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그린 Nov 17. 2022

오래 남는 기억들

어린 시절 기억 둘

1. 시골 살이 7살 ㅡ 까만 얼룩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런 걸 떠올린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너무 옛날 노래인가...) 물론 나는 버스가 하루에 3번 들어오는 산간벽지에서 진달래를 따 먹고 찔레순도 꺾어먹고 병꽃나무 꽃에서 꿀을 빨아먹었다. 항상 개울가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썰매 타기를 했다. 다람쥐는 쫓을 생각도 못했지만 시냇물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 먹었고 동네 아저씨들이 꿩이나 토끼를 잡는 것도 일상이었다.

단오에는 마을의 큰 나무에 그네를 걸었고 복날이면 잔치를 했다. 여름밤에는 늦도록 담뱃잎 말리는 일을 하는 어른들 옆에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놀았다. 온 마을이 같이 두부를 만들었고 메주를 띄웠다. 슈퍼마켓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친구들과 알사탕을 망치로 깨서 나누어먹었다.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유년시절. 어린 시절의 동네 풍경을 떠올리면 낡은 흙벽과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이 함께 떠오른다. 이 얼마나 푸근하고 그리운 시절인가.

그런 산골동네에서의 유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나쁜 일을 말해버리기에는 아쉬운 느낌도 든다. 봄날 감꽃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가을날 마당의 대추나무를 털던 날의 추억을 회상하면 흐뭇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면, 앞집에 살던 동네 오빠 이야기다. 오빠라는 호칭을 쓰고 싶지 않지만 그때는 내가 그렇게 불렀으니까 그저 써보기로 한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앞집 어른들도 고추농사, 논농사 같은 걸 했다. 4남매인 5남매인지의 막내가 고등학생이었으니 나 같은 꼬맹이와 놀 일은 없었다. 그 오빠는 그 집 장남으로 학생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존재로 농사일을 똑바로 돕는 것도 아니었고 동네에 나오면 어린애들을 심술궂게 괴롭혀서 울리는 게 취미였다고나 할까. 잘 생기고 착한 막내와는 달리 번들번들하면서도 날카로운 얼굴에 항상 기분 나쁜 웃음을 달고 있었다.

그런 오빠가 나와 내 단짝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이 나는 것은 세 번이다. 분교에 다닐 때였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였고 날짜는 알 수 없다. 산 입구에 갔던 날 발밑에 낙엽이 많았으니 가을이었나 보다. 남자애들을 괴롭힐 때는 누가 이기나 보게 한 번 싸워보라는 식이었는데 나와 내 친구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우린 여자아이들이었으니 보통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하굣길에 우리를 산 입구 구석진 곳으로 부르더니 너희들 삐꼼이 뭔지 아냐는 둥 이상한 소릴 하며 징그러운 표정을 짓더니 우리 앞에서 바지를 내린 것이었다.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면서 만져보라고 했고 바지를 벗어 보이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계속 망설이자 집에 보내주었는데 어른들께 말하면 죽이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우리는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선은 그 오빠가 무서웠고 엄마 아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느끼는 그 불쾌하고 무서운 기분이 나의 잘못과 구분되지 않았다. 성교육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쨌든 그날부터 나의 아름다운 시골 생활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얼룩이 생긴다고 모든 추억이 더럽혀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얼룩은 절대 지워지지 않기도 하는 법이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다행히 이 정도였다. 그 오빠를 피하느라 너무 늦게 집에 와서 엄마한테 혼이 났는데 계속 울어서 더 혼이 난 것. 왜 늦었는지 설명할 수 없어서 또 혼이 났고 내 처지를 몰라주는 엄마 때문에 나는 계속 울었던 것.

추운 겨울날에는 다른 친구까지 세 명이 또 으슥한 곳에 불려 갔는데 우리에게 노래를 시킨 것. 한 명은 노래를 하고 집으로 갔지만 나와 단짝은 추운 곳에 한참 붙들려 있었던 것. 추워서였을까? 그 오빠가 옷을 벗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 해 설날,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색동 한복을 입고 신이 나서 단짝 집에 놀러 갔다. 친구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그 오빠가 우리를 또 불렀다. 이따가 저 밑으로 둘이 오라고.
나는 겁이 많은 만큼 용기 있는 아이였다.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 길로 집에 뛰어들어가서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ㅇㅇ이 오빠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나랑 친구랑 자꾸 어디로 오라고 시킨다고 소리를 쳤다. 마침 앞집 아저씨가 새배를 하러 우리 할아버지 방에 와 있었다. 운이 좋았다.

짐승들을 잘 잡아 지붕에는 늘 꿩을 매달아 놓던 앞집 아저씨, 술을 좋아하고 아주머니에게 손찌검도 곧잘 하는 아저씨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설날, 그 오빠는 자기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다시는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어른들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고 그래서 어른들은 아무도 그 오빠가 우리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몰랐다. 그저 밥값도 못하는 다 큰 어른이 동네 어린아이들을 괴롭히는 한심한 짓을 했다. 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오빠를 하굣길에 혼자 마주쳤다. 또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싫다고 하자 혼자 휭 하니 갔는데 나는 그 오빠가 언제 또 올지 몰라 계속 초조하게 집으로 걸어왔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1시간이 걸리던 하굣길이었다.

5학년 여름 방학 때 그 오빠가 우리 집으로 농약을 빌리러 온 적이 있었다. 아빠는 흔쾌히 약을 꺼내 주었는데 방에서 그걸 보고 있던 내가 아빠에게 화를 내었다. 왜 빌려주었냐고.
아빠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웃으면서, 이웃에서 빌리러 온 걸 그러면 안 빌려주냐고 했는데. 그때 알았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일, 궁금해하지 않는구나.



2. 대구 살이 11살 ㅡ 할머니와 떡볶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품에 있었다. 3학년이 되던 해, 시골을 떠나 할머니와 단 둘이 대구 단칸방에 살게 되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시골집에 있는 할머니의 방이 대구에 있는 할머니의 방으로 옮겨진 느낌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지고, 예민한 마음의 불안이 넘실대다 넘치길 반복했지만 그런 게 문제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어린이였고 어른들은 너무 바빴다.

할머니는 나를 별로 혼내지 않았다. 혹시나 할머니가 혼을 내면 내가 바락바락 대들었다. 나는 버릇이 없었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다섯 살 아이처럼 생떼를 쓰며 울었다. 할머니는 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나에게 휘둘리는 할머니였지만 용돈이나 군것질에 대해서만은 아주 엄격했다. 엄하게 하려고 그랬다기보다는 생활비가 너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용돈을 거의 주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군것질을 거의 못했다. 시골에서야 동네에 슈퍼조차 없으니 용돈의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대구는 달랐다. 친구들은 다들 용돈을 받아 하굣길에 떡볶이나 떡꼬치, 쥐포 같은 주전부리를 사 먹곤 했다. 나는 가끔씩 그런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한동안 좋아하던 간식은 50원짜리 쭈쭈바였다. 조르고 졸라서 100원을 받으면 2개를 먹을 수 있었다. 어느 여름날 하드가 들어있는 통을 샅샅이 뒤적여 쭈쭈바 하나를 찾아내고 50원을 냈더니 슈퍼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여, 이제 그 쭈쭈바 안 나온데이. 오늘 그게 마지막이데이." 그러고 나서도 100원으로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련한 슬픔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어느 무료한 휴일, 떡볶이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집에서 만드는 것 말고(할머니는 떡볶이를 절대 만들어주지 않았다) 시장에서 파는 떡볶이와 튀김. 아주 잠깐 할머니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았다. 안 된다고 하겠지. 돈이 아깝다고, 돈이 없다고 할 거야. 하지만 떡볶이가 너무너무 먹고 싶다. 말해볼까? 할머니가 화를 내겠지? 그러다 서글퍼진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놀라서 이유를 묻는데도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계속 울었다. 말해봐라, 말을 해야 알지. 하며 한참 달래는 할머니에게 나는 딸꾹질을 하며 "어차피, 말해도, 안, 들어줄 거잖아" 하며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사실은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할머니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좀 지나도 할머니가 집에 오지 않자, 울음을 그쳤던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어딘가에 가버렸을까 봐, 시장에 가다가 차에 치었을까 봐 오만가지 나쁜 상상에 사로잡혀 울었다. 눈물을 그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할머니를 찾으러 가려 마음먹을 때쯤 할머니가 까만 봉지에 담긴 떡볶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대뜸 화를 냈다.

"무슨 일이 난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게 와!!"

"떡볶이 먹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 사 왔는데 먼 소리고, 얼른 먹어라."

떡볶이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맛있었겠지. 떡볶이를 먹으면서 했던 생각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게 뭐라고 나는 말도 못 꺼내고 엉엉 울었단 말인가'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울던 나의 마음을 "다정 소감"에서 발견했다. ㅡ작은 기대일지라도 번번이 좌절될 때 조금씩 바스러지는 마음ㅡ 그때의 내가 겪은 번번이 좌절되던 작은 기대들이 떠올랐다. 아까 온 엄마가 가지 않고 있었으면,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사 먹을 수 있었으면, 팥빙수를 먹어보았으면, 용돈을 100원만 더 받았으면, 집에 친구를 데려올 수 있었으면...


작가의 이전글 하루를 온전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