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목요일 아침저녁으로 놀이터에 다닌지도 2년이 넘어간다. 1층 현관을 나서면 보이는 놀이터 둘레에는 산수유, 꽃사과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매화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두어 그루씩 심겨 있다. 목련이 두 세 송이 필 때에서야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된 작은 목련 나무. 몇 년 전에 심었지만 아직 어린 나무처럼 연약해 보이고 줄기도 많지 않다. 목련은 봄이 되자마자 이르게 피어 서둘러 져버린다. 꽃이 지고 녹두빛이 나는 둥그스름한 잎들이 하나씩 솟아나고 나날이 겹쳐가며 차차 짙어지는 것이 아름답다. 목련나무의 잎이 예쁘다는 것을 작년에야 알았다. 내 나무로 골라 오늘 사진을 찍었다. 가지는 앙상하고 갈색 마른 잎들이 높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12월 10일 금요일 이제 보니 한 그루가 아니라 세 그루의 목련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저 한 그루라고 착각을 해왔던 모양이다. 내 나무는 그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기다란 포크처럼 얇은 가지가 하늘로 뻗어 있는 나무. 겨울을 맞아 가지치기를 한 흔적이 보였다. 제법 굵은 가지들을 쳐내서 동그란 상처가 여기저기 났다. 손톱만 한 동그라미부터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 큰 것까지.
12월 12일 일요일 보송보송한 것들이 잔가지 끝마다 달려 있다. 꽃눈이겠지? 오른쪽 가지는 비어 있고 왼쪽 가지들에는 꽃눈이 열 개가 넘게 달려 있다. 나뭇잎은 더 떨어져서 우듬지 쪽에 서너 개 꼬부라진 황토색 조각으로 매달려 있다. 어제, 오늘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부는데도 잘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네.
마지막 잎새니?
12월 13일 월요일 저녁 5시 반, 어둑해지는 놀이터에서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나는 나무 앞에 섰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모습. 가까이 다가가서 기둥을 자세히 보니 베이지색인지 회색인지, 갈색빛은 돌지 않는다. 나무껍질은 오돌토돌, 가로로 얇은 주름들이 있었다.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점들이 모인 흔적들이 보였다.
12월 14일 화요일
시가에 가는 길, 평소 주차를 하던 놀이터 앞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나가는 바람에 내 나무를 만나지 못했다. 나를 보고 싶어 하진 않겠지만 어쩐지 헛헛한 마음. 깜깜한 방에 누워 뒤척이는 아이의 숨이 새근새근 고른 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목련 나무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어릴 때는 떨어진 꽃잎이 오래된 바나나 껍질 같다고 생각했다. 갈색으로 지저분하게 짓무르듯이 떨어진 꽃잎들이 싫었다.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때 여기저기 목련나무가 참 많다는 걸 알았다. 꼭 빨간 신호등이 길게 걸리던 병원 네거리에는 유난히 빨리 피어나는 목련꽃이 있었다. 그때는 해가 잘 드는 자리여서 그런 줄도 몰랐다. '여기는 벌써 꽃이 피었구나. 봄이 왔나 봐. 일하러 가기 싫다.' 하며 매일 지나쳤다. 서른이 넘어서는 자목련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꽃은 목련이 아니었고 꽃이 진 후에는 무슨 나무인지도 몰라 봤다. 결혼을 하고 이사를 한 동네에서 과외 수업을 다닐 때 지나는 지름길이 있었다. 동네 아파트 단지의 좁은 오솔길인데 어느 여름날 문득 말쑥하니 키가 크고 날씬한 나무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녹두빛 나뭇잎이 너무 예뻐서 꼭 그려봐야지 하고 사진을 몇 번 찍었고 그리기도 시도했었는데 어려워서 그만두었다. 그때도 그 나무가 목련나무인 줄은 몰랐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다니지 않던 길이라 알 수가 없었다. 꽃 이름을 검색하는 것보다도 나무 이름 찾기는 더 어려워서 이름도 모른 채로 좋아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년 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난생처음 살아보는 아파트, 새 집. 나는 집안만큼 아파트 단지 전체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나무와 꽃이 풍성한 정원은 없었지만 구석구석 산책하며 새로운 이름들도 배웠다. 하얀 꽃이 향기로운 쥐똥나무, 보라색 열매가 신비로운 작살나무, 꽃도 열매도 눈길을 사로잡는 산딸나무... 그러다가 보게 되었다. 집 앞 놀이터도 동글납작한 녹두색 나뭇잎이 달린 나무가 있는 것을. 그 나무에 목련나무라는 푯말을 보고 "아! 너 목련이었어? 걔도 목련이었구나!" 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목련을 생각한다. 웬일로 목련꽃이 그립다. 하얀색 고운 비단 보자기로 정성스레 포장한 작은 선물 같은 꽃봉오리가 둥실 떠오른다. 늘 높은 곳에만 피어서 손에 닿지 않는 곳에만 벙그는 뽀얀 꽃봉오리.
12월 15일 수요일 나무 둥치 아래에 동그랗게 모여 있는 푸른 잎들이 보인다. 이름을 다 알아내서 불러주고 싶지만 아직은 이름 모를 잡초라고 불러야겠구나. 마른 잔디 아래에 짙은 초록색에 뾰족뾰족한 풀들이 빼곡하게 자라는 것이 보인다. 국화 잎과 닮은 풀도 자라고 있다. 겨울에도 푸릇푸릇. 한파가 온다는데 얼지 않으려나.
여기는 초록
12월 16일 목요일 한쪽 가지만 기다란 손가락처럼 생긴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덜 든다. 오늘따라 옆에 선 나무가 그림처럼 예쁘다. 내 나무에게 미안하다. ‘나뭇가지가 특이하고 자유분방하게 생겼다고 친구 나무랑 비교해서 미안해. 내가 못났다.’ 속으로 사과를 건네본다. 뿌연 하늘이지만 보름이 다가오는 달이 둥글게 빛난다. 꽃눈들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12월 18일 토요일 저 위에는 함박눈이 내린다는데 여기는 쨍쨍하다. 눈송이 하나 날릴 것 같지 않다. 해가 뉘엿뉘엿. 한파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이 두 명, 어른 두 명. 목련 나무는 끝에 달려 있던 이파리마저 다 떨어진 것 같다. 춥다. 나무도 추우려나. 12월 19일 일요일 단단한 나무기둥을 바라보며 여름의 목련 나무를 그리워한다. 둥글넓적한 올리브 그린, 손바닥만 한 그리니쉬 옐로, 짙어지는 후커스 그린. 둥글둥글한 잎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초록빛들, 올려다보면 그 초록 사이로 보이는 하늘색 조각들이 보고 싶다. 내 나무가 되어 줄래? 함께 겨울을 보내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자. 앞으로도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