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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12. 2024

그럼, 이제 내 취향을 좀 알겠네?

내가 그걸 알아야 해?


 5월 초는 부담의 연속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대체 공휴일 콤보 사이에 남편 생일도 끼어있다. 생일이라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일 케이크를 사서 촛불 후-부는 행사를 빠트릴 수 없고, 생일 선물도 해야 한다. 내 생일에 미역국이나 선물을 알아서 챙겨준 적 없는 남편이지만, 가족의 도리와 인간적 배려로 나는 다른 반찬은 만들지 않아도 미역국을 끓인다. 온 가족이 잘 먹는 국이라 다행이다. 케이크는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케이크. 올해는 특별한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고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뚜레쥬르에서 배달시켰다. 나는 성질 급한 소인배라 마음 쓴 만큼 상대가 기뻐하지 않으면 즉각 정성을 거둔다. 디자인이 예쁜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하고 찾아와 내밀어보았자 감흥 없는 남편, 생일 선물이라고 고심해서 골라봤자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편이기에 생일 축하는 간단히 하기로 정한 지 오래다.


 늦게 퇴근하고 미역국을 먹은 남편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생일 선물로 신발이나 옷 중을 하나 골라서 링크를 보내면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생활비를 관리한다)

-신발이 나을 것 같다.

-그러면 나이키나 뉴발란스에서 골라라.

-니가 추천 좀 해줄래?

-내가 고른 신발 마음에 들어 한 적 없잖아. 자기가 골라서 말만 해라.

-그래도 골라주지.

-(슬슬 열받는 걸 참으며) 몇 년이나 내가 추천했지만, 항상 마음에 안 든다면서? 내가 고르는 건 전부 자기 취향이 아니라면서?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라고.

-그럼, 이제 내 취향을 좀 알겠네.

-(내적 분노 폭발, 그러나 차분하게) 내가 자기 신발 사는 거 고르는데 쓸 시간이 어디 있어? 바쁘고 할 일 많다. 본인이 고르세요. 나는 자러 간다. 둘 다 할인판매 기간 아니니까 아무 곳이나 골라.

맛있었다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네가 뭔데?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이길래 내 마음과 시간을 그렇게 함부로 쓰게 하는데? 내 생일에 시킨 대로 꽃 한 다발 사 오는 것도 매번 불편해하고 생색내면서(어느 꽃집에 가야 하느냐, 거기는 멀다, 주차가 불편하다 아주 난리다), 몇 번이나 거절하고 결국은 본인 뜻대로 살 운동화를 내가 눈 시리게 찾아봐야 하니? 네가 무슨 까탈스러운 상사라도 되며 내가 너의 부하 직원이니? 비서니? 매니저니? 나한테 월급 주니?

방에 누워서 이불을 뻥뻥 차려다가, 잠든 아이를 깨울까 싶어 조용히 잤다.


 내 반응이 과한가 싶어 놀이터 친구에게 사연을 말했더니 ‘남편이 너에게 관심받고 돌봄 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은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나도 모르지 않는다. 모르고 싶은 진심이 문제이지.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으니까 괴로워서 이러고 있다. 관심에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무심은 극기를 요하는 수련이니까 어려워서 이런다. 친구와의 대화 후 뉴발란스와 나이키에 들어가서 내 취향 운동화를 네 켤레 골라 링크를 전송했다. 몇 시간 후에 답장이 왔다. 뭐라고 왔게? 내가 고른 운동화에 대한 감상은 아예 없이 이렇게 답이 왔다.

-뉴발란스 530이랑 2002중에 뭐가 더 이쁜지 봐줘.

링크도 사진도 없이 메시지 한 줄이었다. 내가 다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검색하고 찾아보라는 뜻이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답장을 보았나?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참고 검색했다. 530은 대부분 품절이라 2002에서 고르라고 친절히 답장했다. 어서 결제하고 잊어버리기 위해 2002중에 마음에 드는 운동화 링크도 보냈다. 또 답장이 왔다.

-이 홈페이지는 비싸고 00 같은 곳이 더 싸다.

한계였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고, 그날 밤에 말했다.

-어디서 사든, 뭘 사든 당신이 골라라.

꼭 사고 싶으면 알아서 고르겠지 싶어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생일도 사흘 전에 지났다.

시가 앞에서 찍은 새 사진

 그리고 오늘 오전, 아이를 집에 두고 이비인후과에 다녀오는데 감기는 좀 어떠냐는 말 한마디 없이 ‘언제 오느냐, 빨리 오라.’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남편에게 전화해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1시 출근 전에 간다고 했으면 되었지, 늦을까 봐 차도 안 가지고 나가고 걸어서 갔는데, 기침이 나서 병원 갔는데 집까지 뛰어가야 하냐? 곧 집에 도착하니까 급하면 지금 나가라!

역시나 미안하다는 사과하기는커녕 ‘그냥 언제 오는지 물어본 걸로 난리냐. 그냥 알았다고 하고 오면 되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남편과 말을 더 이어본들 무슨 소용.

-이제 엘리베이터 타니까 출근해라.

전화를 끊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시원하게(그러나 적절히 작은 소리로) 쌍욕을 내뱉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어휴, 출근하는 남편이 서 있었고.

-갔다 올게.

-왜 마주치고 난리야.


 집에 들어와서 아이에게 떡집 비닐봉지를 건네주고 약을 먹었다. ‘엄마는 좀 누워 있을게.’하고 잠이 들었는데 진동이 울렸다.

-지난번에 내가 샀던 뉴발란스 이름이 뭐였지? 기록 있나?

이, 망할, 완전체 같은 인간. 이걸 쓰고 있는데 괜히 옆에 와서 ‘약은 먹었느냐, 넷플릭스에 올라온 서울의 봄은 보았느냐.’ 말을 거는 공감도 배려도 모르고 눈치나 보는 바보 같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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