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44일 차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뭘까?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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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밥그릇이야. 내 겉모습만 보고, 그냥 평범한 밥그릇이라고 여기면 곤란해. 이래 보여도 밥뚜껑까지 갖춘 완벽한 밥그릇이란 말이지. 밥뚜껑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아? 밥 먹을 때마다 복을 불러들이라고, 복이란 한자까지 새겨 넣었다고.

내 안에 밥이 담겨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깃밥이라고 부르지. 공기는 원래 빈그릇을 의미했는데, 차츰 덜어먹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바끤거야.


나 같은 스텐 밥그릇이 한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야. 이전에는 나 같은 밥그릇에 밥을 먹지 않았어. 대부분의 밥그릇들이 사기로 만들었거든.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조선시대 밥그릇 크기는 어마어마했다는 거야. 지금 라면 그릇으로 사용하는 그릇이 밥그릇 크기였거든. 거기에 밥을 양껏 담아서 먹었다고. 물론 혼자서 말이야.

내 말을 못 믿겠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한 게 있지.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가 <청전관전서>에 쓴 기록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거든.


보통 사람들은 한 끼에 5홉, 양이 큰 남자는 7홉을 먹고, 아이는 3홉을 먹는다.


1홉이 180ml이니까, 5홉이면 900ml이고, 7홉이면 1260ml, 3홉은 540ml 정도 되는 거지. 내 크기가 200ml 정도 되니까, 이제 좀 가늠이 돼?


나처럼 작은 밥그릇은 왜 등장했냐고? 내가 등장하기 직전인 1960-1970년대는 쌀이 부족했던 시기였어. 지금처럼 쌀이 남아돌던 시대가 아니었지. 그래서, 정부에서 나서서 밥그릇을 통제했어. 작고 규격화된, 나 같은 그릇을 만들어서 보급했던 거야. 한편으로는 쌀보다 밀가루를 소비하도록 유도하기도 했지.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아직도 식당에 가서 밥을 달라고 하면, 나 같은 그릇들을 볼 수 있잖아? 공깃밥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밥솥에서 나를 꺼내서 주잖아? 한 그릇 먹고 부족해서 더 달라고 하기도 하잖아?


쌀이 부족해서 나 같은 밥공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나를 사용하는 게 납득이 돼? 나보다 예쁜 밥공기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밥공기가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왜 아직도 많은 식당에서는 나 같은 밥공기를 쓰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리고, 밥은 금방 한 밥이 제일 맛있잖아? 내 안에 담겨있는 밥들은 대부분 금방 한 밥이 아니야. 지은 지 꽤 지난 밥들을 담아 두었다가 내어 주는 거라고. 일부러 맛없는 밥을 줄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거지.


어쨌든 오늘은 무척 기념비적인 날이군. 이 집에 있는 그룻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내가 쫓겨나는 날이니까. 그동안 이 집에서 내가 밥공기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게 씁쓸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컵받침과 플라스틱 계랑 컵을 정리했다.


뚜껑까지 겸비한 스테인리스 밥그릇은 원래 장모님 댁에 있던 것이다. 안에 무언가가 담긴 채로(밥은 확실히 아니었다) 우리 집에 왔었는데, 그만 눌러앉고 말았다. 집에는 사기로 된 멋진 밥그릇이 이미 있었기에, 스테인리스 밥그릇은 한 번도 밥그릇으로 쓰일 이유가 없었다. 밥그릇으로 태어났지만, 그 안에 주로 담겼던 것은 젓갈, 된장, 밑반찬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집안에 더 좋은 반찬 그릇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든다.


식당에 가면,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담겨 나오는 공깃밥은 웬만하면 먹지 않는다. 밥의 양이 너무 작고, 밥 맛도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스테인 테스 밥그릇에 밥을 담아주는 식당은 사실 기본기가 안되어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한식의 기본은 밥이다. 일단 밥맛이 좋아야 한다. 식당에서 밥을 어떻게 다루고 대하는지, 그 태도를 지켜보면 식당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밥을 소홀히 대하는 식당은 다른 음식이 아무리 맛이 있어도 소용없다. 손님에게 맛있는 밥을 제공하려는 식당이라면, 절대로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밥을 줄 수 없는 이유다. 식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손님들의 밥그릇부터 본다. 혹시라도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눈에 띄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온다. 아무리 맛집이라고 소문났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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