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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17. 2024

투움바는 지나가고, 석화와 대구통닭

우리 식탁에 오르지 못할 음식들의 명단 (2)


음식 사진이 없네



 어느 날 계시처럼 석화가 먹고 싶었다. 평소 해삼, 개불, 멍게 같은 해산물은 먹지 않지만, 찬 바람이 불면 꼭 한 번 석화가 생각난다. 껍데기가 있는 싱싱한 생굴은 혼자 먹기 쉽지 않은 음식이라 때를 놓치면 먹지 못하고 겨울이 지나기 마련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겨울이었다. 아기가 이유식을 시작한 5개월 무렵 외출이래 봤자 아기띠를 매고 계란빵을 사 오는 산책이 전부였던 시기였다. 길을 걸으면 누구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나 않으려나 기대하며 두리번거리던 외로운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건 '하님의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잠깐 말씀을 좀 나누자며 태블릿피시를 들이미는 그들에게 나는 아기띠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겁고 힘들어서 빨리 집에 가야 하겠으니 비켜달라고.


 갓난아이를 돌보면서 나의 최애 메뉴는 햄버거가 되었다. 간단한 음식의 대명사인 라면은 아기와의 생활에서 간편하지 않은 음식임을 깨달았다. 매운 냄새에 재채기하는 아기 때문에 라면을 끓일 참도 잘 없지만, 아이가 잔다 싶어 다 끓인 라면을 한 젓가락 먹으면 잉잉 소리가 들리는 법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튤립 사운드나 아기 체육관 장난감 따위에 잠시 의지하며 후루룩 후루룩 먹어도 보았지만, 안아주고 달래주다 보면 팅팅 불어있기 일쑤인 라면. 먹다 두어도 괜찮고, 아이가 만져도 뜨겁지 않으며, 설거지가 나오지 않는 메뉴는 과일과 빵, 햄버거뿐이었다. 햄버거와 샌드위치, 대충 국에 말아먹는 밥을 연달아 먹다 보면 제대로 된 식사가 간절해진다. ‘언제쯤 아기와 외식할 수 있을까.’ 하며 치킨과 맥주를 급하게 먹고 잠들던 시절.


 그러다가 석화가 먹고 싶어진 거였다. 아이와 횟집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예상대로 남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평소 아내의 감정이나 요구에 무심한 남편이지만, 배달시킨 석화 정도는 못 먹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퇴근길에 회사 형님들과 급작스러운 약속이 많이 잡히는(잡히는지 잡는지 알게 뭐람) 남편이기 때문에, 나는 전날 미리 말했다. 내일 저녁으로 횟집에서 석화를 배달시키겠노라고, 아무리 작은 걸 시켜도 혼자 먹기에는 많으니까 꼭 같이 먹자고. 남편은 선선히 알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저녁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약속’의 의미를 외면하는 어린애처럼 남편은 또 형님과 저녁 약속이 생겼다고 했다. 결혼 전부터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두 형님. 회사에서 보고 쉬는 날에 만나고 퇴근길에 마주친 김에 집에 왔다가 다시 나갈 만큼 끈끈한 형님들과 저녁을 먹어야 한단다. 모두가 회사 근처에 살기 때문에 나도 몇 번이나 만난 그 형님이 꼭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단다.


 “나랑 약속했잖아. 나가지 말고 나랑 석화 먹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나는 기분이 상했고, 보아하니 붙잡는다고 붙잡히지도 않겠지만, 마주 앉아 석화를 먹어봤자 피차 입맛 없을 텐데. 남편은 미안하다며, 다음에 같이 먹자는 말을 남기고 형님을 만나러 나갔다. 다음에 같이 먹긴 뭘 먹나. 씩씩대며 배민으로 주문했더니 석화는 금세 날아왔다. 함께 먹으려고 낮에 사둔 청하를 따르고 랩을 벗겨 생굴을 먹었다. 아기가 일찍 잠들었었는지, 내 옆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레몬즙을 뿌리고 초장을 찍어 굴 한 점 먹고, 청하 한 잔 마시고 하다 보니 술이 금세 동났었다는 것과 굴 맛에도 금세 질렸었다는 건 떠오른다. 종일 쌀밥을 먹지 못하고 해산물과 술을 먹었더니 속이 허해졌다. 어디서 본 대로 블로그를 검색, 전자레인지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굴밥까지 만들어 싹싹 긁어먹었더니 그제야 배가 든든했다. 내가 다시는 너랑 석화 먹자고 하나 봐라. 사달라고 해도 절대 안 사줄 테다. 다짐했던 그 겨울 이후로 5년이 흐르도록 우리 집 식탁에는 석화가 오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남편은 생굴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내 알 바인가.

빨간 통닭 사진이 없네

 석화 사건이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언제나 일찍 자는 아기 덕분에 나는 8시면 퇴근을 할 수 있었고, 독서를 시도했으나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밤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날은 낮부터 대구통닭이 먹고 싶었다. 아기 옆에서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고 싶지 않았고, 늦더라도 영화를 보며 느긋하게 먹고 싶었다. 남편과 짧은 연애 기간에 몇 번 갔던 대구통닭. 고추장 맛이 매콤 달콤한 빨간 통닭과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 밤에 같이 액션 영화를 보며 대구 통닭을 먹자고 남편에게 약속받았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치킨을 미리 주문했다. 남편이 좋아하고 나는 의리로 봐오던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보기로 하고 아이를 재웠다. 안방에 가서 영화를 틀려는 참에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또 형님이었다. 남편보다 몇 시간 늦게 퇴근한 형님의 용건은 늘 같다. “술 한 잔?” 나에게 먼저 묻지도 않고 남편은 흔쾌히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내게 미안한 듯한 시늉(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진정 미안한 듯한 시늉일 뿐)을 하는 남편에게 서운하다고 말했지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제나 남편에게 나는 순위권 밖이었다.


 남편이 형님을 꼭 만나러 나가야 하는 쓰잘머리 없는 이유를 브리핑하는 중에 치킨이 도착했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모니터 앞에 상을 차렸다. 꼴 보기 싫어져 차라리 차라리 얼른 나갔으면 싶은 남편이 치킨을 하나 집어 먹었다. “안 나가냐? 형님 만난다면서? 나가라.” 했더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형님이 집 앞에 데리러 온다고 하네.”라며 또 치킨을 집어 먹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기나긴 10분이 지나고 남편이 나가고 혼자 먹기 시작한 빨간 통닭은 두 조각 만에 물렸다. 닭은 너무 짜고 튀김옷은 너무 기름졌다. 각설이처럼 돌아온 분노의 질주를 볼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 전부터 보려고 벼르던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틀었다. 남편이라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을 일본의 저예산 코믹 좀비 영화였다. 이게 무슨 병맛인가? 싶다가 나도 모르게 낄낄 웃고 대단원에서는 찡하게 감동해 버리는 훌륭한 영화였다.

 그날 나는 다시 투움바 파스타와 석화를 떠올렸다. 셀 수없이 많은, 남편이 깨어버린 저녁 약속들에 반복되는 서운함과 다툼들. 내 입으로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치사스러운 사건들은 그 후에도 연이어 일어났다. 몇 해 지나 나이 많은 형님 하나가 귀농한 것을 계기로, 남편은 집에서 저녁 먹는 일이 잦아졌다. 에둘러 써보려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단순히 정말 싫다. 집에서 외로이 홀로 아기를 볼 때는 곁에 없다가, 인제 와서 나에게 귀찮은 저녁밥 일거리만 안기는 남편의 귀가가 반가울 일이 있을까? 요즘 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또 다른 ‘밥 잘 사주는 좋은 형님’이 생겨서 밥도 먹고 실컷 놀다가 늦게 늦게 들어오는 것뿐이다. 오늘 저녁에 괜히 겸상해서 라볶이와 순대를 먹다가 싸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남편이 자기 친구들이랑 행복하고 즐겁게 놀았으면 싶어서 해보는 말이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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