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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r 05. 2022

눈과 코로 들어오는 봄

봄비를 기다리는 마음


 비를 기다리기는 처음이다. 소리 내어 말해보면 발음도 산뜻한 봄비이지만 봄비가 내린다고 좋아한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면 싱크대에 던져진 행주처럼 몸과 마음이 축축하게 늘어지곤 했다.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는 게 불편했고 구정물이 튀는 보도블록 위에서 꾸물대는 지렁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싫었다.

 지난겨울에 눈을 기다렸듯, 봄이 되어 비를 기다린다. 건조한 대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맘때의 왕참나무가 마른 낙엽을 달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불에 구운 김처럼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말라 있다. 홍매화가 피었기에 반가워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말라버린 꽃봉오리가 보였다. 며칠째 부는 강풍은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동쪽 바닷가에는 산불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니 지금은 다들 간절히 봄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겠지.

 멀리서 조금씩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봄날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해가 따뜻한 사과밭 구석에서 냉이를 캐고 논두렁의 누런 풀들 사이에서 삐죽이 솟은 달래를 찾아 캘 때 봄은 당연히 거기에 와 있었지만 시골에서 봄 냄새가 제일 잘 나는 곳은 온상(우리 마을에서는 비닐하우스를 온상이라고 불렀다.)이었다.

 온상 안에 봄이 어김없이 제일 먼저 와있었다. 뒷밭에 있는 온상에는 고추 모종을 심은 포트가 많았고, 볍씨나 고추씨를 불려 놓은 물통이나 떡잎만 자란 포트들도 있었다. 아직도 겨울바람이 남아 있는 이른 봄날, 온상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감각들은 다른 어떤 향기나 온기보다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비닐 문을 열고 들어가 풋풋하고 촉촉한 풀냄새와 흙냄새를 들이마시면 처음 솟아오른 새싹들의 연둣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바깥바람에 바짝 마른 콧구멍과 입술을 한 번에 적셔주는 공기로 심호흡을 하며 두리번거리면 비닐을 통과한 햇빛이 뿌옇게 비치고 천장과 벽에 맺혀 있는 물방울이 보였다. 엄마가 큰 물뿌리개로 모종에 물을 주는 동안 나는 비닐 벽에 있는 물방울을 손으로 닦으며 놀았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모종들 사이에 난 잡초를 뽑고 있으면 때때로 천장에 맺힌 굵은 물방울이 정수리에 툭 떨어졌다. 더운 곳에서 하는 일이라 금세 땀이 났고 그럴 때 온상 문을 활짝 열면 시원한 바람이 바로 땀을 식혀 주었다. 작은 온상이라 아이들이 도울 일은 많지 않았다. 4월부터는 우리가 도울 일이 많고 고추 심기는 많이 힘들었지만 봄날의 온상에 따라가는 정도는 소일거리라 재미있었다. 우리가 덥다며 자꾸 온상 문을 열면 엄마는 모종이 찬바람을 맞는다고 문 닫기를 재촉했다. 논농사를 짓지 않게 되고 고추밭이 사과밭으로 변해가면서 온상은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졌다. 이제 뒷밭에서는 사과 묘목, 고구마, 무, 배추가 자란다. 조금 짓는 고추 농사도 모종을 사 와서 심으니 우리 집에 온상이 없어진 지 10년이 넘은 듯하다.

 몇 년 전 봄에 시골에 가서 온상이 없는 걸 아쉬워하니 엄마는 ‘온상을 하면 얼마나 귀찮은 지 아나? 아침저녁으로 물 줘야지, 비닐 걷었다가 내렸다가 해야 되지, 추워지면 담요 덮어줘야지, 그때는 모종 사는 것도 돈이 더 들어서 일일이 다 키우느라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했다. 엄마는 그러면서도 우리를 동네에 하나 남은 장로 아주머니네 온상에 데려가 주었다. 온상 구경을 하고 싶어 왔다고 하니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별 걸 다 구경한다고 했지만 들어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비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발치에 벼 모종들의 여린 이파리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막 태어난 초록빛은 보들보들하고 향긋한 냄새를 풍겨 주었다. 역시 그 촉촉한 풀과 흙의 냄새! 오랜만에 온상의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매년 봄에 시골에 가면 마을의 옛 우물터 옆에 있는 그 온상에 꼭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눈과 코로 들어온 봄기운이 몸속 가득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온상마저 사과밭이 되어서 봄이 되어도 들어가 볼 온상이 없다.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가 낯선 동네 길가에서 작은 온상을 보면 무턱대고 들어가 보고 싶다. 수목원에 있는 실내 식물원에 들어갈 때마다 온상의 향기를 기대하다가 번번이 실망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식물이 가득한 온실이라 해도 새싹으로 가득한 온상의 향기로운 풀냄새와는 다른 비릿한 물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근처에서 봄을 찾아본다. 화단에 있는 홍매화 꽃송이를 매일 들여다보고 내나무인 목련의 겨울눈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확인한다. 바스러지는 강아지풀 더미 아래 돋는 싹을 찾아내고 반가워한다. 5년째 잘 자라는 귤나무 화분에 여느 해보다 귤꽃이 가득 핀 것과 튤립 구근에 싹이 난 것을 보고 미소 짓는다. 비록 튤립은 관리 실패로 꽃 피우지 못한 채 죽어가지만 귤나무에는 열매가 가득해서 풍년이다. 따뜻한 방으로 옮겼지만 생생함을 잃은 허브 화분들을 베란다로 옮기며 싱싱한 풀빛을 되찾기를 바란다. 장날 꽃 트럭에서 6천 원을 주고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를 사 왔다. 싱싱한 봉오리들이 모두 꽃 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기를 다듬어 꽂아주고 매일 물을 갈아준다. 그리고 봄비를 기다린다. 가늘지만 그치지 않고 밤새 내리는 빗줄기, 산과 들에 온기와 숨을 불어넣어주는 봄장마가 오기를 기다린다. 분명 온상의 향기가 솟아오르겠지.

조금 피어난 홍매화


나눠 담은.라넌큘러스


#미루글방

#봄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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