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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19. 2022

집으로 오는 먼 길

서른네 살의 봄에 만난 내 집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서 2년을 살다가 방 2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5학년 겨울, 할머니에게 말했다. "왜 우리는 거실이 있는 집에 안 살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라고 하면 ‘우리 집이 불우이웃’이라고 말하던 할머니의 어이없는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나는 애써 시골에 진짜 우리 집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아, 산골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대구에서 할머니와 유학생활을 했다. 교육열이 높은 아빠가 열정적인 분교 선생님에게 설득당했었다.)


 밤마다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녀 벽지와 벽 사이에 다그르르 흙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재래식 화장실은 귀신도 도망갈 만큼 냄새가 나고 더러웠지만. 삐그덕 대는 셔터가 있던 점포 방과 비가 오면 욕실에서 지렁이가 나오는 집들을 거친 후에 나와 동생들은 해가 드는 2층 집에 살게 되었다.
 
 살던 중 나은 집이라고 해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집은 아니었다. 영심이를 보면서부터 평생 "멀쩡한 집"을 꿈꿨다. 영심이네 집이 얼마나 넓고 깨끗한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꿈꾸는 집은 그런 집이었다. 진지했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해도 집은커녕 내 방 한 칸 가질 수 없는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했다. 나의 결혼 소식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여동생도 이 말에 눈물을 그쳤다.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이 따위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 따위 집’에서 벗어나 작지만 깨끗한 투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임시로 살게 된 신혼집, 주부라는 이름, 삭막하고 낯선 동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삶. 살아본 중에는 가장 좋은 집이었지만 풀옵션 월세방에는 애정은 커녕 내 살림이라는  감각이 잘 생기지 않았고, 내 감정에 무심한 남편과는 거의 매일 다투느라 마음이 기진맥진해져 갔다. 구미라는 도시에 겨우겨우 적응해갈 무렵 꿈에 그리던 내 집, 난생처음 살아보는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집을 내건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래 부끄러웠다. 내 능력 밖의 큰 재물을 욕심낸다는 자책감도 견뎌야 했다. 내 자신이 구시대적이고 속물적 인간이라는 무논리적인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정서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라는 전래동화 스타일의 환상에 평생 묶여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갖고 싶은 것을 가져 본 적 없어 마땅히 가져도 될 욕심마저 부리지 못한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과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사 견적을 보는 2월의 어느 날, 새벽 5시에 깨어나 좁은 투룸의 정리할 것도 없는 살림살이를 정돈하며 설레던 시간이 기억난다. 넓은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4월의 아침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영화 ‘대니쉬 걸’을 보던 순간도 떠오른다. 보람 없는 집안일에서도 벅찬 기쁨을 느꼈던 6년 전 봄을 떠올리며 지나온 방들을 세어 본다. 7개의 방을 지나 이 집을 만났구나. “나에게는 집이 제일 중요했던 거야.” 이 말을 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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