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기온 25도 아름다운 날이건만
어지러워
가을날씨를 싫어할 수 있을까? 이글이글 살아 날 뛰는 여름을 좋아하지만, 짧게 끝나지 않는 무더위를 견디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마침내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게 될 때 잊었던 가을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가슬가슬 부는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 다음 바람을 기다린다. 눈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맞는 아침 공기도 좋지만,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운 몸 위로 바람이 스치는 순간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달콤한 기분이 된다. 동그란 얼굴을 하고 푹 잠든 아이의 보드라운 팔뚝을 쓸어보고, 배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수면등을 가장 어둡게 하고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온다.
의자에는 그림책이 몇 권 쌓여 있고 그 위에 태블릿이 놓여 있다. 밤 독서는 매번 실패(라기보다는 의욕 부진)하고 영화나 드라마, 열 번도 더 본 빅뱅이론을 보다 잠드는 게 일상이다. 드라마 북극성을 보느라 한 달 가입한 디즈니 플러스 채널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텔레비전과 태블릿을 번갈아가며 지금 보는 건 로키.
창문을 얼마나 열어둘 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많이 열면 춥고 완전히 닫으면 갑갑한 방, 잠들기 전에 반 뼘 정도 창문을 열고 포근한 이불을 덮는다. 잠깐 뒤척이며 어지러움을 느끼고 며칠된 어지럼증에 불안감이 엄습, 폰을 다시 집어든다. 이석증, 빈혈, 기립성 저혈압에 관해 무작위 정보를 흡수하고 심호흡을 하며 잠든다.
연휴 전 마지막 평일, 이비인후과 진료는 오후로 미루고 데일리 친구를 만나 브런치를 먹으러 나갔다. 미세먼지가 있다고 하지만 너무나 눈부신 초가을 날씨, 카페 주차장 담벼락에는 파란 나팔꽃과 다홍빛 유홍초가 싱싱하게 피어있었다. 스프와 빵과 커피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창밖 경치를 보았다. 아름다운 날.
그리고 이걸 병원대기실에서 다 쓰고 받은 진단명은 이석증.
빙글, 이석증 검사와 치료
아침마다 겨우겨우 일어나긴 하지만, 기상 동작만은 절도 있고 씩씩한 사람이다. 읏차! 소리를 내면서 벌떡 침대 끝에 앉아 휙하고 일어난다. 앉을 때도 누울 때도 망설임 없이 털썩 움직인다. 나흘 전 아침에도 다리를 쭉 뻗으며 반동을 일으켰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질어질 빙글 돌더니 울렁울렁, 미식미식, 이게 뭐지?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마시면서 괜찮아졌지만 몸에 기운이 없고 앉았다 일어날 때면 어지러웠다. 철분 부족? 빈혈? 기립성 저혈압? 올해 건강 검진에서 다 괜찮았는데, 넘어져 다친 후에 몸이 약해진 건가? 설마 이석증은 아니겠지?
며칠 더 버티며 천천히 움직이자 살 만은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연휴 시작 전에 이비인후과를 찾아 문진표를 쓰고 진료를 받았다. 진료실에서 귀코입을 들여다보고 이석증과 달팽이관 이상, 신경 질환 가능성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보호대를 한 새끼손가락을 보이며 얼마 전 세게 넘어져서 다쳤는데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을지 물어본다.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지만 중요한 상관 관계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어었다. 기본적인 신경 검사를 위해 무릎을 톡 쳤는데 아직 덜 나은 상처 메디폼 자리에 딱 맞았다. “앗! 다친 데라서 아파요!” 다행히 오른 무릎은 때리지 않고 검사실로 이동했다. 별거 아니고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닐까 기대했지만, 검사를 시작하자마자 결과를 알 것 같았다. 검사 과정이 흥미로워서 써 두기로 한다.
1. 바닥 타일이 십자가로 만나는 부분에 강시처럼 팔을 뻗고 서서 눈을 감는다. 그 상태로 제자리 걸음을 50번 시작, 여름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브레인 차일드’에서 아이와 어른의 평형감각 테스트에 나오는 그 실험이다. 제자리걸음 서른 번쯤 지났을까? 선생님이 나를 멈춘다. 실험 결과에 나오는 부모들과 똑같이 나도 시작점을 한참 벗어나 있다. 그리고 역시 놀란다. 머쓱하고 어지럽다.
2.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고글(커다란 물안경인데 오른쪽 자리에는 카메라가 들어있다)을 쓰고 벽에 비친 까만 화면을 본다. 렌즈에 습기가 차면 안 되니까 최대한 입으로 호흡하고, 눈을 크게 뜨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양치질을 하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으로 숨을 쉰다. 까만 화면에 흰 점이 움직인다. 너무 오래 한쪽에 머무는 점을 노려보느라 힘들다. 움직이는 점을 따라 열심히 눈동자를 굴린다.
3. 고글을 쓴 채로 좁은 침대 위에 앉는다. 벽에 있는 작은 파란색 물방울 스티커를 본다. 고글을 새까맣게 하고 스티커를 보듯 눈을 크게 뜨고 앉아 있는다. 입으로 호흡, 눈은 번쩍 뜨고 있을 것.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검사라서 힘들 수 있다는 설명에 안심한다.
4. 그대로 바로 눕는다.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왼쪽으로 돌아누워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기다린다. 일어날 때 어지럼증이 나 잠깐 쉬고 머리가 침대 위에 튀어나오도록 다시 눕는다. 또 오른쪽, 왼쪽 돌아눕기. 그리고 베개를 베고 편히 눕는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왼쪽 귀에 찬 바람을 불어넣고 왼쪽으로 돌아누워 오른쪽 귀에 찬 바람을 불어넣는다. 신기하고 시원하고 오른쪽 귀는 무언가 더 불편함을 느낀다. 잊을 만하면 눈을 크게 뜨라는 지시가 들리면 이마와 눈꺼풀을 들어올려 눈에 힘을 준다. 앞에는 꺼먼 솜뭉치같은 동그라미가 계속 보인다.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어둠의 형상화’ 형체를 보는 기분이다. 양쪽 귀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으면 검사가 끝난다고 선생님이 힘내라는 격려를 해 준다. 오른쪽 귀에 따뜻한 바람이 들어가자 태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오른쪽 귀가 문제구나.
5. 물안경을 벗고 이상한 모양의, 좀 더 편한 고글로 갈아끼고 의사를 기다린다. “돌이 빠져있네요. 제 자리로 돌릴게요.” 목소리가 들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몸이 뒤로 휙 넘어간다. 하나둘셋 다시 앉을게요. 휙 하고 상체를 일으키고 다시 훽, 머리가 침대 밖에 떨어진다. 두두두두 진동이 두개골에 느껴진다. 마사지를 받듯 시원하다. 또 하나둘셋, 자리에 앉는다. 다 되었다고 한다. 고글을 벗고 신발을 신는다.
진료실에서 돌이 어디로 빠졌는지 듣고 설명이 쓰인 종이를 받아 나온다. 결제 금액은 12만 원이 넘어 속상하지만, 거의 어지럽지 않고 한결 기분이 좋아진 걸 느낀다. 친구에게 전화해 역시 이석증이었다고 수다를 떨며 집까지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