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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an 29. 2022

산책 일기

걸으면 모든 게 좀 나아진다

산책 일

1월 7일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에 까치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녹음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드니 바로 앞 나무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있었다. 깟깟도 아니고 깍깍도 아닌 까치 소리. 두 번 울고 푸드덕 높은 가지에 오르더니 또 두 번 울고 푸드드득 더 높은 아파트 외벽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요가 수업에 늦을까 걸음을 재촉했다. 학교 부지로 몇 년째 비어있는 넓은 땅에는 참새와 까치가 모여 있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참새 소리를 녹음해 보았는데 오르막길을 오르는 자동차들이 가속하는 소리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다. 아쉽구나.


1월 10일 월요일
세 남매가 모두 성인이 된 후부터 엄마의 생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릴 때처럼 귀여운 상차림과 케이크 정도를 준비해서는 안 되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우리가 모두 함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엄마는 자랄 때 생일 축하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슬퍼했고 남편이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것에 분노했다. 우리는 그런 엄마를 위해서 생일을 잘 챙겨주기로 했다. 형편이 되는 범위 안에서 선물과 케이크와 꽃을 정성껏 준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일날에는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나와 여름이, 여동생, 남동생 부부와 율이가 다 함께 모여 보내는 생일이 엄마에게는 최고의 생일이다. 그럴 때 엄마는 힘든 것도 잊고 갈비찜을 하고 잡채를 볶고 미역국을 끓인다.
올해에는 남동생네가 올 수가 없었다. 남동생의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연말에 시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와 여동생이 여름이를 데리고 가서 나들이를 했다. 안동에 가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밥도 사 먹었다. 엄마는 좋다고 말했지만 썩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지 못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와 여동생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 우리는 엄마의 살림, 엄마의 간식, 엄마의 식사... 모든 것을 걱정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엄마는 그 모든 것을 잔소리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느끼듯이.
남동생은 항상 예쁘게 듣기 좋은 말을 한다. 우리가 엄마에게 끝없는 걱정의 말을 하듯이 남동생은 예쁘게 말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딸들이 오만가지 사소한 심부름을 해주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 보고 철마다 나들이를 데려가 주는 것은 아들이 하는 몇 마디 말보다 가볍다. 딸들이 이틀이나 곁에 있어도 엄마의 마음에는 아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상처가 많아 구멍이 났는데 그 구멍을 아무리 메워주려고 해도 나는 할 수가 없다고. 그 구멍의 모양은 딱 남동생의 모양이어서 남동생만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고.
엄마는 여름이의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었고 나와 여동생에게도 용돈을 주었다. 반찬도 한가득 챙겨주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이렇게 헛헛한 것은 엄마의 표정 때문인가 보다. 남동생이 왔을 때 보여주는 그 환한 미소를 한 순간도 보질 못했기 때문인가 보다.
내 집에 와서 쉬니 편하고 좋다.


1월 11일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라고 쓰지만 놀듯이 느긋하게 걸어 다녀 본 지는 한참 되었다. 오랜만에 느긋한 화요일이라 요가를 마치고 좀 걸어볼까 했는데 이럴 수가. 정말 춥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분다. 어제저녁 놀이터에서 발이 꽁꽁 어는 것 같아 털신을 신고 나왔는데도 안 되겠다. 춥다 추워. 하늘은 새파랗다. 이틀 동안 먼지 뿌연 하늘을 보는 것이 서글펐는데.

1월 12일 수요일
요가학원 창문 밖으로 네모난 파란 하늘이 보여서 좋았다. 엄마 생각을 그만하자.라고 또 다짐했다. 또 실패했다.
어제는 엄마 생각을 그만하려고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다시 봤다. 폴카도트맨을 보고 또 엄마 생각이 나서 밤에는 버즈 오브 프레이를 봤다. 그래도 자기 전에 엄마에 대한 기억을 3천 자나 쓰고 말았다.
작년에 쓴 글을 찾아보았다. 그래, 그때처럼 엄마를 싫어하지는 않아. 다행이야.

1월 13일 목요일
운전을 하면 5분 거리인 빵집이 있다. 걸어가면 30분이 넘게 걸린다. 아침에 꼭 거기 가서 소금빵을 사 오고 싶었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빵집으로 가는 텅 빈 공단길은 바람 피할 곳이 하나 없다.
아쉬운 대로 동네에서 괜찮은 산책길을 찾아 길 건너 아파트 오솔길로 올라왔다. 하늘이 이렇게나 파랗고 예쁘다. 올려다본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많다.  솔방울이 열린 소나무 가지들이 야자나무처럼 보인다. 나무 위에 앉은 새 사진을 몇 장 찍는다. 구글 이미지를 찾아 직박구리라는 이름을 알아냈다. 직박구리가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멀리서 대답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녹음 버튼을 눌렀을 때 새는 푸르르 날아가버렸다. 활엽수의 얇은 가지들은 가여울 정도로 가녀리다. 멀리서 보면 엉킨 머리카락처럼 보이지만 가지마다 줄기마다 모두 나무 모양이다. 네모반듯하게 다듬어놓은 영산홍 무리에 뾰족뾰족 새 줄기들이 길게 자라났다. 잘린 부분이 흙바닥인 듯, 나무 꼭대기에서 새 나무들이 자라난다.

나무에 열린 참새, 마른 단풍잎
솔방울들
아침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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