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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Oct 09. 2022

하루를 온전히

애써 만드는 괜찮은 하루


 때때로 17년 전 오늘 올린 그림판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는 나의 오래된 블로그에 쓰인 한 줄 소개말은 ‘하루를 온전히’이다. 지난 추억 알림을 열어보면 날씨가 좋은 날 시골에서 찍은 사진들이나 어느 날 문득 생각난 듯 쓴 일기가 나오는데, 한결같은 스타일로 심드렁한 느낌이다. 그래도 ‘하루를 온전히’라고 쓰던 순간은 기분이 좋았다. 인생 전반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도 '괜찮은 하루'를 산 날은 얼굴을 펴고 잠들 수 있었으니까, 괜찮은 하루가 모이면 멋진 인생이 된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일만이 넘쳐나던 삶에는 하고픈 일이 끼어들 틈도 잘 생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매일매일 열심히 살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듯한 허망함은 '해야 하는 일'로만 채워지는 하루하루에서 왔다. 쉬는 시간이면 늘 드러눕고, 휴일이면 술 한 잔부터 떠올리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체감했다.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속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끼워 넣기 위해, 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취미 활동 시간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니 집안일은 반드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내에 해낸다. 아이를 재우고 집안일까지 마치고 나면 취미는 무슨, 음악 한 곡 들을 기력도 남아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괜찮은 하루가 되는 날을 써 본다. 7시 반쯤 아이가 깨어날 때 같이 깨어난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잘 잤어?' '응, 잘 잤어'를 주고받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준비한다. 딸기잼 바른 식빵이나 김 가루 밥을 아이에게 챙겨주고 나는 커피와 빵을 먹는다. 유치원 가방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묶어주며 나도 나설 준비를 해서 등원 버스에 손을 흔들어주고 나면 9시 35분.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히 아침 시간이 중요하다. 2시간이 평화로워야 내 시간도 평온하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순간순간 사소한 노력이 꾸준히 필요하다. 상쾌한 아침을 보내려면 아이가 칭얼대기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켜야 한다. 깨끗한 개수대와 아침에 먹을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려면 어제의 내가 부지런해야 했다.

 즐거운 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플라잉 요가를 하는 한 시간은 하루 중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보내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플라잉을 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삐거덕대는 몸과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로 잘하든 못하든 열심히 따라 한다. 요가가 끝나고 친구와 동네 카페에 가서 앉으면 11시 30분.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린다. 아이와 남편 이야기,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번 웃는다. 매일 만나도 할 이야기가 동이 나지 않는다. 배가 고파지면 김밥이나 국수를 사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2시가 훌쩍 넘어가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해한다.

 요가복을 내놓고 서둘러 샤워를 한다. 가방을 정리하면서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 애를 쓴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김치찌개 하나를 끓여도 할 일이 참 많다. 씻을 그릇도 많고 잘라야 할 김치도 있는데 김치통은 무겁고 참치캔은 왜 그리 미끈거리는지…. 때때로 한숨을 쉬며 밥을 안친다. 틈나는 대로 책을 조금 읽거나 보다만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써야 할 글을 휴대폰에 메모하거나 덜 그린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오후 3시, 쪽지 시험을 보기 직전처럼 집중력을 발휘해본다. 슬슬 피곤하지만, 여유가 없을수록 더 열정적으로 뭐라 한다.

매일 보는 길



 4시 5분, 하원 차량에서 아이가 내린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부터 우리는 바깥 놀이를 빠뜨리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면 무한 반복되는 역할극을 하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는 집안일이 싫어서라도 밖에서 오래 노는 편이다. 아이 친구를 찾아서 3개의 놀이터를 옮겨 다닌다. 운이 좋으면 나도 동네 엄마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혼자라도 아이가 잘 놀면 나는 휴대폰을 보면 놀 수 있어 괜찮다. 메모장을 열었다가 웹툰을 봤다가 문서를 열었다가 인스타를 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낸다.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려고 편의점에 들러 주스를 사주면서 아이에게 다짐을 받는다. “들어가면 바로 씻고 밥을 먹고 다음이 주스야!”
아이와 함께 후다닥 씻고 나와 밥을 먹는다. 아이의 밥상은 간장 계란밥이나 계란말이, 생선구이나 불고기로 한 가지 반찬이면 충분하다. 나는 아이의 편식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밥을 먹는다. 낮의 내가 부지런했던 덕분에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다.

  미루면 미룰수록 가장 하기 싫은 설거지를 후딱 해치우고 잠시 쉬는 시간, 아이는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보고, 나는 그 옆에서 책을 본다. 아이는 남편과 블록 놀이를 하거나 나와 책을 볼 때도 있다. 해가 떨어지면 급격한 피곤함이 몰려오지만 크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저녁에 터져 나오는 화는 얼토당토않게 감정적이고 쉽게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자주 심호흡이 필요하다. 힘이 들어서 화장실도 못 가겠다, 양치질은 내일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이와 소모적인 실랑이를 하면서 바닥난 인내심을 억지로 길어 올린다. '지금 울고 자면 내일 아침도 피곤하다.'

 아이와 포근한 이불에 누워 뒹굴뒹굴하는 달콤한 시간에는 종일 무뚝뚝했던 나를 쉬게 한다. 세상 다정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뽀뽀도 주고받는다. 작고 말랑말랑한 몸을 껴안으며 한껏 애정을 쏟는다. “우리 아기 이렇게 말랑하고 귀여운데 엄마가 꼭 안고 잘까?” 하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데 안고 자면 내가 좀 답답해서.”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고 나면 9시. 다섯 살과 함께 잠들어버린 날은 새벽 1시에 눈을 번쩍 뜨고 아쉬워하다 다시 잠들기도 한다. 9시 20분에 울리는 진동 알람에 졸린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던 영화에 푹 빠져서 2시간을 보내고 자는 날은 충분히 괜찮은 하루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일기를 위해 사진으로 남긴 예쁜 순간을 밤에 그리며 '깨어있길 잘했다'라고 느낀다. 종일 지치고 피곤한 일뿐이었더라도 보람찬 한순간으로 밤을 마무리하면 온전한 하루가 된다.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닫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는 새로운 하루를 온전히 시작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늘 보는 하늘




ㅡ어쩌다 그림책 2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까지 쓰는 시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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