 저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비어버린 저를 바로 버리지 않고 깨끗이 닦더라고요. 그 순간, 예의 바른 주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깨끗이 세척해서 버리겠다는 마음이 정말 기특했죠.


그런데 주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요. 글쎄! 세상에 말이에요! 제 안에 다진 파를 담더라니까요. 기가 막힌 일이었죠. 평생 아이스크림만 담아왔던 고귀한 제게 어떻게 그런 치욕스러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거죠? 그게 제게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 몰랐나 봐요. 세상에 어떻게 아이스크림 통에 파를 담을 생각을 할 수 있죠?


화는 정말 많이 났지만, 제가 뭐 별 수 있나요. 일단은 주는 대로 주워 담을 수밖에 없었죠. 달달한 아이스크림 향이 가득했던 제 몸은 금세 파향으로 가득해졌어요. 그런데, 제 안에 있던 파를 다 쓰고 나니까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기더라고요. 이번에는 제 안에 생선을 담더라니까요. 그 생선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부세. 부세라고 했어요.

어휴! 비린내가 얼마나 심하던지. 며칠 동안 코를 막고 지냈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무슨 생선을 그렇게 오래 먹는지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거의 반년이 지나서야, 제 안에 담겨있던 부세들이 다 사라졌어요. 비린내 때문에 미칠 것 같았는데, 그나마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런데 오랫동안 나를 실컷 활용해 놓고서, 이제 와서 비린내 때문에 이 통 못 쓰겠다고 버리겠다고 하다니. 정말 염치없군요.


제발 부탁인데, 버리기 전에 저 샤워 한 번만 시켜주면 안 돼요? 밖에 나간 뒤에 혹시라도 제 친구들을 만나면, 저 놀릴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제 안에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안 믿어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할인마트에서 아이스크림 세일을 한다고 하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1+1 행사라도 하는 경우라면,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할인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나니, 그제야 통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이든지 그냥 버리지 못하는 아내가 기어코 통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낸다. 2리터까지 아이스크림 통은 덕분에 냉동고에서 몇 차례나 재활용되었다. 하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를 또 만들어 냈다는 원죄에서 끝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종이에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사야 할까 보다.


싱크대에서 뒹굴고 있는 컵홀더 2개가 눈에 띄었다. 두 개 다 컵을 구입할 때, 컵에 껴있던 것 들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컵은 오래전에 집에서 퇴출되었다. 하나는 금이 가서, 하나는 이가 나가서. 아내에게 컵홀더는 왜 버리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다른 컵에 쓰려고 안 버렸다고 대답한다. 다른 컵이라니? 어떤 컵? 새로 살 미래의 컵? 아내와 나는 의논 끝에 결국 컵홀더를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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